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사정 막판 합의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공은 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유럽연합(EU)이 제시한 마지노선을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비준 책임을 이어받은 국회에서도 해법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등에 따르면 8일 오후 비공개로 노사정 부대표급 협상을 벌였지만,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접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경사노위는 ILO 협약 논의를 이어온 산하기구인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의 합의를 포기하고 이번 주 안으로 전체회의를 열어 관련 논의 내용만 정리한 채 국회로 공을 넘길 예정이다.
이로 인해 EU가 제시한 마지노선인 한-EU 무역위원회가 열리는 9일까지도 한국은 ILO 핵심협약 비준 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은 물론, 이를 비준하기 위한 진전된 성과도 내놓지 못하게 됐다.
앞서 EU는 한국이 2009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ILO 협약 비준 의무조항을 어겼다며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했다.
이미 지난달 18일 첫 단계인 정부간 협의절차가 마무리된 가운데 EU는 9일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놓지 않으면 다음 분쟁 해결 절차인 전문가패널에 회부하겠다고 경고해왔다.
전문가 패널은 90일 이내에 양국의 분쟁사항을 검토해 자문·권고보고서를 제출하는데, 그 결과에 따라서는 EU가 한국을 상대로 제재가 내릴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 무역위원회에서는 EU 측 수석대표인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통상집행위원이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학용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차례로 면담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정부와 국회는 ILO 협약 비준에 대한 의지와 계획을 설명하고 패널 소집을 미루도록 설득할 것으로 보인다.
절차상 정부간 협의절차를 마친 뒤 일정 기한 안에 반드시 전문가 패널에 회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 정부·국회의 설득 여하에 따라 충분히 EU가 관련 대응을 늦출 수 있다.
EU가 다음달 의회 선거를 마무리한 뒤 구체적인 입장을 정리할 수 있는 내부 사정을 감안하면 당장 전문가 패널을 소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말하면 당장 9일 면담을 마친 뒤 전문가 패널을 소집하면서 압박 수위를 높일 가능성도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경사노위와 마찬가지로 국회에서도 해법을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경사노위에서 노사정이 합의점을 찾지 못한 가장 큰 걸림돌은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과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처벌 폐지 등을 거론한 경영계의 요구였다.
이러한 경영계의 주장에 대해서는 노동계는 물론 공익위원들조차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제약하겠다는 주장"이라며 "경영계 요구가 지나친 면이 있다"며 이례적으로 공식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익위원은 "협약 비준에 동의하겠다면서 그 조건으로 협약 내용을 아예 위반하겠다는 조건을 명시적으로 넣어달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국회에서 보수야당이 경영계의 주장을 대변하며 같은 요구를 되풀이한다면 노동계와 전문가들의 반발 속에 협약 비준 논의의 속도를 내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제도개선위 공익위원인 이화여대 이승욱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결국 가시적인 성과가 없이 EU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고, 이미 정부 간 협의가 끝났기 때문에 면담 결과에 따라서는 당장 9일 EU가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또 "그 조치의 내용도 전세계적으로 위반한 선례가 없어 예단할 수 없는 상황으로, 언제 터질지, 폭발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을 계속 안고 가는 셈"이라며 "가능한 한 조속히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