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가지 마요' KCC 이정현(오른쪽)이 9일 현대모비스와 4강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돌파를 시도하자 상대 이대성이 저지하고 있다.(전주=KBL)
끝내 MVP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정규리그와 6강 플레이오프(PO)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팀을 4강으로 이끌었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삼중고에 시달린 끝에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전주 KCC 에이스 이정현(32·191cm)이다. 정규리그에서 생애 첫 MVP에 오르고 고양 오리온과 6강 PO에서 존재감을 입증했지만 최강 울산 현대모비스와 4강 PO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두 시즌 연속 4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KCC는 9일 전북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8-2019 SKT 5GX 프로농구' 현대모비스와 4강 PO에서 80 대 84로 졌다.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무산되며 시리즈를 1승3패로 마무리했다.
이날 KCC는 배수의 진으로 나섰고, 거의 시리즈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뻔했다. 전반을 11점 차로 뒤졌지만 3쿼터 맹추격으로 4점 차까지 따라붙었고, 4쿼터 중반에는 기어이 승부를 뒤집으며 경기를 접전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막판 현대모비스의 노련함에 당했다. KCC는 종료 1분11초 전 브랜든 브라운(25점 10리바운드)의 3점 플레이로 80 대 80 동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작전 타임 뒤 상대 영리한 빅맨 함지훈의 공격 리바운드에 이은 골밑슛을 내준 데 이어 종료 5초 전 이대성-함지훈의 절묘한 패스 플레이에 쐐기골을 헌납했다.
이런 가운데 이정현도 승부처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4쿼터 중반 자유투를 포함해 4점을 넣었지만 접전이던 막판 잇딴 실책이 아쉬웠다. 이정현은 77 대 78로 뒤진 종료 2분 전과 1분35초 전 드리블을 하다 상대 베테랑 양동근에게 공을 뺏겼다.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에서 나온 치명적인 실수였다. 장기인 3점슛도 림을 외면하면서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KCC 이정현이 올 시즌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영예의 MVP를 수상한 뒤 환하게 웃는 모습.(사진=KBL)
사실 이정현은 4강 PO 승부의 관건이었다. 정규리그 국내 득점 1위(17.2점) 도움 전체 4위(4.4개)에 오른 이정현은 오리온과 6강 PO에서 평균 20점 이상을 퍼부었다. 현대모비스에게도 이정현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4강 PO에서 이정현은 끝내 터지지 않았다. 4경기에서 평균 11.8점 4.3도움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득점에서 6강 PO보다 8점 이상 줄었다. 특히 3점슛은 4경기에서 24개 중 4개만 들어갔다.
이번 시리즈에서 이정현은 삼중고에 시달렸다. 이대성과 양동근 등 정상급 가드들의 끈질긴 수비와 빅맨들까지 합세한 집중 견제를 받았다. 현대모비스는 4강 PO에서 적극적인 스위치 디펜스로 이정현의 장기인 2 대 2 게임을 막았다. 이를 뿌리치는 데 상당한 체력이 소모됐다.
이미 이정현은 정규리그와 국가대표 경기로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정현은 최근 몇 년 동안 시즌을 치른 뒤 대표팀에 차출돼 국제대회에 나서고, 새 시즌 직전 팀에 합류하는 사이클이 반복됐다. 그러다 최근에는 시즌 중 대표팀 경기가 열리고, 여기에도 개근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정현은 최근 4시즌 평균 정규리그 50경기 이상을 뛰고 있다. '금강불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대성 등 다른 선수들처럼 부상으로 쉬는 기간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정현은 득점원은 물론 팀의 약점인 가드 역할까지 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해결사에 공격 조율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물론 그래서 MVP까지 수상하기도 했지만 벅찬 상황이었다.
특히 이정현을 괴롭힌 것은 심리적인 부분이다. 이번 시리즈를 앞두고 유재학 현대모비스 감독은 "이대성이 이정현과 같은 수준의 선수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냈다. 이대성도 올 시즌 평균 14.1점 2.8리바운드 3.6도움을 올렸지만 아직 이정현에는 다소 못 미치는 성적이고 경력도 비교할 바가 아니다. 물론 유 감독은 이대성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이정현을 흔드는 교묘한 심리전의 성격도 띠게 됐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겹쳐 현대모비스의 MVP 이정현 봉쇄는 성공한 것이다. 반대로 이정현은 이런 부분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챔프전 진출을 이루지 못했다.
이정현은 한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에서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사진은 레바논과 농구 월드컵 아시아 예선 레바논과 경기에서 레이업슛을 넣는 모습.(사진=대한민국농구협회)
4차전 뒤 이정현은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에이스로서 책임감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반성했다. 이어 "동근이 형 수비에 당했는데 오늘뿐 아니라 시리즈 전체를 형이 다 했다"면서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선수"라고 칭찬했다.
그렇다면 '이정현과 이대성은 동급'이라는 유 감독의 발언은 과연 영향을 미친 것일까. 유 감독은 4차전 뒤에도 이 발언에 대해 "우리 팀 선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고 다시금 도장을 찍었다.
이에 대해 이정현은 일단 "유 감독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니까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없는 것 같다"고 짐짓 의연하게 넘겼다. 크게 영향을 주진 않았다는 것으로도 들리고, 자부심도 엿보이는 대목. (이 발언에 대해 경기 후 이대성은 "전혀 동급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정현이 형은 같은 시대를 뛰면서 배워야 할 좋은 자극제"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자신의 격정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정현이 형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당찬 각오도 내놨다.)
다만 이정현은 다른 심리적 부담감을 토로했다. 정규리그 MVP의 무게다. 이정현은 "사실 현대모비스에서 다른 선수는 버리다시피 하고 집중적으로 수비를 한 것 같다"면서 "그 수비를 제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어 "부진하다는 평가가 나와서 신경이 적잖게 쓰였던 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팀에서의 역할과 대표팀 차출 등에 대한 부담도 적잖았다. 이정현은 전부터 "거의 2년 동안 팀 훈련을 해보지 못한 것 같다"면서 "시즌을 치르면서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고 고충을 토로해왔다. 또 이정현은 "팀 외인 선수들의 성향이 공격적이어서 맞추기가 쉽지 않은 점도 있었다"고도 말했다.
비록 MVP를 수상하고 2년 연속 팀을 4강에 올렸지만 마무리는 역시 아쉬움이 남았다. 이정현은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더 많이 배우고 기량을 닦아서 새 시즌에는 더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는 이정현의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