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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성년', 김윤석이 만든 웃프고 섬세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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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미성년', 김윤석이 만든 웃프고 섬세한 세계

    [노컷 리뷰] 아이러니가 선사하는 웃음, 그러나 웃기지만은 않은

    11일 개봉하는 영화 '미성년'. 배우 김윤석의 상업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사진=㈜영화사 레드피터 제공)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연기를 시작한 김윤석이 데뷔 31년 만에 연출한 극영화. 염정아, 김소진이라는 연기로는 검증을 마친 배우 둘과 4차 오디션을 거쳐 뽑힌 신예 둘(김혜준-박세진)이 나오는 영화. 아마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최소한 백 번은 넘게 다뤘을 '불륜'이 등장하는 영화.

    '미성년'을 다 보고 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장내가 밝아졌을 때 든 생각은 "의외로 되게 웃기고 재미있는 영화"라는 것이었다. 지루할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자주 크고 작은 웃음을 안길 줄은 전혀 몰랐다.

    '미성년'은 평온했던 일상을 뒤흔든 폭풍 같은 사건을 마주한 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가장 대원(김윤석 분)이 가게를 꾸리며 홀로 딸을 키우는 미희(김소진)와 바람이 난다. 대원의 딸 주리(김혜준 분)와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 분)는 우연한 기회에 두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고, 윤아의 기습 폭로로 끝내 대원의 아내 영주(염정아 분)에게까지 그 소식이 닿는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불륜을 소재로 한 기존 작품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초반부터 비밀을 까발리고 시작하는 '미성년'에서 불륜이란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 대신 인물마다 어떻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인다. 주인공 다섯 명의 대처 방식을 통해, 관객은 자연히 그 사람이 어떤지도 가늠하게 된다.

    아마도 극중 가장 나이가 많고 사회적 지위도 썩 괜찮을 대원. 그는 시종일관 회피한다. 아내가 없는 줄도 모르고 방문 앞에서 "나 무릎 꿇었어"라며 꼬리를 내릴 만큼 소심하다. '아니 저런 사람이 어떻게 바람 피울 생각을 했지?'하고 묻게 될 정도다.

    설마 가족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듯, '당신이 바람 피우는 거 온 세상이 다 알아'란 문자 하나에 과장되게 주변을 살피고 쪼그라든다. 불륜 상대가 조산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어찌 병원까진 오지만, 거기서 자기 딸을 보고 나서는 못 본 척 도망친다. 그동안 봐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 웃음이 절로 나오는 추격 장면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대원은 본인이 문제를 일으켜놓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때로는 실소를, 때로는 폭소를 자아낸다. '센 영화'의 '센 역할'로 익숙한 김윤석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는 나약하고 한심한 중년 남성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그가 더 우스꽝스러워질수록 영화는 웃겨진다.

    영주의 반응도 흔히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대원에게나 미희에게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물도 안 뿌리고 뺨도 안 때리며 머리채를 잡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기에 고해성사 시간에만 눈물을 삼키며 간신히 속내를 꺼낼 뿐이다.

    왼쪽부터 '미성년'에서 각각 미희, 대원, 영주 역을 맡은 배우 김소진, 김윤석, 염정아 (사진=㈜영화사 레드피터 제공)

     

    미희 정도가 예상 가능한 인물일까? 잘 모르겠다. 일찍 아이를 가져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그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저장해 둘 만큼 대원에게 진지한 마음을 가졌다. 아이가 아들이라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고 하는 장면에선 천진함과 철없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딸 윤아보다 손이 더 갈 것 같은 미희는 의외의 순간에 밀리지 않는다. 남들이 수군거리는 걸 알지만 개의치 않고, 반말하는 사람에겐 똑같이 반말을 한다.

    분노를 토해내지 않는 영주, 잘못했다고 할 뿐 뭘 제대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대원, 조산 후에는 그저 잠에만 빠진 미희. 이렇게 정적인 어른들과 달리 주리와 윤아는 바쁘게 움직인다.

    주리는 아빠의 불륜 증거를 발견한 후 미희 가게에 찾아가 염탐한다. 윤아는 아빠에게도 찾아가고, 아르바이트 사장에게 부탁하기도 하면서 영주가 대신 낸 병원비를 갚는다. 둘은 또한 세상에 빨리 나와버린 아이를 보며 신기해하고, 알게 모르게 조금씩 가까워진다. 대원과 미희가 기념사진을 찍은,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 놀이공원에 가서 신나게 놀기도 하고.

    영화는 세 명의 성년과 두 명의 미성년을 통해 나이는 그 사람의 성숙함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을 친절하게 보여준다. 벌어진 일을 피하기보다는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쪽은 주리와 윤아이기 때문이다.

    제발 모르기를 바랐던 엄마에게까지 불륜 사실을 알린 윤아가 죽도록 미워도, 주리는 없는 데서 윤아 뒷얘기를 하는 선생의 행동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원망스럽고 싫어했지만, 일단 한 생명으로 마주하고 나서는 윤아는 동생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키우는 데 자기 힘을 보태길 바란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나이로 '성년'과 '미성년'을 가르는 건 온당할까?

    일반적인 전개를 조금씩 비틀며 진행되는 '미성년'은 색다른 맛이 있다. 남성성과 폭력성이 강조된 역할을 주로 맡아 온 김윤석은 '이렇게 섬세한 세계를 창조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감정 묘사에 충실하다. 영화의 많은 부분에 의미가 담겨 있고, 정확히 계산된 설정이 있다. 이를 추측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상 그대로인 것도 있다. 감독 김윤석이 그렇게나 강조하고 자랑했던 '배우들의 연기'는 역시나 훌륭하다. 염정아-김소진-김윤석은 말할 것도 없고, 신예 김혜준과 박세진은 주리와 윤아 그 자체다. 김희원, 이희준, 이정은은 짧지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긴다.

    1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96분.

    왼쪽부터 '미성년'에서 각각 주리와 윤아 역을 맡은 배우 김혜준과 박세진 (사진=㈜영화사 레드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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