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감독들도 역사의 무게가 쌓이지만 여성 감독이 자기 작품을 깊이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영화제 정도로 한정되는 것 같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트랜스: 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김소영 소장의 말이다. 지난해 여성 감독의 '현재'를 살피고 그들이 가진 고유의 작가성을 탐구하기 위해 마련됐던 '여성 영화감독 초청 연속강좌'가 시즌 2로 돌아왔다. 3월 13일부터 4월 24일까지 총 6명의 여성 감독을 만나보자. [편집자 주]
류미례 감독 (사진=시네마달 제공)
결혼해 아이를 낳은 후 예전처럼 작업에 몰두할 수 없었던 류미례 감독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거시적인 주제를 담아내고자 했던 목표를 수정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엄마…'(2004)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걱정이 컸다. '누가 이 영화를 볼까?' 하는 물음이 가시지 않았다. 더구나 영화를 처음으로 공개한 자리에서 "우리 엄마는 지금도 맞고 사는데 이게 뭐 특별하다고?"라는 남성 관객의 평을 듣고 나서 실패를 직감했다.
'엄마…'는 특정한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슷한 경험이 있는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확장성을 가진 작품이었다. 그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엄마…'는 매진됐고, 그 자리를 채운 관객들은 아낌없는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류 감독은 그때의 경험이 지금까지 힘을 준다고 말했다.
10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14호에서 열린 '여성 영화감독 초청 연속강좌' 시즌 2 네 번째 강의 주인공은 류미례 감독이었다.
류 감독은 월간 '민족예술' 기자로 글을 쓰다가 1997년부터 다큐멘터리 제작공동체 '푸른영상'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행복하다', '친구', '엄마…', '아이들' 등을 연출했다. 최근에는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 미디어팀, 416연대 미디어팀 등에서 활동하며 현장과 결합하고 있다.
이날 강의는 '엄마…'를 같이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엄마의 사랑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으나, 엄마와 언니, 류 감독 자신까지 '여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루 살피는 작품으로 발전했다.
류 감독은 "저는 결혼하기 전 20대 때를 생각해 보면 굉장히 심한 명예남성이었던 것 같다"며 "(제가 다녔던) 고대에서는 '약하지 않은 여성'을 계속 장려하고 격려했다. 전 제가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는 게 되게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결혼을 통해 제가 처음으로 여성이라고 자각했던 게,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존재만으로 저한테 자꾸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거다. 당연히 집안일은 제가 해야 하고, '저 남편은 결혼 잘못한 것 같아' 그런 욕을 듣는 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류 감독은 "아이 낳고 나서 다큐멘터리 감독을 그만둬야 하나 싶었다.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작업이 엄마를 찍는 거였다. 누가 이 영화를 볼까 생각하면서 너무 불안해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가족들끼리 봤을 때도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그러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공개됐을 때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많은 관객들에게 욕먹으면 어쩌나 하던 류 감독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2004년 4월 2일 그날 그 자리에서 보내주셨던 환호와 지지가 평생 저를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다큐멘터리 '엄마…'의 한 장면. 가운데가 류미례 감독의 어머니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다큐를 보고 나서) 자기 얘기를 막 하시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관객들이 못 가는 곳에 가서 (거기 있는 걸) 제가 보여드리는 게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했거든요. '엄마…'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어요. 누구나 다 결혼해서 아기 낳고 사는데 누가 이걸 보고 싶어 할까 하는 마음을 (그날의 반응이) 뒤집어준 것 같아요.
(…) 관객과의 대화에서 말씀해주시는 분들 얘기가 너무 지혜롭고 좋더라고요. 사람들은 흔히 (여성에게) '가서 애나 보라'고 하지만 애나 보며 사는 삶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반짝거리는 순간, 고민의 순간을 갖고 있는지… 그때부터 미디어 교육을 열심히 해요.
제 영화 장점 중 하나가 '아,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는 거예요. 제가 촬영을 잘하는 것도 아니어서 많은 분들이 제 영화 보면서 힘을 낸대요. 언젠가 한 번 어떤 행사를 못 가서 다른 분 추천하겠다고 하니 '아뇨, 감독님이 필요해요'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감독이 만든 영화가 아니라 우리 중 누가 만든 영화가 필요하기 때문에'라고요. 그때 제 위치를 안 것 같아요. 내가 내 얘기를 한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형성되는 걸 목표로 삼고 계속 지내오는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며 다큐멘터리를 찍는 건 물론 쉽지 않았다. 류 감독은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촬영이 다 망가졌다'고 말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시간을 쪼개야 했다. 본인 표현에 따르면 "밥하다가 얼른 찍고", 그냥 CCTV처럼 카메라를 세워두기도 했다.
류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여성 감독이 찍은 사적 다큐멘터리를 '말랑말랑하다'고 쉽게 단정하는 것을 반박했다. 류 감독은 "말랑말랑하지 않다. 훨씬 치열하다. 쉬는 시간도 없이 찍는다. 사적 다큐는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면서도 확장을 원하기 때문에 (찍기) 되게 힘들고 어렵다. 사적 다큐가 폄훼되는 게 안타깝다"고 전했다.
이날 류 감독은 자신의 작업 스타일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저는 여백을 못 견디는 것 같다. 사람들한테 (무언가를) 지긋이 보게 하는 걸 못 한다. 빨리빨리 편하게 보여드리고 싶은 욕망이 되게 강하다"면서 "관객들이 지루해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가 못 본 한 컷이라도 있을까 봐 강박이 되게 심하다. 정말 열심히 한다. 다 늘어놓고 그다음에 이야기를 짜 맞추는 식으로 해서 굉장히 편집을 심하게 한다"면서 "다큐가 현실을 재료로 하기 때문에 리얼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다큐는 재구성된 현실"이라고 전했다.
'엄마…'에는 류 감독의 어머니가 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 류 감독은 독하다는 평도 들었다. 류 감독은 "저는 어쨌든 가능하면 찍는다. '재현'에 대한 거부감이 되게 심하다. 재현을 심하게 기피하는 반면, 촬영은 되게 독하게 한다. 어차피 나한테 몸을 내준 내 주인공을 위해서는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열심히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도 그런 저를 좋아하진 않는데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류 감독이 생각하는 다큐멘터리의 매력은 "찍는 만큼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견뎌낸 시간과 삶을 재료로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 순간 들여다보고 예민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류 감독의 관심사는 '모성 이데올로기'다. 그는 "제가 '엄마…'를 만들면서 많은 걸 느꼈다. 생후 3년까지는 (아기를) 엄마가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모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다"며 "저는 계속 모성 이데올로기에 반격을 가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류미례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엄마…'와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