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백지원 (사진=토브 컴퍼니 제공)
'아우라(Aura)'라는 말이 있다.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의 예술이론에서 나온 '아우라'는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이르는 말이다. SBS 금토 드라마 '열혈사제'에서 김인경 수녀를 연기하며 중간에 '평택 십미호'라는 반전 매력까지 선보인 배우 백지원에게는 백지원만의 '아우라'가 존재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듯 보이는 인물 안에 강한 에너지가 뭉쳐져 있었던 김인경 수녀 혹은 평택 십미호처럼 백지원도 연기 열정과 그만이 가진 분위기를 잘 갈무리해 놓은 배우였다. 백지원에게서 '열혈사제'와 오랜 시간 활약해 온 연극무대와는 다른 TV 드라마의 세계,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연기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백지원은 날씨도, 바람도 매우 좋아 카페 옥상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됐다며 미소를 보였다. 백지원은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인터뷰에 임했다.
지난 4월 20일 시청률 22%(닐슨코리아 제공, 전국 기준)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종영한 '열혈사제'는 '악'에 대한 단죄를 제대로 보여준 작은 영웅들 '구담 어벤져스'의 승리를 통해 시청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백지원이 맡은 '김인경 수녀'는 극 중 구담성당의 주임 수녀로 따스하고 속정 깊으며 성당 살림을 도맡아 한다. 매사 잔소리가 많고 걱정도 많은 김 수녀는 비글처럼 뛰어다니는 김해일 신부(김남길 분)를 보며 근심이 더 깊어진다. 온화하고 조용해 보이는 김 수녀도 알고 보면 상처 많은 과거를 지닌 인물이다. 그리고 김해일 신부를 통해 조금씩 변화해 간다.
아직은 김인경 수녀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백지원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다음은 배우 백지원과의 일문일답.
SBS '열혈사제' 속 백지원의 모습 (사진=방송화면 캡처)
▶ 드라마 '열혈사제'가 종영했다. 소감이 어떤가?아직은 끝났다는 실감이 안 든다. 김인경 수녀라는 역할이 작품 안에서 울고 웃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극적인 인물을 산 인물이기도 하다. 극 안에서 좋은 방향으로 변화된 김 수녀를 오래 옆에 두고 싶은 심정이다. 옆에 두고 좋은 영향을 좀 더 받고 싶어서 조금 있다 보내드리려 한다. 제가 잘못하면 잔소리도 듣고, 제가 뭘 하고 있으면 걱정해주고 위로도 해주고. 아직은 나머지 인물들과 같이 잘 지내고 있겠거니 생각한다. 옆에 김 수녀를 조금만 더 두고 잘 갈무리해서, 시간을 조금 두고 보내드리고 싶다.
▶ 시청률과 화제성 모두 잡은 드라마다. '열혈사제'의 인기를 예상했나?처음에 잘 될 거라 생각했다.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까 그런 거라기보다는, 초반 배우들의 합이나 파이팅이 매우 좋았다. 시청률과 관계없이 작품이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워낙 주인공들이 다 연기를 잘 하고, 조연 배우를 다 살려주려고 했다. 서로 욕심내지 않고, 배우로서의 욕심을 내려놓고 상대 배우를 향해서 힘을 모아가는 모습을 초반부터 봤다. 그렇기에 드라마가 안 될 수가 없겠다고 생각을 했다. 배우들끼리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걸 아니까. 다만 시청률과 같이 수치로 보이는 게 좀 더 잘 나오면 좋겠다는 희망은 있었다. 잘 나와서 다행이에요.(웃음)
SBS '열혈사제' 속 백지원의 모습 (사진=방송화면 캡처)
▶ 직접 연기하면서 느낀 '열혈사제'의 인기 비결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일단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 같지만 그것이 나름 현실에서 주는 시원함이 있어서 시청자들께서 대리만족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기존에 보지 못했던 사제의 모습을 보여드렸다. 정의로운 캐릭터는 많지만, 특수요원 출신의 김해일 신부 같은 사제는 없었다. 그런 캐릭터가 주는 반전도 인기 비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연기를 정말 잘했다. 배우들이 이 상황은 100% 진짜라고 믿고 임했기 때문에 연기가 진실하게 나온 거 같다. 이 모든 것들의 합이 잘 맞아서 인기를 얻은 것 아닌가 생각한다.
▶ 김인경 수녀 역을 맡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저는 오는 작품 안 막고 가는 작품 안 잡기 때문에…. 가끔 가는 작품을 잡고 싶을 때가 있지만요.(웃음) 우연히 기회가 되어서 미팅을 하게 됐어요. 기존에 성직자의 이미지랑 다르기도 했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는 생각에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죠. 처음에는 아이돌 출신 수녀라는 설정이 있었기에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노래도 못해, 춤도 못 춰, 외모도 아이돌이 아니야.(웃음) 다행히 중간에 타짜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어요. 김 수녀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동화되고 변화를 해요. 김 수녀의 서사가 전체 이야기 안에서 잘 녹아들어서, 제가 기여를 하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SBS '열혈사제' 속 백지원의 모습 (사진=방송화면 캡처)
▶ 반전 매력에 많은 시청자가 깜짝 놀랐다. 드라마에서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한 '평택 십미호'라는 타짜 역을 선보였다. 십미호로 분해 나올 때 화면 장악력이 대단했다. 장면과 시청자의 눈길을 끈, 말 그대로 '신스틸러'였다.(타짜 역할) 연습을 했는데 NG가 여러 번 났다. 없는 시간에 NG를 내가며 찍었는데 방송을 통해 십미호의 모습으로 잘 비춰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애인 있어요'라는 작품을 할 때도 '신스틸러'라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아직도 그런 말을 들으면 낯설다. 그만큼 좋게 봐주시는 거니 감사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생각이 드는 건, '신스틸러'는 같이 출연한 배우들이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십미호의 경우에도 박경선 검사(이하늬 분) 사무실에 있는 계장님이 십미호를 설명하며 대단한 사람으로 묘사한다.(30회 참고) 작품에서 한 인물이 표현되는 건 배우의 연기도 중요하지만, 그 인물을 주변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등 주변 배우가 연기해주는 게 반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스틸러'로 불릴 때 항상 상대 배우에게 고맙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많이 느낀다. 같이 한 배우가 굉장히 잘 만들어주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 드라마를 찍으며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대사가 있을까?많다. 굉장히 많다. 마지막 회에서 김해일 신부님께…. (잠시 말을 잇지 못함) 너무 많아요. 제 신뿐만 아니라 다른 장면에서도 기억나는 게 너무 많아요. 김 수녀 대사 중에서는, 마지막 회에서 "신부님! 이놈들이 저희를 죽여도 저희는, 저는 절대로 신부님 탓 안 할 거예요.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 당당하게 싸우시라고요!"라고 말한다. 주인공을 향해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부분을 해주겠다는 적극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감사합니다, 김해일 신부님. 덕분에 인생의 큰 짐을 던 것 같습니다. 오늘 신부님은 저에게 이영준 신부님이셨습니다."(31회)라는 말이 마음에 남아 있다. 김 수녀 입장에서는 마음의 상처가 완벽하게 치유가 되든 안 되든, 하나를 딛고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된 장면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SBS '열혈사제' 속 백지원의 모습 (사진=방송화면 캡처)
▶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즐거움이 단순히 웃고 장난치고 이런 즐거움이 아니라 서로 배우들끼리 배우로서, 인물로서 만나면서 상대 배우를 어떻게 하면 살려줄 수 있을까 고민했던 작품이다. 어느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그런 고민을 했다. 배우로서 개인의 욕심이 왜 없겠나. 다들 있다. 그런데 그걸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빛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조연들의 캐릭터가 잘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주인공들이 배려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연 입장에서는 주인공의 서사에서 기여를 해주고 싶다는 자발적인 의욕이 생겨났다. 자발적인 고민을 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정서적으로도, 연기적으로도 더 준비하고 더 노력하고 자발적으로 하고 싶게끔 만든 시간이었다. 그런 시너지가 화면 밖으로도 전달이 됐다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배우 백지원 (사진=토브 컴퍼니 제공)
▶ '열혈사제'는 코미디가 강한 드라마인데 연기하며 힘든 순간은 없었나?제가 개인적으로 웃음을 비교적 잘 참는 편이다. 물론 김남길 씨 때문에 입을 꾹 다물로 어금니를 물고 기를 쓰고 진지하게 연기하려고 했다. 근데 의외로 웃음이 터져서 NG가 날 뻔했던 장면은 마르코 한성규 신부님(전성우 분)과 촬영할 때였다. 편집되어서 방송에 나오진 않았는데, 김해일 신부의 지인인 법의관님이 저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장면이 나온다.(21회 참고) 이후에 김 수녀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면서 복도를 가다가 한 신부님이 '뭐가 아니에요?'라는 말에 내가 놀라고 서로 깜짝 놀라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웃음이 터졌다. 전성우 씨가 보면 말갛다. 진짜 말간 배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라는데 그게 무척 귀여운 거다. 그걸 보고 웃음이 터져서 정말 어렵게 찍었는데 아쉽게 편집이 되어서 안 나왔다. 김남길 씨가 김성균 씨 등 다른 분들은 재밌는 걸 할 거라고 알기에 시작할 때부터 긴장하고 집중하는데, 성우 씨의 경우는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다.(웃음)
SBS '열혈사제' 속 백지원의 모습 (사진=방송화면 캡처)
▶ 연기하면서 어렵지는 않았나?작가님이 대본이나 대사를 편안하게 해도 된다면서 많이 열어놔 주셨다. 배우들이 편하게 연기하게끔 해주셔서 매우 감사했다. 작가님은 배우들이 찰떡같이 잘 살렸다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고맙다. 일단 작가님 대본이 진짜 웃겼다. 대본을 보며 이 장면은 어떻게 하겠구나, 재밌게 살릴 수 있겠구나 했는데 막상 할 때는 그것보다 더 준비해온다. 그걸 보면서 참 많이 배웠다. <계속>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