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걸캅스' 박미영 역 라미란을 만났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걸캅스'의 내용이 일부 나옵니다.
뮤지컬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엄마, '연탄길' 여자 1. 영화 '육혈포 강도단' 미시 아줌마, '죽이고 싶은'의 수간호사, '티끌 모아 로맨스' 집주인, '자칼이 온다' 청소부, '스파이' 야쿠르트 아줌마, '소원' 영석 엄마,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주인아줌마, '국제시장' 덕수 고모, '대호' 칠구의 아내. 드라마 '패션왕' 미싱 1, '더킹 투하츠' 궁중실장, '장옥정, 사랑에 살다' 조사서 댁 안주인, '내 인생의 혹' 고주리 모.
라미란이 맡았던 '이름 없는' 배역들이다. 누구의 엄마나 고모는 그 사람이 가족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만을 설명하고, 수간호사·야쿠르트 아줌마·미싱 1 등은 그 인물이 하는 일을 알려줄 뿐이다.
남들에게는 작고 사소해 보이는 배역일 수 있지만 라미란은 제 몫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차츰 제 이름을 가진 배역으로 대중을 만나기 시작했다. 거칠게 정리하면, 라미란의 연기 인생은 '풍경이나 주변에 가까운 존재'에서 '이름을 가진 또렷한 인물'로 오는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9일 개봉한 영화 '걸캅스'(감독 정다원)는 그런 라미란이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첫 상업영화다. 잘 나가는 여성 형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과거가 있고, 현재는 생계를 걱정하는 가장으로서 권고사직만은 피하고 싶은 주무관 미영. 이름 자체는 평범하지만, 누구의 아내나 엄마나 언니-동생이라는 위치보다는 고유한 자아가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개봉을 6일 앞둔 지난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라미란을 만났다. '걸캅스'는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수사극에서 전·현직 경찰인 여성 2명을 등장시키는 시도를 한 영화로 개봉 전부터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일부 네티즌이 '걸캅스_시나리오_유출.txt'이라며 대사를 예측한 상상 글을 썼고 이는 빠른 속도로 퍼졌다. '걸캅스'를 이미 숱하게 나온 한국의 '경찰 영화'의 뻔함을 답습할 영화로 단정지은 것이다.
라미란은 "개봉 전에도 많은 관심 보여주시더라"라며 "그 관심만큼 극장에도 와 주셨으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여성 배우들에게 좀처럼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언급하며 "계속 도전해야죠. 길을 열어나가야죠. 선배님들이 했던 것처럼"이라고 밝혔다.
일문일답 이어서.
▶ 미영은 밥상머리에서도 서로 으르렁거릴 만큼 앙숙으로 그려지던 지혜(이성경 분)와 비공식 수사를 함께하는 파트너가 된다. 이성경은 현장에서 어떤 배우였나.이미 자기 색깔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이성경이라는 사람의 색깔이. 그러기가 쉽지 않을 나이인데 벌써 확고하게 있는 것 같아서, 후배나 동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끌어줘야지 이게 아니라, 정말 동료로서 충분히 갈 수 있는 느낌?
▶ 미영의 민원실 단짝 장미를 연기한 최수영은 어땠나.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욕은 재밌게 들릴 수도 있고, 진짜 살벌하게 들릴 수도 추잡하게 들릴 수도 있다. 장미 역할이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방대하기도 하고, 4차원이기도 하고. 좀 독특한 캐릭터이다 보니까 되게 갈피 잡는 게 힘들었을 것 같다, 다른 캐릭터보다. 제가 생각했던 그 정신없음을 차분하게, 대사도 오버스럽지 않게 그냥 늘 거기 있는 사람처럼 슥 들어와 주니까 너무 좋았다.
왼쪽부터 각각 양장미, 박미영, 조지혜 역을 맡은 배우 최수영, 라미란, 이성경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성경 씨도 그렇고 셋이 민원실에 앉아있을 때가 그래도 제일 재밌었던 것 같다. 민원실 장면이 잘 나온 것 같다. 되게 걱정을 많이 했다. 초반에 그 틀을 잡아주지 않으면 저희가 나오기가 힘들다. 사건을 마주하고 인지하고 알아서 나오는 게… 근데 염혜란 씨(민원실장 역)도 그렇고 최수영 씨도 뒤에서 훅 밀어주니 가능했던 거다.
▶ 신종 마약을 이용해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르는 무리가 나온다. 그 우두머리 역을 맡은 위하준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실제로는 너무 착하다고 한 인터뷰를 봤다.너무 착한데, 연기할 때 보면 다르다. 원래는 너무 귀엽다. 연기하면 날 선 눈빛을 보여준다. 우리가 맨날 놀렸다. '날 선 눈빛'이라고. (웃음) 얼마 전엔 또 달달한 역할을 하기도 했고, 웃을 때 보면 한없이 사람 좋아 보이는데 웃음기 빼면 날 서 있더라. 앞으로 정말 많은 역할,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걸캅스' 카메오 군단이 화려하더라. 또, 영화 찍을 당시보다 지금 더 잘된 배우들도 나오고.저는 사람들이 재홍이(안재홍)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아서 걱정했다. 원래 하얗고 통통하고 소라빵(손 모양)이 매력인데 갑자기 새까맣게 나오니까… '어떡해~ 우리 재홍이 잊혀졌나 봐'… (일동 폭소) 둥글둥글 착한 이미지로 나오던 애라 그런가. (극중) 이름도 없다. 불량학생 2인가 그렇다. 제 멱살을 잡는데 손이나 어찌나 귀여운지! (일동 폭소)
성동일 선배님은 그냥 말씀을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저 때문에 해 주신다고. 재홍 씨는 감독님 학교 후배고. 하정우 씨는 대표님이 끌어왔다. 위하준 씨도 그렇고 (조)병규 씨도 그렇고, 쏭삭 우리 (안)창환 씨도 그렇고 그런(지금 더 잘된) 배우들이 많다. 우리가 미리 썼다! (웃음)
▶ '걸캅스'는 본인의 첫 상업영화 주연작이면서, 정다원 감독의 첫 상업영화 연출작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작품은 라미란을 주인공으로 하겠다고 아예 정해놓고 갔다던데. 작업한 후기가 궁금하다.저에 대해서 잘 몰랐을 텐데 (웃음) 무슨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는지 모르겠다. 저랑 만나서 얘기한 적도 없어서. 대중이 보는 시선으로 절 봤다고 생각한다. 미영의 모습은 아마도 대중이 저라는 배우에게 바라는 모습, 이 언니가 이래 줬으면 하는 그런 모습을 투영한 게 아닌가. 저랑 친하고 잘 알았다면, 저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썼다면 또 다를 거다.
감독님이 워낙 좀 4차원인 것 같다. (일동 웃음) 되게 어? 하는 게 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엉뚱한 것 같은 주문을 한다. '떠오른다, 이 그립감' 하는 대사에서 저는 '감독님, 너무 스릴러 같지 않아요? 공포물인 것 같지 않아요?' 이랬는데 느끼는 지점이 다르더라. 그럼 제가 따라가야 한다. 젊은 감각을 따라가야 하니까. 감독님도 상업영화 처음이시고 하니까, 저만큼 떨었을 거다. 본인이 쓰고 연출하고 이러는 게. 근데 잘 버티고 하시더라.
라미란은 '걸캅스'에서 과거 잘 나갔던 형사 박미영 역을 맡아 처음으로 본격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사진=㈜필름모멘텀 제공)
▶ 요즘 더 만연해진 디지털 성범죄를 본격적으로 다뤘다.(미영이 사건에) 이렇게 뛰어든 이유도 진짜 화가 나서다. (웃음) 그놈들(범죄자)에 대한 화보다는… 피해자들이 자기 탓하는 것에 화났다고 하지 않나. 그 부분이 진짜 공감됐던 것 같다. 정의감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건 아니니까. 답답한 거다, 왜 피해자들이 도로로 뛰어들고 빌딩에서 뛰어내리고 또 상처 입고 숨는 건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거다. 너희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거기에서 동기를 찾는 거다. 그러면서 내 안에 있던, 묵혀있던 (열정을) 끄집어낸다. (이런 범죄를) 소소하다고 하는 건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를) 바라보는 관점인 것 같다. 편견이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말이 있지 않나. 세상에 좋은 범죄는 없다.
그것도 화가 나는 것 같다. 잡아봐야 벌금 몇백만 원이라고, 마약상 잡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잖나.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이것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현실을 탓할 수만도 없다. 일할 사람은 적고, 일은 많고. 구조적으로 사회적으로 개선됐으면 좋겠다.
일반적인 사람들도 그것(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자각하고 좀 더 조심하고 그럴 수만 있어도… 이런 디지털 성범죄는 동영상을 돌려보면 그 사람도도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거다. 그런 거에 대한 인식 개선만 있어도 좋겠다. 너무 무겁게 볼 필요 없고, 가볍게 편한 마음으로 와서 보고 그런 생각 한번 정도만 해 주면 좋지 않을까 싶다.
▶ 최근 버닝썬 게이트가 수면 위로 떠 오르면서 영화의 시의성이 주목받고 있다. 이런 상황이 영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나.모 아니면 도일 것 같다. 흥행 여부가 크게 중요하겠지만 (웃음) 손해 보지 않을 정도면 너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힘을 받을 수 있다면 후속이든, 다음 작품에든 여배우들이 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제작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거로 그냥 끝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른 영화에서) 다루지 않는 사건을 다룰 수도 있고. 재미있고 경종 울릴 수 있는 영화를 또 했으면 좋겠다.
▶ '걸캅스' 관련해서 개봉하기 전부터 부정적인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그런 반응도 보았나.개봉 전에도 많은 관심 보여주시더라. (웃음) 잘 보고 있다. 그 관심만큼 극장에도 와 주셨으면.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 한 얘기는 (제가) 어쩔 수가 없다. 곧 오픈하니까 보시고 나서 나오는 리뷰는 다 봐야죠. (지금 나오는 것도) 다 보고 있다. 아이디 체크하면서. (일동 폭소)
'걸캅스'의 두 주인공 박미영과 조지혜는 전·현직 형사다.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 형사'의 코믹 수사극을 그렸다. (사진=㈜필름모멘텀 제공)
▶ 반면 '걸캅스'를 지지하고 개봉을 기다려 온 사람들도 있다.절대적인 지지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다. 여배우가 해서라기보다는, 필드에 출사표를 낸 거니까. 이런 시도들에 대해 되게 높이 평가하고 좋은 방향으로 바라봐주시는 건 되게 좋은 현상인 것 같다. 그런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러니까 계속 도전해야죠. 길을 열어나가야죠. 선배님들이 했던 것처럼.
▶ 극중에서 어린 지혜가 '여자도 경찰이 있어?'라고 하고 질문하는 장면이 초반에 나온다. '걸캅스'는 그동안 한국영화가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 경찰'의 존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워낙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왔으니까… 이게('걸캅스'가) 거대한 조직과 싸우는 건 아니어도 (이런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사실은 필요한 부분이지 않나. 저희는 정·재계의 거대한 음모에 맞서지 않지만, 해결해야 할 범죄들이 너무 많다. 오히려 남자 배우가 여기에 뛰어들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궁금하다. 사실 (미영과 지혜는) 경찰의 신분도 아니지 않나. 저도 그렇고, 지혜도 민원 보조하는 상태고. 아무 것도 없는 사람끼리 툭 뛰어들어서 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통쾌함이 있는 것 같다. (마땅히) 해야 할 사람들이 짠! 하고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 옆집 언니 같은 사람이 도와줬어' 이런 느낌이 우리('걸캅스')한테 더 맞지 않았나 생각한다.
▶ 최근에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 나왔다. 출연 계기가 궁금하다.원래는 안 한다고 했다. 우리 사생활이라는 게 일하는 것밖에 없는데… 연기하고 움직일 때(이동할 때) 잠자고… (웃음) 그럼 계속 자는 영상만 나오는 거다. 갑자기 매니저한테 '나라야, 안녕?' 이럴 순 없지 않나. (일동 웃음) 갑자기 꾸밀 수도 없고. 이게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맨날 게으르다고 잠만 잔다고 욕먹을 수 있다고. (웃음) 아무튼 매니저를 많이 설득했다. 예능이 은근히 힘들더라. 살신성인했다. 저는 집 나가는 것도 되게 안 좋아한다. 사생활 알려지는 것도 싫고. SNS도 안 하고. 집에서도 잠만 잔다. 소파에 누워있고 TV만 보고 뭐 해 먹고. 가만히 있었더니 오디오가 계속 비는 거다. (웃음) 사람이 배고프다고 '뭘 먹어볼까~' 이런 거 (혼잣말로) 안 하지 않나. (일동 폭소)
▶ 마지막으로 '걸캅스'를 기다릴 관객들에게 한 마디 해 달라.요즘 날씨가 좋으니까 나들이 겸 나오셨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고 즐기시고, 돌아가실 때 경각심만 가져주시면! 고 정도만 하시면, 정말 감사하겠다. <끝>
배우 라미란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