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505 보안부대를 찾은 전 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씨가 1980년 5월 당시 상황을 설명 중이다(사진=박요진 기자)
"24시간 보일러를 가동해 인근 민가에서 장독대 뚜껑을 열어두지 못할 정도로 그을음이 많았다"
전 505 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씨와 전 미군 501 정보여단 정보요원 김용장씨가 15일 광주 서구에 위치한 505 보안부대와 국군 통합병원 옛터를 찾아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이 저지른 만행을 고발했다.
자신이 근무했던 505 보안부대 터를 찾은 허장환씨는 1980년 5월 16일 신군부의 광주 진압 작전의 시나리오가 완성됐다고 증언했다. 허씨는 "1980년 5월 16일 서남의 대공과장이 광주 진압 지시를 받고 부대로 복귀해 관련 내용으로 회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5·18 기념재단이 주관한 증언대회 등에서 "5·18은 신군부의 정권찬탈 시나리오대로 진행됐다"는 주장을 이어간 것이다. 이어 허씨는 "505 보안부대 지하에서 특히 많은 광주 시민들이 고초를 겪었다"며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은 차량에 실려 건물 뒤쪽 지하로 입구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전 주한미군 정보원 김용장씨가 15일 505 보안부대 옛터를 찾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사진=박요진 기자)
허씨는 "고문과 조사가 이뤄진 505 보안부대 지하실로 들어가는 경로는 두 가지로 수사관들이 들어가는 통로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길이 달랐다"며 "지하실로 들어가기 전 두건을 씌웠으며 자기 발로 걸어서 나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들의 여러 차례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실과 관련해 좋지 않은 생각이 든다"며 지하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함께 505 보안부대를 둘러본 김용장씨는 "5·18을 전후해 505 보안부대를 수십번 드나들었다"며 "구체적인 상황을 모두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신군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고 말했다.
505 보안부대 본관 건물 2층 부대장실 부부대장실에 들어선 허씨는 "보안사령부가 광주의 참혹한 역사를 만들어낸 방"이라며 "작전 상황도를 펼쳐놓고 철저한 계획 아래 광주 진압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허씨는 "505 보안부대 통신병이 '자위권 구사 발포 사살 합의'라는 보고문을 보내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광주 서구에 위치한 505 보안부대 터(사진=박요진 기자)
이어 광주 국군 통합병원 터를 찾은 허씨는 "국군 통합병원에서 살상 행위가 이뤄졌는지도 밝혀야 할 과제 중 하나"라며 "최소 한 명 이상의 시민이 공수부대 소속 군인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국군 통합병원 보일러실을 찾아 5·18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 일부가 보일러실에서 소각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허씨는 "보일러실에는 정상적인 보일러 운영과 상관없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며 "당시 6월 초에 해당하는 무더운 날씨임에도 24시간 보일러가 가동됐으며 병원 주변 민가에서 그을음이 심해 장독대를 열어둘 수 없다는 민원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군통합병원 보일러실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보안목표(사진=박요진 기자)
실제 보일러실 한쪽 끝에는 굴뚝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막힌 화덕과 전기장치 등이 남아 있었다. 허씨는 "이 공간을 굴뚝에서 발생한 재를 제거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를 청소하기 위해서라면 전기장치 등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장씨 역시 화덕 시설 앞에 한 구조물을 두고 "시신을 소각하기 전 시신을 올려뒀던 시설물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허씨는 당시 국군통합병원 병원장이 5·18 이후 4번째로 높은 서훈을 받은 점과 병원 보일러실을 보안사가 보안 목표로 지정한 사실, 굴뚝 주변에 삼중 철조망이 설치된 점 등을 토대로 시신 소각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증언대회 등에서 허씨는 "계엄군이 간첩을 색출하기 위해 가매장된 시신들을 재발굴해 지문을 채취했다"며 "이후 일부 시신은 병원 보일러실로 옮겨 소각하거나 바다에 버려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