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대화가 끝내 결렬됐다. 정부가 구상했던 노사정 합의를 통한 비준이 사실상 실패하면서 '선(先)비준 후(後)입법' 주장에 힘이 실릴 전망이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20일 오후 운영위원회 회의를 진행했지만, ILO 핵심협약 비준 조건에 합의하지 못했다.
경사노위는 지난해 7월부터 산하기구인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를 통해 ILO 협약 비준 문제를 다뤘지만, 지난달 대화 결렬을 선언했다.
이후 운영위원회가 20일을 '데드라인'으로 잡고 최종 논의를 진행했지만, 이번에도 끝내 노사간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운영위 협상에 참석했던 한국노총 이성경 사무총장은 "ILO 협상에 관한 문제는 워낙 첨예하게 엇갈리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며 "협상을 하려면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경영계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상황이니까 얘기하기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경사노위는 일단 본위원회에 관련 안건을 보내기로 했지만, 이미 탄력근로제 개편 문제로 두 달 넘게 본위원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만약 본위원회가 가까운 시일 안에 정상화되더라도 여전히 노사간 입장 차이가 크기 때문에 다시 국회로 공을 넘길 가능성이 높다.
국회 역시 여야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은데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도 ILO 협약 비준을 밀어붙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단기간에 협약 비준과 법 개정을 이뤄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처럼 ILO 협약 논의가 표류하면서 협약 비준을 요구해온 유럽연합의 외교적 압박도 거세질 전망이다. 애초 EU가 제시한 협약 비준 논의의 마지노선이었던 지난달 9일까지도 경사노위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장 다음 달 10일부터는 ILO 100주년 기념총회가, 23~26일에는 EU 의회 선거가 열리기 때문에 이때까지도 경사노위 논의에 성과가 없다면 무역분쟁 해결절차 마지막 단계인 전문가패널 소집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에 따라 노동계가 줄곧 주장했던 정부가 주도하는 '선비준 후입법' 방식에 힘이 실릴 전망이다.
앞서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지난 달 "대통령이 비준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법 개정 내지 국회의 비준 동의가 필요하다"며 국회 동의만으로도 협약 비준이 가능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
다만 노동부 이재갑 장관은 "그것은 아주 테크니컬한 말씀이고, ILO 핵심협약의 경우에는 사회나 산업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큰 협약"이라며 "ILO 핵심협약 비준동의안을 먼저 국회에서 처리하고 거기에 맞춰 법을 개정하는 입법절차를 기대하기는 좀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반대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 정부가 구상했던 사회적 대화로 명분을 쌓아 국회 입법을 추진하고, 그 결과에 따라 협약을 비준하는 시나리오는 첫 단추부터 실패한 만큼 정부도 입장 변화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경사노위에 참여하고 있는 한 노동계 관계자는 "이번처럼 정부가 필요한 안건을 밀어붙이기 위해서 진행하는 '보여주기'식 사회적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지금이라도 정부가 비준동의안이나 정부 입법안 등을 마련해 협약 비준 추진을 앞장서야 하지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가 국회에 개입할 수단이 마땅치 않아 성과를 거두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