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드러난 사법부와 행정부의 유착, 법관 독립성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발의된 법안들이 좀처럼 논의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이 재판에 넘겨지고 일부 법관은 내부 징계를 받게 됐지만 문제를 초래한 시스템은 변한 것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법복 벗자마자 청와대행…법안 7건이나 발의 됐지만 '못 막아'
26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법원조직법'과 관련해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총 50건이다. 이 중 2017년 사법농단 사태가 불거진 후 법원 내의 고질적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나온 법안만 최소 15건이지만 모두 소관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특히 최근 김영식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의 청와대 법무비서관 임용 사례를 막을 수 있었던 법안은 2017년부터 올 초까지 총 7건이 발의됐지만 한 건도 처리되지 않았다. 법관이 퇴직 후 일정 기간(최소 1년) 내에는 청와대로 옮기지 못하도록 한 내용이다.
만약 이 중 한 건이라도 빠르게 입법이 이뤄졌다면 김 전 부장판사의 청와대행은 법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2017년 9월 이러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한 의원 중 한명인 김도읍 자유한국당 의원은 비슷한 법안 5건이 사법개혁특별위원회(이하 사개특위)로 넘어간 뒤 논의에 진전이 없자 올해 2월 일부 내용만 변경해 같은 법안을 재발의 했다.
지난 3월 25일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의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김 의원은 "사개특위에 맡길 수가 없는 게 이 법안은 일단 시급성이 있다"며 "행정부 소속인 검사도 이러한 제한이 있는데 삼권분립 체제 하에서 사법부에는 제한이 없다"고 논의를 촉구했다.
이어 "지금 이 정부가 사법농단·적폐에 관심이 많은데 그런 측면에서도 상당히 시급하다"며 "사개특위는 언제 결론이 날지 모르고 너무 많은 법을 갖고 있다. 이 법만큼은 이번에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해당 회의에서 소위원장인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같은 내용의 법안이 여러 건 상정됐을 때 같이 심사를 해서 조정하는 것이 국회법상 절차"라며 법사위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대했다.
◇ 법원행정처 폐지·판사 승진제도 개편 등도 답보상태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 등의 공소장에는 판사 출신인 법무비서관이 청와대와 대법원 법원행정처 사이에서 부적절한 소통 창구 역할을 한 정황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인사는 삼권분립의 견제·균형 정신을 해칠 뿐 아니라, 법관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때 '권력과 가까운' 자리를 꿈꾸며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문제로 지적됐다.
사법농단 사태의 주요 범행자 14명은 재판에 넘겨졌고 기소된 법관을 포함해 현직 판사 약 20명이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독립적이어야 할 법관을 인사와 승진 등으로 줄 세우는 권위적인 조직문화 등 사법농단 사태를 초래한 시스템 자체는 아직 수리되지 못하고 방치된 셈이다.
발의된 법안들은 이미 이러한 문제의식과 해결방안들을 담고 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 △법원행정처 폐지(또는 행정처 내 판사 감원) △재판 사무분담을 위한 판사운영위 구성(법원장 권한 분산) △사법행정사무 총괄 위한 사법평의회 또는 사법행정위원회 설치(대법원장 권한 분산) △대법관 증원 및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구성 다양화 △법관 평정에 징계 여부 포함 △징계 대상 법관 사표 수리 금지 등이다.
대법원은 이미 지난해 2월 정기인사부터 사법연수원 25기 이하에 대해 고등법원 부장판사 신규 보임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법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고법에서 재판장을 맡길 판사들에 대해서는 '직무대리'로 어정쩡한 인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탈법관화'를 목표로 법원행정처는 올해 상근 법관만 10명을 감축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행정처 구조 변화 등 법적 기틀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법원 사무관들의 업무 혼란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돼 징계 대상자로 거론됐던 윤성원 전 인천지법원장과 김종복 전 광주지법 목포지원 부장판사는 징계 전 사직서를 내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김영식 법무비서관 사례와 마찬가지로 2017~2018년 이미 발의된 법안들이 제때 통과됐다면 없었을 일들이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사법농단 이후 일부 고위 법관 징계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원인이 된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사법부의 인사·조직 문제 등에 대해 '선플'은 물론 '악플'도 없는 무관심한 상황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