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제공)
2017년 8월부터 1년 9개월 동안 전국 23곳에서 잇따라 발생한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는 제조결함부터 운영·관리 미흡까지 총체적 부실이 빚어낸 인재인 것으로 밝혀졌다.
관리 부실과 설치 부주의가 직접적 원인이고 제조 결함도 관련이 있다는 게 민관합동 ESS 화재사고 원인조사위원회의 조사 내용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ESS 연쇄 화재는 근본적으로 정부의 급속한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정책에서 기인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마디로 과속이 빚은 참사라는 것이다.
또 직접 원인은 아니더라도 배터리 제조사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업체들의 책임소재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일 전북 고창군 상하면 한국전력시험센터 에너지저장시스템(ESS)에서 불이 나 연기가 치솟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 "ESS 과속이 화 불렀다"…신재생 바람 타고 급성장한 ESS, 화재로 제동ESS(Energy Storage System)는 생산된 전기를 배터리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내보내는 장치다.
밤이나 바람이 없는 날 등 태양광과 풍력이 전기를 생산할 수 없을 때도 전력을 공급할 수 있어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 꼭 필요하다.
전 세계가 미래 신성장산업으로 주목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는 현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에 발맞춰 국내에서도 빠르게 발전했다.
국내 ESS 보급은 전기요금 할인 특례,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지급 등 각종 지원책에 힘입어 2017년부터 급격히 성장했다.
2013년 30개에 불과하던 사업장 수는 지난해 947개로 급증했고 배터리 용량도 30MWh에서 3천632MWh로 늘어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 기준 국내 ESS 시장 규모는 세계시장의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
하지만 ESS 설비에 대한 운영·관리 체계는 이런 양적 성장을 따라잡지 못했고, 1년 9개월간 23건의 화재사고를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현행 안전 기준을 보면 ESS 성능 기준은 물론 배터리나 PCS(전력변환장치) 등 주요 부품에 대한 인증 기준이 없다. 설치 장소에 따라 ESS 설치 용량을 제한하는 규정도 없고, 병원·호텔 등 다중이용시설에 설치돼 있는 주요 설비임에도 소방·방화시설로 지정해 놓지도 않았다.
이에 따라 정부의 안전관리 허점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연쇄 화재가 안전 기준이 취약한 상황에서 ESS 보급에만 치중하다가 벌어진 사태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정부 책임론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승우 국가기술표준원장, 김정훈 민관합동ESS화재사고원인조사위원장 등이 1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전기적 충격에 대한 배터리 보호시스템 미흡, 운영환경 관리 미흡, 설치 부주의, ESS 통합제어·보호체계 미흡' 등 4가지 요인이 화재사고의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 제조 결함에 대한 책임론도 일 듯…조사에 대한 객관성 결여 문제도 거론민관합동 조사위원회는 화재 사고의 원인으로 배터리 자체의 결함보다는 보호ㆍ운영 등 관리 미흡을 더 주요하게 보면서 배터리 제조사에게는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조사위는 다수의 사고가 같은 공장에서 비슷한 시기 생산된 배터리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셀 해체분석을 시행한 결과 일부 셀에서 극판 접힘, 절단 불량, 활물질 코팅 불량 등의 제조결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비슷한 셀을 제작해 충·방전 반복시험을 180회 이상 수행했으나 화재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당 배터리를 가혹한 조건에서 장기간 사용하면 위험요소가 될 수는 있지만, 이번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부 배터리 셀에서 화재 사고와 무관치 않은 제조결함이 확인된 만큼 책임 소재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이를 반영하듯 브리핑에서 민간 조사위원들이 특정 대기업 제품의 배터리 셀 자체 결함을 확인하고도 자세한 설명 없이 운영·관리 책임으로만 몰고 가자 조사 자체에 대한 객관성 결여 문제도 거론됐다.
이와 함께 조사위가 발표한 사고 원인 발표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기업 입장에서는 ESS 투자의 불확실성이 오히려 더 커졌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조사위가 사고 원인으로 제조 결함, 설치 부주의, 관리·운영 부실 등을 거론한 것은 사실상 ESS 업계 전반을 문제로 지적한 것이기 때문에 대책의 실효성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ESS 사업에 계속 투자해도 될지 난감한 상황이 됐다"면서 "원인은 '배터리'에 있다는 게 업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면죄부를 준 게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 정부 "전주기 안전성 강화할 것"…국민 불안 해소될 지는 미지수
정부는 앞으로 일정 규모의 에너지저장장치(ESS)는 옥외설치를 의무화하는 등 안전조치를 강화하고, 보급한 ESS에 대해서도 ESS 안전관리위원회를 통해 안전보강 조처를 하겠다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이번 화재사태로 양적 성장에 치우쳤던 우리 ESS 산업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가 됐다"며 "이번 ESS의 안전제도 강화 조치를 기반으로 우리 ESS 산업 생태계의 질적 성장을 위해 분야별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조·운영·관리 등에서 총체적 결함이 지적됨에 따라 앞으로 추가 조치를 하더라도 화재·폭발 등 각종 위험에 대한 국민 불안감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에너지업계 전문가는 "미래 신산업으로서 우리 ESS 산업이 지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 한다"며 "미국, 일본처럼 늦더라도 속도보다는 안전, 기술, 절차 등에 초점을 맞춰 충분히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세계를 선도하는 ESS 강국으로 입지를 확실히 굳힐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