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촬영 중인 한 영화 촬영 현장의 모습 (사진=폴룩스㈜바른손 제공)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 이 영화는 근로기준법을 바탕으로 한 표준근로계약서를 썼다는 이유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표준근로계약서는 장시간 노동-저임금-임금 체불의 악순환을 겪던 영화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은 끝에 도입돼 '정착되는 중'이다. CBS노컷뉴스는 '표준근로계약서'가 탄생해 자리 잡기까지를 돌아보고, 어떤 변화를 불러왔으며, 앞으로 더 어떤 것이 필요한지 살펴봤다. [편집자 주]
"왜 내가 표준근로계약서의 아이콘으로 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웃음) 나쁜 것은 아닌데 너무 쑥스럽다. 나와 '기생충'이 공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흘러온 대로, 남들 다 하는 그대로 한 것뿐이다. 너무 우리 작품과 저를 연결고리 삼아 이야기하니까 부담스럽다. 영화계 표준근로계약서 정착을 위해 지나 3~4년간 애써 온 분들이 있다. 영화산업노조, 제작·투자·배급사들이 꾸준히 협의한 결과다. 그 합의를 도출해서 1~2년 전부터 정착된 것이다. 드라마 쪽도 관련 논의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잘 될 것이라고 본다."
_ 5월 30일,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
봉 감독의 말대로 '표준근로계약서'는 영화계의 다양한 주체가 힘을 합쳐 정착시킨 제도다. 근로기준법을 반영해 만들어진 표준근로계약서가 영화계에 가져온 변화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계약 당사자인 사용자와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가 상세히 나타나 있어 상호 투명성이 높아졌다는 점을 가장 먼저 들 수 있다.
△종사업무 △근로시간과 휴식 시간 △임금 △실비변상 △휴일·휴가 △교육 △계약의 변경·갱신 △4대 보험 가입 △산업 안전과 재해보상 조치 △징계와 손해배상 책임 △계약의 해지 △금품 청산 △계약의 전속 △크레딧 명기 △권리의 귀속 △성평등·모성 보호 △신의성실과 사정변경 △개인정보의 보호 △분쟁의 해결 등 구체적인 조항이 담겼다.
'관능의 법칙', '국제시장' 등 표준근로계약서를 쓴 영화가 개봉하기 시작한 것이 2014년이다. 2015년에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이 개정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영화업자 또는 영화업자단체에 표준계약서 작성·사용을 권장할 수 있다"(제3조의5) 등 노동 환경 개선 조항이 신설됐다.
2019년 현재, 영화업계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을까. 또 아직 미비한 점이 있다면 어떻게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할까. 스태프, 제작사, 감독, 배우, 프로듀서, 영화진흥위원회 등 다양한 주체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봤다.
◇ 모든 단계에서 '철저한 계획과 준비' 세밀해져명필름은 2014년 2월 개봉한 영화 '관능의 법칙' 때부터 쭉 표준근로계약서를 써 왔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관능의 법칙'의 경우, 제작비가 28억에서 1.5억 정도 올라갔다며 "원래 짠 예산보다 높아지긴 했다. 하지만 당연히 지켜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표준근로계약서 시행 전에는 연출자에게 재량권을 줬다면, 지금은 (스태프들에게) 약속된 임금을 주고 촬영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체 프로덕션(사전 작업-촬영 작업-후반 작업)의 내용과 예산을 꼼꼼히 준비하고 점검하는 것이 필수"라고 밝혔다.
이어, "투자사와 제작사가 계약서를 쓸 때, 예비비를 넘어 제작비를 초과하면 제작자가 책임저야 하기 때문"이라며 "요즘 영화 전문 투자사는 표준근로계약서를 안 쓰면 (그 작품에) 투자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10억 이상의 영화는 대부분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차량 액션 장면을 촬영 중인 한 영화 현장의 모습 (사진=㈜JK필름 제공)
제작비 100억 이상의 블록버스터 가운데 최초로 표준근로계약서를 쓴 작품 '국제시장'을 만든 길영민 JK필름 대표 역시 '철저한 관리'를 이야기했다. JK필름은 '히말라야', '좋아해줘'(공동제작), '공조', '그것만이 내 세상', '협상' 등 이후 작품에서도 표준근로계약서를 썼다.
그는 "과거 계약금-잔금 지급이 아니라 임금이 시급 체계로 바뀌었으니,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프리 프로덕션 준비도, 인력 운용도 잘해야 한다"고 전했다. 다수 작품을 연출한 한국영화감독조합 소속 감독 A 씨는 "연출자 입장에서 예전보다 훨씬 타이트해진 부분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최근 3년간 꾸준히 상업영화를 제작한 프로듀서 B 씨는 "과거엔 팀을 완전히 꾸리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인건비 부분이 부담되다 보니 '프리 프로덕션 때는 몇 명' 등 단계에 맞춰 인력을 구성하게 됐다"고 밝혔다.
배우 송강호는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완벽한 플랜을 짜고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하루에 주어진) 분량을 소화하려면 항상 스탠바이가 되어 있어야 하고"라고 말했다.
송강호는 비 오는 장면을 예로 들어 "옛날 같으면 그날 가서 (장비) 설치하고 한두 컷 찍으면 새벽이 됐다. 지금은 촬영 없는 날 미리 설치해 보고 조명도 맞춰보면서 준비한다. 딱 들어가는 순간 그 씬을 찍을 수 있도록 철저한 기획 속에 촬영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장혜진은 "'기생충' 변기 씬은 물이 솟아오르는 방향과 양까지 사전에 정확하게 테스트하고 영상도 보는 식으로 제작진이 촬영 현장에서 연구를 많이 했다"며 "조명, 카메라 동선까지 모두 결정된 상태에서 배우들이 바로 현장에 투입되니까, 열과 성을 다하는 스태프들 모습에 더 정성스러운 연기가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선균은 "예전에는 '현장에서 해 보자' 이런 기조였다면, 지금은 감독님과 사전에 논의를 많이 한다. 또, 감독님은 명확한 콘티를 갖고 있고, 테스트 촬영도 많이 하시는 것 같다"고 밝혔다.
◇ 좋은 장면 나올 때까지 찍는다? 이젠 옛말표준근로계약서를 씀으로써, 스태프들의 근로시간은 '제한'되었다. 또한, 합의로 '정해진' 근로시간과 휴식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서로 확인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좋은 장면을 찍겠다는 이유로, 혹은 정해진 분량을 다 못 찍었다는 이유로 기약 없이 촬영을 이어가는 관행은 바뀌고 있다.
최정화 PGK(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는 영비법 개정안이 통과된 2015년 이후 근로시간이 점차 줄어든 점을 제시했다. 최 대표는 "2015년 이전에는 24시간 쭉 찍고 나서 다음 날 휴차하고(쉬고) 밤 촬영으로 넘어갔다면, 이제는 하루 12시간을 넘길 수 없다. 그게 표준계약서를 권장하고 사용하게 되면서 가장 도드라진 변화"라고 말했다.
감독 A 씨는 "'될 때까지 찍어라'가 아니라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데에 적응하고 있다. 시간에 대한 압박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본다"라며 "감독조합은 스태프들의 노동 조건에 어떤 건 들어가고 어떤 건 안 들어가는지 (표준근로계약 관련) 세미나를 지속해서 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2018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1일 평균 근로시간은 9~12시간이라고 답한 비율이 73.4%로 가장 높았다. 13~16시간이 13.5%, 8시간 이하가 8.0%, 17시간 이상이 5.0%로 조사됐다. (표=2018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2018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주 1회 정기 휴일을 사용에 대해 매우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5%, 그렇다 26.2%, 보통이다 38.2%, 아니다 20.2%, 매우 아니다 10.4%로 나타났다. (표=2018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
프로듀서 B 씨는 "과거에는 촬영이 언제 끝날지 몰랐다면, 이제는 하루 촬영 분량이 명확해졌다. 그날 촬영이 지연되면 제작사 입장에서는 큰 피해를 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기 위해 스태프들의 전체적인 숙련도도 올라간 것 같다"고 부연했다.
이선균은 "배우 입장에서는 테이크를 더 가는 것(좋은 장면을 위해 촬영 횟수를 늘리는 것)이 부담될 때가 있다. 예전에는 (좋은 장면이) 나올 때까지 테이크를 갔는데, 지금은 정해진 시간이 있으니까. 배우들도 자기가 할 몫이 뭔지 더 고민해서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최우식은 "밤샘 촬영이라는 게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배우로서 컨디션 조절도 잘 되고, 연기도 편하게 나온다. 좋은 것 같다"고 밝혔다. 송강호는 "밥 때(식사 시간) 지키는 건 '기생충'부터가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정착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 아직 표준계약서 정착 안 된 저예산 영화, 무엇이 필요할까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2018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스태프 825명 참여)에 따르면, 표준근로계약서를 알고 있다(잘 알고 있음+들어보았음 합산)는 응답은 98.6%였다. '잘 알고 있다'는 응답만 따로 추릴 경우 60.1%였다. 표준근로계약서 작성 경험 비율도 74.8%에 이르렀다.
하지만 제작비 10억 미만의 저예산 영화는, 투자사의 투자를 받아 만들어진 상업영화와는 상황이 다르다. 대부분의 저예산 영화가 제작비 마련하기도 빠듯하기에 표준근로계약서를 일괄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었다.
다행인 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예산 영화 제작 경험이 있는 감독 C 씨는 "독립·저예산 영화도 '최저임금 적용' 등 그 흐름에 최대한 비슷하게 가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영화 현장도 내년부터 주당 근로시간(주 52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환경을 다들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1일 근로기준법이 개정됨에 따라 1주 최대 근로시간은 '법정 근로시간 40시간+연장 근로 12시간=최대 52시간'으로 바뀌었다. 영화업계는 상시 사용 인력 300명 이상 사업장은 올해 7월 1일부터, 50명 이상 300명 미만 사업장은 2020년 1월 1일부터, 5명 이상 50명 미만 사업장은 2021년 7월 1일부터 적용된다.
단, 30명 미만 사업장은 근로자 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한 경우 1주 8시간 내의 특별연장근로가 한시적(2021년 7월 1일~2022년 12월 31일)으로 가능하다.
세트장 안에서 촬영 중인 한 영화 현장의 모습 (사진=㈜바른손E&A 제공)
감독 C 씨는 "대부분의 상업영화가 표준계약을 따르고 있어서, 그 현장을 경험한 인력이 저예산 영화에도 참여하다 보니 저예산 영화들도 표준계약과 너무 차이 나는 제작환경은 꺼리는 추세"라면서도 "여전히 독립·저예산 영화 대부분이 임금과 근로시간 준수 등에서 열악한 환경에 있긴 하다"고 부연했다.
C 씨는 "투자사 투자를 받아 제작하는 상업영화들은 표준계약에 따른 제작비 상승을 부담하기 비교적 수월한 반면, 독립·저예산 영화들은 구조상 제작비와 제작 환경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제한적인 촬영 회차로 연결되고, 기획과 시나리오 과정에서도 더 큰 제약이 될 수 있다"며 '제도적 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영진위나 공적 기관의 지원 중 더 많은 부분을 전향적으로 저예산 영화 몫으로 배분해야 하지 않을까. 보다 근본적으로는, 수직 계열화된 현재 산업의 생태계 개선이 뒷받침돼, '관객을 만나는' 배급 극장(유통) 쪽이 함께 개선되어야 더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바라봤다.
올해 저예산 영화를 개봉한 또 다른 감독 D 씨는 "표준근로계약을 했지만 (근로)시간이 오버됐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완성)해 낼 수 없는 환경이었다"며 "저예산 영화들에 대한 스태프 지원 제도나 상영 기회가 부여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제안했다.
감독 A 씨는 "저예산 영화들을 어떻게 시스템 안으로 넣을 것인지 세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당장 표준근로계약서에 따른 노동조건에서 일할 수는 없더라도,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려면 정부가 예술영화 지원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심재명 대표는 "저예산 영화들은 표준근로계약서 작성 의무가 없기에, 열악한 환경이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 저예산 영화 상황에 맞는 또 다른 기준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이에, 영화진흥위원회 측은 "현재 독립·예술영화에 대해서는 표준근로계약서 의무 사용보다는 심사 시 우대할 수 있다고 해서 사용을 권장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향후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영진위 예산 지원 폭이 더 넓어지거나, 영화 산업의 전체 역량 증가로 표준계약서 사용이 일반화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사용 의무화를 검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