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비스트' 춘배 역 배우 전혜진을 만났다. (사진=NEW 제공)
※ 이 기사에는 영화 '비스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혜진은 영화 '죽이는 이야기'(1994)에서 춘자 역을 맡아 스크린에 데뷔했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를 통해 시청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지적 능력이 어린아이 수준인 윤서경 역을 실감 나게 소화한 덕이다.
문성근, 송강호, 강신일, 이성민, 이대연, 박원상, 최덕문, 정석용, 문소리 등 걸출한 배우들을 배출한 극단 차이무(차원이동무대선) 출신이기도 하다. '마르고 닳도록', '변', '쉐이프', '엄마열전', '올모스트 메인', '러브 러브 러브', '스물스물 차이무-꼬리솜 이야기' 등의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다.
전혜진의 '최근 작품 활동'을 정리할 수 있는 말은, 아마 '걸크러시'(Girl Crush)일 것이다. 원래 여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강렬한 호감을 이르는 말이지만, 캐릭터로 치면 주로 카리스마 있고 자신감 넘치거나 중성적인 스타일일 때 '걸크러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더 테러 라이브'의 테러대응팀장 박정민,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경찰청 팀장 천인숙, '뺑반' 속 만삭의 뺑소니 전담반 리더 우선영. 드라마로 넓히면 현재 방송 중인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의 유니콘 대표이사 송가경 역을 들 수 있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전혜진을 만났다. 영화 '비스트'(감독 이정호)에서도 범상치 않은 외양의 마약 브로커 춘배 역을 맡은 그에게 '남성을 압도하는, 이른바 걸크러시 캐릭터를 많이 하는 것 같다'는 질문이 주어졌다. 전혜진은 "그런 것밖에 없으니까"라고 담백하게 답하며 웃었다.
◇ 끝까지 고민했던 춘배의 마지막춘배는 한수와 거래가 제대로 성사되지 않아 분노가 높아진 상황에서 결국 싸우게 되고, 한수의 총을 맞는다. 뚜렷하게 묘사되지 않아, 이날 인터뷰에 온 취재진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춘배가 죽었다, 혹은 안 죽었다로.
총에 맞은 건지 묻자 전혜진은 "맞았다. 제가 봤을 땐 맞았을 것 같다. 죽을 때도 이상하게 죽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춘배가 어떻게 될지는 촬영 막바지까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 전혜진은 "시나리오에서는 죽는 거긴 했는데 계속 살리고 싶다고 하셨다"고 설명했다.
그럼 죽은 걸까. 안 죽은 걸까. 전혜진은 "죽어있는 거로 가긴 했는데, 뒤가 찜찜할 것 같긴 하다. 얘(춘배) 뒤가 궁금하다, 되게. 저희끼리는 장난으로 (알고 보니 살아서) 태국 가 있는 거 하나 찍을까, 했다"라며 웃었다.
위쪽부터 '불한당' 천인숙, '뺑반' 우선영, '비스트' 춘배 역을 맡은 배우 전혜진 (사진=각 제작사 제공)
인물의 퇴장도 고정된 게 아니었던 만큼, 현장은 유동적으로 돌아갔다. 전혜진은 "계속 뭔가가 바뀌고 한수와의 액션씬 자체도 버전이 너무 많았다. 그중에 난 어떤 게 좋다고 한들…"이라며 "현장에서 대본 받은 적도 있지만 며칠 전에 받기도 했다. 거의 그래서 저도 죽을지 안 죽을지 몰랐다. 한수와 민태 마지막 엔딩도 어느 쪽으로 갈지 열어두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시나리오가) 여러 개(버전)가 있어서 뭘 할지는 잘… 저희(배우들)도 그래서 영화를 언론 시사회로 보고 '아, 이렇게 됐구나!' 했다. 편집할 때도 여러 가지 바뀐 부분이 있다고 얘기 들었다. 정말 집요하게 가시는 스타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혜진은 "기존에 있던, 우리가 상상하던 것들을 계속 깨려고 했던 것 같다"라며 "얘기가 너무 많고 인물들이 너무 얽히고설키고 해서. 영화 재미는 '하하하' 하는 것도 있지만, 계속 (몰입해서) 따라가게끔 사건을 꼬는 것도 있다. '비스트'는 그것(후자)을 크게 생각하신 것 같다. 두 인물을 따라가는 게 지루할 틈 없이 나오는 것. 그래서 이상할 수 있다. 힘들 수도 있고"라고 전했다.
◇ 한수vs민태, 전혜진이 더 공감했던 캐릭터영화 안에서 거슬리면 관객의 몰입을 깰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전혜진. 이 정도로 '날것'인 캐릭터를 만나기 드문 만큼, "되게 좋았다"고 말했다. 동시에 부담이 됐다.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
전혜진은 "아직 형태가 그려져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성별도 나이도 아예 무에서 시작하려고 했던 부분이 있다"면서 "워낙 무거운 이야기이지만, 다들 최선은 다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어, "막 뭔가를 더 스스로가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감독님이 숙제를 계속 던져주는 스타일이다. 특히 춘배는 그랬던 것 같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 하고"라며 "중간에도 뭔가 시도는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니 뭔가를 보여줄 부분은 있다고 봤다"고 부연했다.
극중 라이벌로 나오는 한수(이성민 분), 민태(유재명 분) 중 어떤 인물에 좀 더 이입했냐고 묻자 전혜진은 대번에 한수라고 답했다. 그는 "저렇게 잡을 수 있는 목표나 욕망이 보인다면… 거기다 살인마가 가족을 건드리지 않나"라며 "눈앞에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지? 갑자기 되게 나약한 존재가 확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민태 같은 모습이 사실 있어서 그런 지점이 재밌는 것 같다. 나랑 진짜 친한 친구인데 계속 너무 잘나가면 '아씨, 나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 이럴 수 있지 않나. 민태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고 밝혔다.
배우 전혜진 (사진=NEW 제공)
◇ 작품 안에서 여성 캐릭터는 정교해지고 있을까전혜진은 지난달 5일 시작한 tvN 수목드라마 '검블유'에도 출연 중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로맨스 헌터', '미스티'에 이어 4번째 드라마인 '검블유'에서 그는 포털업체의 대표이사이지만 목숨줄을 쥔 시댁에는 꼼짝없이 힘을 못 쓰는 송가경 역을 연기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는 포털업계를 배경으로, 여성 3인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검블유'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신선함을 선사하는 드라마로 호평받고 있다. 주인공 3인 모두 누군가의 연인, 아내, 딸, 엄마로 호명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름을 분명히 갖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검블유'를 향한 호평을 전혜진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시청률이 잘 안 나와 가지고…"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하지만 연기하는 건 재미있다고.
전혜진은 "말로 뭔가를 표현하는 것보다, 우울한 부분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어서 좋다. 춘배도 나름의 극한이 있어서 죽기 살기로 발악하는 거라면, 송가경도 시댁의 압박으로 인생 전체에 대해 회의감이 있는 상태인 것 같다. 막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배타미(임수정 분)밖에 없는데 (회사를) 나가버려가지고…"라며 웃었다.
전혜진은 "저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려고 많이 노력은 했다. 보호받기보다는 제가 좀 헤쳐나가고 싶어 했다. 부모님이 뭘 하시면 '나 혼자 할래' 하는"이라고 설명했다.
남성 캐릭터조차 가뿐히 압도하는 캐릭터를 주로 맡아온 것 같다는 질문에 전혜진은 "그런 것밖에 없으니까"라는 답을 돌려줬다.
"남자만 나오고 거기에 여자 한 명 나오잖아요. 남자 중에 (여자) 하나가 들어가는데, 예전에는 '너무 세다'고 싫어했는데 요새는 걸크러시라는 말이 난무해요. 그 말 자체도… 난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게 아니면 여성 인물이 살아갈 수 없어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 지금 드라마도 마찬가지지만 그 안에서 엄청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잖아요, 생존하기 위해서."
그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가 더 정교해지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전혜진은 고개를 저으며 "'검블유'는 여자 얘기가 기본 바탕이 되니까 그런 게 드러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끝>
전혜진은 지난달부터 시작한 tvN 수목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송가경 역을 연기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노컷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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