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앨범 '인사이드(Inside)' 발매를 앞둔 가수 김도향이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사옥에서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실버 세대를 지옥에서 구하자. 멍하니 죽음만 기다릴 게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고 행복이 뭔지 느끼며 살도록…."
수십 년 '마음공부'를 집대성했다더니 해탈한 듯한 달변이었다. 과거 광고계를 장악한 'CM송 대부'답게 깊이있는 통찰엔 블랙 유머도 섞였다. 오는 12일 14년 만의 정규 앨범 '인사이드'(Inside)를 공개하는 가수 김도향 얘기다.
1970년 남성 포크듀오 '투 코리언스'로 데뷔한 그의 나이 74세. 역시 실버 세대다. 최근 종로구 수송동에서 만난 그는 "몇 년 전 척추 수술을 받아" 느린 걸음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아흔까지는 거뜬하다"고 자신했다. 창작 열의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약 2년에 걸쳐 이 앨범을 작업했다. 계기가 있었다. 부인의 대학 동창들이 요양원에 있는 은사를 만나고 온 얘기를 들으면서다.
제자들은 그날 은사에게 빨간 스웨터를 선물했다. 환하게 웃던 은사는 옷을 입어보고 싶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방에서 '탁, 탁' 소리가 났다. 잠시 뒤 은사는 옷도 못 입은 채 멍한 표정으로 나왔다. 갑자기 치매라도 온 듯 불러도 눈 하나 꿈쩍 안 했다는 것이다.
"교수로 평생을 산 분인데, 누군가에게 맞아도 뭐라 말 못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죠. 이 얘기에 마누라도 울고, 저도 충격을 받았어요. 슬펐죠. 65세 이상 실버 세대가 곧 1천만인데, 죽음을 대기하듯 사는 건 잘못된 문화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황혼기 세대가 자신의 음악에 공감하며 스스로 깨어나길 바랐다. 육체가 노쇠해도, 내면의 성찰을 통해 '살아있는 이 순간이 진짜 행복하구나'라고 세상을 달리 바라보길….
"석양을 보며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됐구나'가 아니라, '살아있어서 느끼는 아름다움이구나'라고요."
그래선지 이 앨범에 대한 그의 마음은 각별했다. 50년 음악 인생에서 "혼이 들어간 작품은 처음"이라고.
"제 음반이 100장가량 되는데 이 음반만 제 것 같아요. 한때 산에 다니며 명상음악을 만들던 제 마음공부의 결과물이기도 하고요. 단편적인 싱글은 내도, 제 인생 마지막 앨범입니다."
◇ "쓸쓸할 때 오는 고요는 행복"·"죽음은 100년에 한 번뿐인 찬스"
역설적이다. 타이틀곡 '쓸쓸해서 행복하다'는 노년의 무게를 새로운 시각으로 환기한다. '기다리다 난 다 늙어버렸어'란 체념으로 시작해 '내 마음이 텅 비워지니…쓸쓸해서 난 행복하다'라는 성찰에 이른다. 김도향의 낮고 그윽한 소리가 느리고 아련한 재즈 선율 위를 즈려밟는다.
"된 게 없으니 꿈만 꾸다가 늙은 거죠. 세월이 가는 게 그립고 슬프고. 그런데 사람은 진정 쓸쓸하다 느낄 때 마음이 제일 고요해져요. 그 고요가 실은 행복이거든요."
온전히 자작곡으로 채운 앨범은 노년의 삶과 시선을 따라간다. 관조적이지만, 내내 슬픈 사색은 아니다. 때론 낭만적인 상상이, 때론 생활밀착형 가사가 미소 짓게 한다. 그는 가장 편안한 리듬으로 전달하고자 "한 번도 공부한 적 없는" 재즈를 택했다. 일명 '재즈 포크'다. 젊은 음악인 둘(피아노 안동렬, 기타 하타슈지)이 힘을 보탰다.
완성까지 6개월이 걸린 '실버 카페'는 요양원 같은 쓸쓸한 공간에 낭만을 심어주고 싶어 만들었다. 할머니가 된 첫사랑과 마주치는 상상이 등장하지만, 끝내 뭉클해지고 만다.
죽음을 애벌레가 나비로 태어나는 과정에 빗댄 '굼벵이'에선 삶의 마지막 순간을 '백 년에 한 번뿐인 이 찬스'로 역발상을 했다. "죽음은 슬픈 순간이 아니라 100년에 한 번뿐인 찬스죠. 도망가지 말고 또렷한 정신으로 바라보자고요. 실버들이 제 얘기에 공감해 '피식' 웃으면 좋겠어요."
'흔한 일흔'에선 수염이 싫은 듯 뽀뽀하려는 할아버지에게서 도망가는 귀여운 손주와의 '밀당'이 그려진다. '너만 할 때 어젠데 어느새 일흔살'. 경쾌한 리듬에 한 구절이 콕 들어온다.
그는 "요즘 일흔살은 노인네 모임 가면 물심부름 하는 나이"라며 "일흔살을 희귀한 수명이란 뜻의 '희수'(稀壽)라고도 하는데, 너무 흔해져 그 나이에 대한 존경을 잃어버린 채 산다"고 꼬집었다.
들국화 최성원이 듣고서 "형, 이거 타이틀이야"라고 꼽은 노래도 있다. 신나는 리듬의 '돈 좀 주라'이다. '매누리야 내게 돈 좀 주라…문만 열면 돈이 필요하다'.
그는 11곡 녹음을 위해 마포구 공덕동 사무실에 500만 원짜리 중고 이동식 녹음 부스를 들였다. 한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다. 영감이 떠오를 때, 가장 편안한 소리를 찾는 순간에 바로 녹음하고 싶어서였다. "천번쯤 들락날락했을 거예요. 허허."
◇ "CM 송 3천곡 중 '사랑해요 LG' 기억남아"·"라디오 진행하며 창작 열망이"
어린 김도향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집 인근 극장 우미관 직원이 예뻐해 하루 3편씩 영화를 보여줬다. '백치 아다다'부터 '19금' 영화까지 중학교 시절에만 1천편가량을 훑었다. 주제가는 외우려 하지 않아도 쏙쏙 머리에 박혔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영화판에 조감독으로 들어갔지만 늘 배가 고팠다. 어머니도 모셔야 했다. 이때부터 카바레 등지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월급 5만원씩 여섯 군데를 뛰니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택시비가 20~30원 할 때다.
1969년, 그는 일하던 무대에서 이미자를 만났다. 등장과 함께 최고 가수였던 이미자는 그의 뒤 타임을 장식했다. "이미자 선배가 흑인 음악을 부르며 애드리브를 많이 넣는 저를 보고 '노래가 까분다'고 말했죠. 하하."
이미자는 지금의 남편이 과거 연출한 KBS 프로그램에 김도향을 출연시켜줬다. 아는 팝송이 1천곡이 되다 보니 그는 매주 2곡씩 불렀다.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소문나자 다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TV에서 얼굴이 알려질 즈음, 그는 군대 동기인 손창철과 투 코리언스를 결성해 1970년 9월 1일 데뷔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등을 내며 인기를 끌던 팀은 1974년 해체했다. 급기야 그는 대마초 파동에도 휘말렸다. 당연히 설 무대는 없었고, 먹고 살려고 시작한 것이 CM 송 작업이었다. 투 코리언스 시절 오리온제과 '줄줄이 사탕' CM 송이 히트한 덕에 제안이 쏟아졌다.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류바',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중략) 아카시아 껌', '우리집 강아지 뽀삐, 우리집 화장지 뽀삐',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LG'….
창작한 3천여 곡 중 그는 1994년 사랑을 테마로 만든 LG그룹 광고를 손에 꼽았다.
"한창 산에 다닐 때인데, 요청이 왔어요. 산에서 내려와 회의하면서 그 자리에서 만들었죠.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며 살기를, 또 (그룹명을 바꾸기 직전인) 럭키금성이 성장한 건 국민 사랑 덕이란 의미를 담았죠."
몇분 만에 순간 집중력으로 완성하다 보니, 하루에 CM 송 수십곡을 만들 때도 있었다. 화곡동 집이 80만원 하던 시절 CM 송 곡비는 50만원. 그는 이때 번 돈으로 충무로에 3층짜리 건물을 샀다. 회사를 만들어 50명의 직원도 거느렸다.
그러나 쉼 없는 생활 속에 회의가 찾아왔다. 그때 만든 노래가 대표곡 '바보처럼 살았군요'다.
이후 그는 전국의 산을 다니며 명상을 시작했다. 수련에 전념하다 보니 사람 몸 안에서 기의 움직임이 보였다고 한다. 마음을 치유하는 명상음악을 꼭 해야 했다. 그는 1990년까지 태교 음반, 수험생을 위한 음반 등 명상음악을 제작했다. CM 송으로 번 돈을 모두 쏟아부었다.
"파형을 섬세하게 조정하는 일본 유명 엔지니어 9명을 불러 작업했죠. 스튜디오도 따로 만들었고요. 자연 음향도 채집하러 다녔어요. 1990년까지 총 60장을 만들고 나니 기의 움직임이 안 보였어요. 하나님 뜻인지 마음도 그리 안 갔죠."
원래 가톨릭 신자인 그는 4년째 가톨릭평화방송(cpbc) 라디오 '김도향의 명동연가'를 진행하고 있다. 매일 저녁 2시간씩 음악을 들으며 "창작의 열망이 꿈틀댔다"고 떠올렸다.
그는 50년 이력을 새 앨범에 끄집어내고 나니 "다시 속이 깨끗해졌다"며 '껄껄' 웃었다. 이제 앨범은 내지 않더라도 순간의 생각을 꾸준히 음악으로 들려줄 계획이다. 그 힘을 믿어서다.
그는 음악을 '음식'에 빗댔다.
"마음을 넣어 부른 노래는 굉장한 음식이죠. 청각에 작용해 노래하는 이의 마음 파장까지 전달되니까요. 언젠가 제주도 치매노인 요양원 공연 때였죠. 10년간 말을 못 하던 할머니가 제 노래를 듣다가 '김도향이다'라고 말해 눈물바다가 됐어요. 놀라운 경험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