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밤의 문이 열린다' 혜정 역 배우 한해인을 만났다. (사진=황진환 기자)
※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해인은 2016년부터 단편영화 주연을 맡으며 활동을 시작했다. 세 명의 감독이 극장을 주제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친 '너와 극장에서'에도 출연했다. 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는 유은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면서, 한해인의 장편 주연 데뷔작이기도 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연기자가 꿈이었던 한해인은 일찍부터 연기의 '맛'을 봤다. 어린이 극단을 시작으로 중학교 연극반에서 활동했으니, 꽤 시작이 빠른 편이었다. 공연을 올리는 것은 '너무 힘들었지만 너무 좋았다'. 예고에 진학한 후 대학에서도 연기를 전공했고 지금까지 왔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는 순간 다가오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지난 9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해인은 "연기하는 순간만큼 저를 완전하게 하는 순간은 없다고 생각했다"면서도 이제는 일과 삶을 잘 분리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고 밝혔다. 일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너무 고통스러워질 것을 알기에.
일문일답 이어서.
▶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엔딩 장면인 것 같다. 민성(이승찬 분) 대사.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삶을 그렇게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되게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고맙다는 말이 너무 고마웠다.
▶ 영화에서처럼 소외되고 고립되는 상황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나.누군가가 (제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기보다는 저 스스로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친구가 전화를 해서 자기 힘들다고 막 울었는데 (제가) 위로는 해주고 있지만 사실 내 마음도 너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대고 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내 아픔은 그냥 내가 지고 가야 하는 구나, 아무도 모르는 거구나, 그냥 나 혼자 겪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 반대로 사람은 역시 혼자 살 수 없구나, 하고 실감한 적이 있는지.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았을 때. 조금의 관심, 조금의 말 한마디면 괜찮아지더라. 그럴 때 그런 생각이 든다.
한해인은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 감소현, 전소니와 함께 연기했다. 맨 위부터 감소현, 한해인, 전소니 (사진=영화사 리듬앤블루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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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작품에서 부모랑 떨어져서 혼자 지내는 아이 수양 역의 감소현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숨어지내야만 하는 효연 역의 전소니와 연기했다. 같이 작업해 보니 어땠는지.소현이는 실제로는 씩씩하다. 장난도 많이 치고. (웃음) 그래서 촬영 안 들어갈 때, 쉴 때는 장난치고 있다가 연기하고 그랬다. 단지 어려운 순간은 (극중에선) 유령이 안 보여야 되는데 소현이가 자꾸 (저를) 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서… (웃음) 그때 '어, 보면 안 되는데' 했던 게 있다. (웃음)
소니 씨랑은 제가 소니 씨의 행동을 보고 연기 호흡을 막 주고받진 못해서 그게 좀 아쉬웠다. 둘 다 고립된 인물이다 보니까 둘 다 쓸쓸하게 연기했던 것 같다. (웃음) 혜정이 효연의 에너지에 자극을 받는데, 소니 씨가 그런(에너지를 주는) 효연을 잘 표현해주었다. 거기서 저도 좋은 자극을 받아서 혜정을 연기할 동력을 얻게 된 게 아닐까 싶다.
▶ 작업할 때 감독을 신뢰하고 가는 편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는 편인가.저는 정말 제 안에서 걸리는 게 있지 않은 이상, '감독님은 이런 스타일이구나' 깨닫고 나면 그 스타일에 맞춘다. '우리 영화는 이런 톤으로 만들어지겠구나' 하는 걸 알고, 왜 이 톤을 원하시는지 이해가 되니까 이 인물 연대기에서 정말 말이 안 되고 감정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있지 않은 이상 감독님을 믿고 따르는 편이다.
▶ 유은정 감독은 현장에서 어떤 스타일인지.감독님이 굉장히 차분하시지 않나. 혹시 고민하거나 걸리는 게 있는데 말씀 못 하시는 거 아닐까 싶었는데 아니시더라. 제가 감정 상태에 취해서 그걸 드러내려고 하면 잘 말씀해주셨다. 그때 완전히 믿고 가도 되겠다 생각했다. 편안하게 작업하시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해주시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 포털 사이트에도 본인에 대한 정보가 아직 많이 없더라. 연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하다.저는 어렸을 때부터 (웃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연기자가 꿈이었다. 그래가지고 YMCA 어린이 극단 같은 데 들어가서 활동하기도 하고 중학교 때 연극반에 들어갔다. 저희 연극반이 되게 고됐다. 중학생이었는데 방과 후에 거의 매일 모여서 연습하고 일 년에 두 편씩 공연도 올리고 정말 극단 생활하듯이 했다. (웃음) 처음엔 너무 힘들었는데 너무 좋은 거다. 공연할 때도 너무너무 재밌고 무대 뒤에서 사람들과 나누는 순간들, 같이 막 떨려 하면서 서로 막 다독이면서 무대 만들고 하는 게. '아, 나 연기를 해 봐야겠다' 해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그 후로 연기를 이어서 하고 있다.
지난 2일 열린 '밤의 문이 열린다' 언론 시사회 때 한해인, 유은정 감독, 전소니(왼쪽부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 좋아하는 일을 경험해보고 막상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업으로 삼은 건, '이게 내 길'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인가.네, 그랬었다. 연기 하나에 너무 의지를 해 왔고 연기하는 순간만큼 저를 완전하게 하는 순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허구의 인물이긴 하지만 그 인물을 만나면서 제가 배우는 게 너무 많았고 그 인물의 상태가 되면서 채워가는 과정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고 고된 작업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었다. 오히려 최근 들어서야 이 시간(연기를 해 온 시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까 '내가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 그런 걱정을 어떻게 떨치거나 지우려고 하는지.여기(일)에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고 한다. 안 그러면 너무 고통스러워지니까. 항상 생각하고 친구들이랑도 얘기하는 게 '내 삶을 먼저 두어야 한다'는 거다. 예전에는 연기를 오랫동안 해 오다 보니 제 삶 속에 너무 깊이 자리를 잡아서 제 자존감과 배우로서의 자존감이 너무 일치했다. 연기하지 않을 때, 작품 안 할 때는 너무 힘들어지더라. 그럼 사람이 너무 지친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이더라도 내 삶과 잘 분리해야겠다, 공백을 주는 게 중요하구나 그걸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계속해서 생각하는 게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마음으로 하자'는 거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면 괜찮은 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이게 반복되는 것 같다.
▶ 그럼 일상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하는 게 있나.다니엘 데이 루이스라는 배우가 신발 공장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다고 해서 연기를 그만두고 그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저한테 그게 되게 충격적이었다. 저렇게 연기 잘하는, 정말 연기밖에 모를 것 같은 배우한테 저런 꿈이 있구나. 연기를 중단할 수도 있구나 했다. 내 삶을 지키는 게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 연기하지 않을 때 일상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취미를 가져보자. 시간을 잘 보내는 일이 너무너무 중요하니까. 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느낌이 든다.
게을러서 많이 안 하긴 하지만 (웃음) 운동을 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요새는 작품 때문에 시작하게 된 건데 서핑을 종종 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려고 한다. 자연을 가까이하면 경이로워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채워지는 게 결국 다 연기할 때 나오더라. 지금 뭘 안 하고 있다고 해서 무너지지 말자고 생각한다. 지금의 이 삶을 더 즐기고 더 즐겁게 살아가려고 하고 다양한 감정을 누리면서 사는 게 더 좋은 일이라고 믿는다. 연기를 취미로 한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너무 사랑하는 일을 괴로운 일로 만들면 안 되니까.
배우 한해인 (사진=황진환 기자)
▶ 준비하는 다음 작품이 있나.단편영화 촬영하고 있고, 올해 초에 두 번째 장편영화를 촬영했다. 그 작품도 후반 작업 중인데, 세상에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고 있다.
▶ '밤의 문이 열린다'를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 달라.어… 저는 영화를 보고서, 굉장히 묘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어두운데 굉장히 위로받는 지점이 있다. 하루는 수양이를 보고 울컥하고, 또 효연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안쓰러워지기도 했다. 기다려주신 분들이 꽤 있으셔서 그분들한테 너무너무 감사하다. 극장에 오시는 분들께도 감사하다. 어쨌든 자기 시간을 투자해서 영화를 봐주신다는 게 너무나 감사한 일이니, 그걸 까먹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영화가 좀 어두운 내용일 수도 있고, 보시는 분마다 보는 게 다를 수 있다. 혜정이 죽음을 통해 다시 자기를 발견하는 것처럼 삶의 작은 부분을 발견하시고 위로를 얻으셨으면 좋겠다. 내가 많은 사람과 연결돼 있고, 평범한 하루처럼 보여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느끼셨으면 좋겠다. <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