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이한형기자/자료사진)
'비선실세' 최순실 씨가 뇌물을 요구한 것이 강요에 해당할 정도는 아니었고, 뇌물이 오갈 당시 삼성에 경영권 승계현안이 존재했다는 대법원 판단이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양형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심 재판부가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근거로 제시한 요건의 상당수가 대법원 판단에 따라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게 되면서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9일 국정농단 상고심 선고에서 최씨가 삼성에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지원금을 주도록 협박했다는 혐의(강요)에 대해 "협박, 즉 해악의 고지라고 평가하기 어렵다"며 강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삼성이 최씨의 강요에 못 이겨 영재센터에 지원금을 준 것이 아니라 자의적 판단에 따라 건넸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이 판단은 삼성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씨의 겁박 때문에 뇌물을 줬다는 이 부회장의 2심 판결에 배치되는 것이다.
이 부회장 2심 재판부는 당시 이 부회장의 양형을 판단하면서 '정치 권력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뇌물을 공여했다'는 점을 고려요소로 삼았다. 박 전 대통령의 질책과 뇌물 요구의 강도가 매우 강했고, 공무원의 뇌물요구가 권력을 배경으로 한 강요에 해당하면 공여자에 대한 비난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최씨의 뇌물 요구가 강요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이 같은 유리한 양형요소는 이 부회장에게 더 이상 적용할 수 없게 됐다는 분석이 많다. '수동적으로 뇌물을 공여했다'는 전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재센터 뇌물을 건넬 만한 동기가 있었는지를 좌우하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 현안'의 존재 여부를 두고도 대법원은 승계 현안이 있다고 봤다. 역시 파기환송심의 양형 판단에서 이 부회장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삼성은) 최소비용으로 삼성 주요 계열사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대한 이 부회장의 지배권 강화라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미래전략실을 중심으로 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승계작업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승계작업이나 부정한 청탁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아 뇌물공여에 대한 비난가능성과 책임을 이 부회장에게만 물을 수 없다"는 2심 재판부의 양형 판단과 어긋나는 부분이다.
2심 재판부는 이 판단을 토대로 "이 부회장이 뇌물을 공여해 실질적으로 취득한 이익이 없고, 기업 현안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에게 청탁이나 요구를 하지 않았으며,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모습도 찾을 수 없다"며 집행유예 요건을 충족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현안이 존재한 것으로 대법원이 결론 내면서, 이런 양형요소들이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할 근거로 보기 어려워졌다.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양형요소들이 더는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 확정되면,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양형기준안에 따라 이 부회장에게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법원 양형기준안에 따르면 뇌물죄에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해서는 ▲ 수동적으로 뇌물을 공여한 경우 ▲ 뇌물액이 1천만원 미만인 경우 ▲ 상사의 지시에 의한 경우 ▲ 자수나 자백을 한 경우 중 2개 이상에 해당해야 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이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 부회장의 또 다른 주요 혐의인 횡령죄와 관련해서도 양형기준안은 ▲ 압력에 의해 범행에 가담한 경우 ▲ 횡령액이 경미한 경우 ▲ 상당부분 피해가 회복된 경우 중 2개 이상에 해당해야 집행유예를 선고하도록 권고한다. 이 부회장은 '피해가 회복된 경우'만 해당한다.
다만 법원 양형기준안은 권고사안이기 때문에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각에선 여전히 집행유예 선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