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ASW 교장선생님 스테판 루파너. 학교 건물 곳곳에 '함께 배우고 함께 생활한다'는 그의 교육철학이 녹아 있다. 학생들은 교장인 루파너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걸었고, 그 역시 학생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어울렸다
'함께 배우고, 함께 생활한다(Gemeinsam lernen, Gemeinsam leben)'
독일 학교 '알레마넨슐레 부튀싱엔(Alemannenschule Wutoschingen·이하 ASW)'의 교장 선생님 스테판 루파너의 교육철학이다.
ASW는 스위스 국경에서 5km 떨어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작은 마을 부튀싱엔(인구 6500여 명)에 위치했다. 현재 교사 70명과 학생 650명(8~18살)이 생활하고 있다.
2005년 ASW에 부임한 루파너는 2011년 기존 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자신의 교육철학에 맞게 수업방법과 학교공간을 혁신하기 위해서다.
◇현장수업과 모둠수업…낙오자는 없다
'저자와의 대화'에서 저자의 강연을 들은 후 사인을 받는 학생들. 사진=ASW 홈피
ASW는 현장수업과 모둠수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학생들은 이론수업 보다는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체험 위주의 교육을 받는다. 기업체에서 생산시설을 둘러보고, 서점에서 책 출판과정에 대해 배운다. 교회·성당에서는 '종교와 인간', 농장에서는 '환경과 인간'을 주제로 한 강연을 듣는 식이다.
루파너는 "교실에서 책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눈으로 확인하고 체험하는 현장수업이 아이들에게 효과적"이라며 "물고기도 잡고 나무도 잘라보는 등 자연과 접할 기회를 많이 주려고 한다. 아이들도 만족해 한다"고 말했다.
현장수업은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원 아래 이뤄진다. 주민들은 청소비용 정도만 받고 수업 장소를 대여해주고, 이중 20여 명은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무상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루파너는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학교를 지은 덕분에 이들과 연결고리가 생겼다. 또한 현장수업이 많다 보니 지역사회와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주민들도 학교의 일부 공간을 공유한다"고 설명했다.
ASW에는 반 개념이 없다. 대신 곳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때그때 모둠을 만들어 수업한다. 사진=ASW 제공
모둠수업은 학교 곳곳에서 이뤄진다.
ASW는 반 개념이 없는 대신 같은 학년끼리 그때그때 모둠을 만들어 수업한다. 선생님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기대하기 힘든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음식수업의 경우, 학생들이 소규모 그룹을 만들어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진행한다. 회의와 자료수집을 거쳐 결과물을 만들면 선생님은 조언자 역할을 한다.
루파너는 "프로젝트 수업을 하면 학생 자신이 왜 이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선생님은 학생 스스로 관심 있는 문제를 찾고 이를 풀려는 의지를 북돋워주면 된다"고 말했다.
ASW의 수업방식은 학생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ASW 부지 내 공터에서 열린 벼룩시장에서 만난 9학년 학생 사미라 투라겔과 필리아 베이직. 이들은 직접 벼룩시장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이 즐겁다고 했다
취재진이 찾아간 7월 5일, 학생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공터에서 벼룩시장을 열었다.
사미라 투라겔(9학년)은 "학교에서 많은 걸 체험할 수 있어 좋다.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생기면 선생님과 상의해서 결정하는데, 대체로 우리 의견을 수용해준다"고 말했다.
필리아 베이직(9학년) 역시 "친구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니까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더 많은 학생이 자기 관심사에 대한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학업이 뒤처지는 저학년을 위해 고학년이 '학습 도우미'를 자처하는 전통 덕분에 낙오자가 없는 것도 ASW의 장점이다.
◇학생에 1인 1공간…선생님과 학생이 한 공간에서 생활
휴식공간에는 각양각색 의자가 놓여 있고 카페트에 방석이 깔려있기도 하다. 벽 대신 커튼으로 공간을 분리한 점도 눈에 띈다. 이 곳에서 학생들은 앉거나 눕고 뒹굴면서 휴식을 취했다
각 건물은 층마다 콘셉트가 다르다. 아래층은 휴식공간, 위층은 학습공간으로 꾸몄다.
휴식공간 곳곳에는 각양각색 의자와 탁자를 놓았다. 원형 카페트에 방석을 올려놓기도 했다. 벽 대신 얇은 커튼으로 구획을 나눈 것도 눈에 띄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의자에 눕거나 앉아서 웃고 떠들었다.
여기서는 모둠수업도 이뤄졌다. 학생들은 바닥에 빙 둘러앉아 자유롭게 토론을 했다. 학교 내부에서는 모두 신발을 벗는데, 편한 자세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한 배려다. 바닥과 가구에 아이들 정서에 좋은 목재를 주로 썼다는 점도 돋보였다.
화재 등 비상시 빠른 대피를 위해서는 휴식공간에 가구가 적은 게 좋지만, 곳곳에 건물 내외부를 연결하는 통로와 비상문을 만들어 이를 상쇄했다.
학습공간은 교실과 학생 개인공간으로 구성됐다. 타원형 탁자와 화이트보드를 구비한 교실에서 진행하는 이론수업은 짧게 끝내는 대신 현장수업을 자주 한다.
아이패드를 이용해 수업하는 선생님과 학생들. ASW는 교실에서 진행하는 이론수업은 적은 대신 현장수업을 많이 한다
교실에서의 수업도 고리타분하지 않았다. 취재진이 찾은 교실에서 학생들은 아이패드를 활용해 '강아지는 1년에 옷이 몇 벌 필요할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아이패드는 시에서 지원받았다. 루파너는 "아이패드 덕분에 어디에서나 수업할 수 있고, 종이로 된 책 비용도 절감됐다"며 "학생들 사이에서 '수업 중 게임을 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어 수업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습공간 중 고학년이 사용하는 학생 개인공간 전경. ASW는 학생 1인에게 1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 곳에서 수업 준비, 시험 공부 뿐만 아니라 선생님 감독 아래 시험도 치른다. 선생님도 이 곳에서 함께 생활한다
학생 개인공간은 왁자지껄한 휴식공간과 달리 조용했다. 학생들은 이 곳에서 시험 공부를 하거나 수업 준비를 했다.
ASW는 모둠수업이 많아서 학생 스스로 자료를 찾아야 할 때가 많다. 학생 개인공간 바로 옆 복도에 책장을 비치해 학생들이 쉽고 빠르게 자료를 찾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진=ASW 제공
학습공간 중 저학년이 쓰는 학생 개인공간 모습. ASW에는 교무실이 따로 없다. 대신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공간을 공유한다
모둠수업을 하려면 자료가 많이 필요한데, 학생 개인공간 바로 옆 복도와 계단 아래쪽에 책장들이 설치되어 자료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선생님과 학생이 공간을 공유하고, 학생 개인에게 1인 1책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즉 교무실이 따로 없고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한 공간에서 생활했다.
루파너는 "자기 공간을 오픈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극소수 선생님이 리모델링을 반대했지만, 지금은 ASW만의 특징적인 공간으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ASW는 학교수업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모든 공간의 문을 열어놓는다. 개인 사물함도 열쇠가 따로 없다. 그래도 도난 사고가 발생한 적 없고 걱정도 하지 않는다. 학교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루파너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시간을 즐긴다"고 표현했다. 인터뷰 후,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그는 연습하러 간다며 자전거를 타고 총총 사라졌다. 시간을 즐기기 위해.
ASW는 5개 학교와 함께 독일 최고 권위의 '2019 올해의 독일학교상'을 수상했다.
※건국이래 대한민국 교육과정은 숱하게 바뀌었다. 사회변화와 시대요구에 부응한 결과다. 하지만 학교건축은 1940년대나 2019년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네모 반듯한 교실, 바뀌지 않은 책걸상, 붉은색 계통의 외관 등 천편일률이다. 이유는 뭘까? 이로 인한 문제는 뭘까? 선진국과는 어떻게 다를까? 교육부는 앞으로 5년간 9조원을 학교공간 혁신에 투입한다. 학교건축 무엇이 문제인지 CBS노컷뉴스가 총 11회에 걸쳐 긴급 진단한다.[편집자주] 글 게재 순서 |
①우리나라 학교건물은 왜 교도소를 닮았을까 ②"학교 갇혀서 공부하는 곳 아냐" 지역과 함께하는 영국 학교 ③'낙오자는 없다'…건물에 교육철학 반영한 독일 ASW (계속) |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재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