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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판소리 복서', 이상하게 웃기고 찡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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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판소리 복서', 이상하게 웃기고 찡한 영화

    [노컷 리뷰]

    9일 개봉하는 영화 '판소리 복서'는 과거의 실수로 체육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던 전직 프로 복서 병구(엄태구 분)가 자신을 믿어주는 든든한 지원군 민지(이혜리 분)를 만나 잊고 있던 미완의 꿈 '판소리 복싱'을 완성하기 위해 생애 가장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사진=폴룩스㈜바른손 제공) 확대이미지

     

    ※ 영화 '판소리 복서' 내용이 나옵니다.

    판소리 장단에 맞춰 날랜 몸놀림을 보여주는 엄태구의 움직임으로 시작한 영화 '판소리 복서'(감독 정혁기), 개인적으로 초반은 따분한 편이었다. 짧은 시간에 시계를 자꾸만 보게 됐다.

    체육관 관장인 것 같은데 한가롭게 성경 읽기에 몰두하는 박관장(김희원 분), 왜 저렇게 복싱을 다시 하고 싶다고 절절매는지 모를 조금은 답답해 보이는 병구(엄태구 분), 묘하게 짜증을 부리면서 불만에 차 있는 복서 교환(최준영 분), 한 달에 몇 ㎏까지 뺄 수 있냐며 불새 체육관에 등록한 민지(이혜리 분)까지, 다들 왜 저러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천천히 나와서일까.

    체육관 한 면을 크게 채울 만큼 촉망받는 선수였던 병구가 왜 복싱을 그만두었는지, 가장 중요한 그 이야기는 특히나 더 늦게 등장했다. 그저 그가 판소리 복싱이라는, 누구도 하지 않는 복싱에 몰두했고 같이 꿈을 키우던 친구 지연(이설 분)이 있었다는 것이 과거 회상으로 나오면서 대략의 줄거리가 암시될 뿐이다.

    지루하게 느껴졌던 초반의 아쉬움은 중반으로 넘어갈수록 나아진다. 구성진 가락의 판소리가 차츰 귀에 익는 순간이 오며, 체육관에 다니는 꼬마들에게도 무시당할 만큼 순한 병구의 어눌함 때문에 웃음이 터지는 때가 잦아진다. 몸 상태 때문에 권투를 그만두고 방황할 적, 말도 행동도 거칠고 미운 병구보다 모두에게 깍듯하고 굳이 험한 말 내뱉지 않는 현실의 병구가 훨씬 더 매력적이다.

    누구한테 고맙다 미안하다 이런 말을 잘할 줄 모르고 퉁명스러운 교환을 보고 "동생이었으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며 "왜 저렇게 싸가지 없냐?"고 사이다를 날리는 민지가 병구에게 반한 이유를 관객들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동네 아이들이 강아지를 코너에 몰아 괴롭히는 걸 보고 구해주고, 롤모델로 삼는 복서 이름을 붙여 기르며,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민지에게 카메라를 선물하는, 맑고 고운 마음씨를 가진 청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매를 가족력으로 물려받은 병구는, 자기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희망과 기대를 한 톨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팍팍한 삶, 민지는 병구의 사정을 제대로 모르지만 한 번 사는 인생이니 하고 싶은 걸 다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용기를 준다. 병구 몸 상태를 알게 된 박관장은 병구에게 모든 걸 맡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고. 물론 병구는 누구보다 자기 상태를 잘 안다. 오랫동안 쉬어서 기량이 많이 떨어졌고, 병으로 몸 상태도 나쁘다는 것을. 곁에 있는 이들의 격려에 힘입어 링 위에 오른다.

    '판소리 복서'에서 엄태구가 차지하는 존재감은 엄청나다. (사진=폴룩스㈜바른손 제공) 확대이미지

     

    사실 병구는 무릎이 좋지 않은데도 신인왕전 대회를 나가기 위해 약을 먹었다가 도핑 테스트에 걸려 자격 박탈당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교환이 아무리 대회에 나가고 싶어도 불새 체육관 소속 선수와 시합하려는 곳이 없었던 것. 운명의 장난처럼 병구의 복귀전 상대로 황소체육관으로 간 교환이 나오지만, 영화는 비현실의 길을 걷지는 않는다. 민지가 등장해 시합장에서 판소리 장단을 치며 응원해도, 내내 고전하던 병구가 교환을 쓰러뜨리고 쾌거를 거두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판소리 복서'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특이한 소재보다, 영화 전반에 깔린 따뜻한 시선이 더 돋보이는 영화였다. 체육관 영업을 할 때도 '권투'가 아니라 '복싱 다이어트'를 내세워야 하고, 더 이상 사람들이 필름 사진을 찾지 않기에 사진관이 사라지고, 어느 땅은 '어딘가 부족한 상태'임을 인정받아 '재개발'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영화는 "시대가 변했"음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병구의 말에 담겨있는 듯하다. "시대가 끝났다고 우리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좋았던 부분은 병구와 민지의 관계 설정이었다. 코치님-민지 씨로 만난 두 사람은 차차 친해지더라도, 서로를 향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선배라서, 상사라서 연인에게 반말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숱한 영화 속 주인공과 달리 누구에게나 공손한 병구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인상적이다. 민지 역시 체육관과 동네에서 우스운 취급을 당하는 게 분명한 병구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둘의 알콩달콩한 이야기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순수하고 무해한 연애담은 꽤 재미있다.

    엄태구는 어둡고 그늘지고 다소 호전적으로 보이는 과거의 병구부터, 세상 순수한 현재의 병구까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펼쳐 보인다. 무심하고 무정한 듯 보였으나 누구보다 병구를 생각하는 관장 김희원은 누군가를 애처로워하고 애틋해 하는 연기마저 잘한다. 밝고 솔직하고 병구에게 먼저 마음을 표현하는 민지 역의 이혜리도 제 몫을 다했다. 요즘 개봉작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것 같은 최준영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거니까"라는 대사를 남긴 이설도 반갑다.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따뜻한 웃음이 있는 영화.

    9일 개봉, 상영시간 113분 33초, 12세 이상 관람가, 한국, 코미디·드라마.

    극중 병구-박관장, 병구-교환, 병구-민지의 관계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박관장 역은 김희원, 교환 역은 최준영, 민지 역은 이혜리가 맡았다. (사진=폴룩스㈜바른손 제공) 확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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