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 거리를 두고 있는 바른미래당 안철수 전 의원의 행보를 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행보가 연상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복귀에 성공해 결국 대권을 거머쥔 김 전 대통령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다만 복귀 과정에서 정치적 세력, 지지기반, 명분 등을 갖췄던 김 전 대통령과 달리 안 전 의원에겐 과제가 산적한 상황이다. 현 정치 지형 역시 안 전 의원에게 녹록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낙선-유학길-책 출간' 안철수, DJ 벤치마킹?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 12월 14대 대선에서 패배했다. 세번째 대선 도전의 실패는 뼈아팠다. "정치는 떠났지만 국민 여러분 곁까지 떠난 것은 아니다"라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1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시절 김 전 대통령은 연구와 강연 활동을 활발히 했다. 특히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 등의 주제에 관심이 높았다. 이 시기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라는 에세이도 썼다. 에세이에는 정치적 언급 보다 생활관, 성격 등을 차분하게 담았다.
유학부터 귀국까지는 약 7개월이 걸렸다. 1994년 12월에는 아태재단을 설립해 정계 복귀에 운을 띄운 뒤, 1995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정치 일선에 나섰다.
현재 정치권을 떠난 바른미래당 안철수 전 의원의 행보가 김 전 대통령의 정계은퇴와 복귀 과정을 '벤치마킹'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낙선과 유학길, 연구 활동, 책 출간 등까지 유사성이 포착된다.
안 전 의원의 한 측근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큰 정치인인 DJ와 결부시켜서 생각하면 감사하지만, (벤치마킹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며 "책을 내는 등 일련의 과정들이 딱 짜여져서 진행되진 않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또다른 측근은 통화에서 "놓여진 상황 자체가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다"면서도 "DJ의 길을 따라갈 가능성은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하지 않았을까 본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DJ가 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을 때 '중도개혁'을 표방했다. 그만큼 중도주의자"라며 "안 전 의원도 마찬가지로 중도주의자인 공통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안 전 의원은 지난해 6·13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한 뒤 "성찰과 채움의 시간을 갖겠다"며 그해 9월 유학길에 올랐다. 4차 산업혁명과 분단과 통일의 경험을 배워오겠다는 이유로 독일을 택했다. 막스플랑크 연구소에 머물며 연구 활동에 집중했다.
최근에는 자서전 '안철수, 내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것들'을 내고, SNS(트위터)를 재개하며 정계 복귀 기대감을 높였다. 자서전에는 마라톤 대회 에피소드나 유럽 생활에 대한 얘기를 담았다.
그가 설립한 동그라미재단(옛 안철수재단)은 최근 해외에서 미세먼지 공모전 협약을 체결하고 인공지능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안 전 의원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이유로 정계 복귀에 기지개를 펴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으나 안 전 의원은 지난 6일 예상을 깨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복귀에 선을 그은 행보로, 그만큼 고민이 짙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세력‧지역기반‧명분 들고 정계복귀 성공한 DJ…安의 복귀는?김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는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1997년 12월 15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대선 '사수'만에 성공을 거둔 것이다.
성공 이유로는 동교동계라는 정치 세력, 호남이라는 지역 기반, '지역등권론'이라는 명분 등 3박자가 꼽힌다. 지역등권론은 호남·충청권이 영남과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논리로, 호남 민심의 부응과 함께 충청권의 맹주 JP와 손을 잡아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안 전 의원의 현 상황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세력과 지역 기반이 부족할 뿐더러, 내세울 명분도 아직 갖춰지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그가 세운 '국민의당'은 한때 호남에서 돌풍을 일으켰으나 흘러간 옛 노래가 됐다. 안철수계로 분류되는 바른미래당 의원은 6명 뿐이다.
명지대 신율 교수는 통화에서 "DJ는 확실한 지역기반이 있었지만 안철수 전 대표는 부족하다. 자리를 비워도 안철수에 대한 타격이 더 크다"라고 말했다.
이어 "바른미래당이 어정쩡한 상황이고, 싸움판에 끼어봤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최소한 총선 전까지는 일정 부분 거리를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안 전 의원 측근 그룹은 '아직은 올 상황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한 관계자는 "귀국 일성이 '손학규 대표 사퇴'라면 얼마나 허망한가"라며 "이번이 정계 복귀에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정치권 러브콜 이어지는 安…관건은 '중도'
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왼쪽)과 안철수 전 의원. (사진=자료사진)
하지만 안 전 의원이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계속 피어오르고 있다. 조국 사태와 함께 보수대통합 등 정계개편 관측이 일면서 정치권의 러브콜이 이어지는 것이다.
안철수-유승민계 15명 비당권파 의원으로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을 꾸린 유승민 대표는 안 전 의원을 향해 "뜻을 같이 해주길 기대한다"고 손짓하고 있다. 변혁 소속 하태경 의원은 8일 라디오에 출연해 "(안 전 의원은) 내년 총선을 건너뛰면 해외에서 정치적으로 객사할 것"이라며 우려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안 전 의원의 복귀 조건으로 '중간지형의 확대'를 꼽았다. 신율 교수는 "사회적 분열 구조가 계속 진행될 것으로 관측된다"며 "이 구조에서 잊혀지는 것을 감수하고 기다리다가, 중도로 임팩트 있게 나오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 역시 통화에서 "지금은 안철수의 시간이 될 수 없다"며 "여야와 진보, 보수가 대립하는 것이 현재보다 더욱 극단으로 간다면 중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공간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안 전 의원은 지난 1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지난 1∼2일 전국 유권자 1천4명 대상·신뢰수준 95%에 표본오차 ±3.1%포인트·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이낙연 국무총리(22%),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17%)에 이어 7%를 기록하며 3위를 차지했다.
특히 무당층 조사에서 안 전 의원은 14% 지지로, 이 총리(9%), 황 대표(7%)를 제쳤다. 조국 사태에서 '중도층'을 흡수한 결과로 해석된다. 앞서의 분석이 일부 수치로 나타난 셈이다.
결국 복귀 성공을 위해선 정치 지형에 대한 감각과 타이밍, 결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시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복귀 시기를 늦추다가 자칫 '꽃가마'만 타러온다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의 러브콜이 국민들의 요구인지, 정치권의 필요에 따른 요청인지 면밀히 파악할 필요성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이 1993년 7월 귀국해 서울 땅을 밟는 날, 김포공항에는 수천명의 환영인파가 자리했다.
김형준 교수는 "DJ를 벤치마킹 하더라도 안 전 대표가 처해있는 조건과 얼마나 맞느냐를 봐야 한다"며 "아마 안 전 대표는 2016년 총선을 석달 앞두고 국민의당을 창당해 성공으로 이끈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다. 성공적 복귀를 위해선 이보다 더 큰 정치적 실험을 들고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