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 동안 개봉작 감독 성별을 조사한 결과 여성 감독은 평균 9.7%에 그쳤다. 여성 감독은 여전히 '소수'이며, 한 작품과 다음 작품의 사이도 남성 감독보다 길고, 상업영화에 안착하는 경우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이 너무 오래된 탓에, 여성 감독은 너무 쉽게 '여성 감독'이라는 틀 안에 묶이고 만다. 그래서 이 기획은 '여성 감독'이라는 범주보다는 '지금 주목할'에 방점을 찍고자 했다. '보희와 녹양' 안주영 감독, '밤의 문이 열린다' 유은정 감독, '우리집' 윤가은 감독, '벌새' 김보라 감독, '메기' 이옥섭 감독, '아워 바디' 한가람 감독 등 관객들에게 자기 세계를 펼쳐보인 여섯 명의 '신예' 여성 감독을 들여다본다. 그들이 연출한 작품, 각자 가진 고유한 개성, 앞으로 펼치고자 하는 작품 세계에 관해. [편집자 주]
올해 극장가에는 남성 주인공, 남성 서사 위주였던 이야기를 벗어나 그동안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집중'한 여성 감독들이 여럿 등장했다. 스크린에서 사라진 듯했던 어린아이들의 모험기('보희와 녹양', '우리집')부터, 판타지적 요소를 지닌 여성 투톱 장르물('밤의 문이 열린다'), 개별적인 듯하지만 보편성을 가져가는 한 아이의 성장담('벌새'), 여성의 몸뿐 아니라 그 청춘이 지닌 우울과 결핍을 돌아보는 일상물('아워 바디'), '믿음'을 소재로 발칙한 상상력을 발휘해 낯설되 가볍지 않은 웃음을 주는 인권 영화('메기')까지. 여성 감독의 장편 데뷔작 다섯 편과, 두 번째 장편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 맑고 싱그러운 로드 무비 '보희와 녹양'(5월 29일 개봉)안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은 소심하고 여린 소년 보희(안지호 분)가 대범하고 당찬 소녀 녹양(김주아 분)과 함께 아빠를 찾으러 나서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이야기다. 포스터에서부터 초록의 기운이 가득한 '보희와 녹양'의 강점은 청량함과 무해함이다. 아이들은 솔직하고 때론 겁 없이 굴지만, 영화는 아이들에게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위험을 안겨주지 않고 그저 그들의 방황 혹은 모험을 따라간다.
지난 5월 29일 개봉한 영화 '보희와 녹양' (사진=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수상해 보이는 어른 성욱(서현우 분)도 실은 괜찮은 사람이었고, 보희를 괴롭혔던 아이의 부모님마저 예상외로 '경우 있는', 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음이 편하다. 싱그러운 녹음의 순간을 포착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저절로 평온해지는 기분이 든다.
지난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으며, KTH상을 탔다. 주인공 보희 역의 배우 안지호는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을 탔다. 이밖에 올해 제7회 무주산골영화제, 제2회 제주혼듸독립영화제, 제14회 파리한국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 우울하고 서늘하지만, 온기도 있는 판타지 '밤의 문이 열린다'(8월 15일 개봉)유은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밤의 문이 열린다'는 유령이 주인공인 장르물로, 판타지적 색채가 짙다. 유령처럼 살던 혜정(한해인 분)이 어느 날 진짜 유령이 되어 거꾸로 흐르는 유령의 시간 속에서 효연(전소리 분)을 만나게 되는 블루지 판타지 드라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하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좇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가져갈 수 있다.
지난 8월 15일 개봉한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 (사진=영화사 리듬앤블루스 제공)
'밤의 문이 열린다'는 혜정이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얼개다. 누구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홀로'이기를 바랐던 그가 사실은 사람들,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차츰 알아간다는 결말은 뜻밖이지만 따뜻해서 반갑다. 아무 욕망도 없어 보이는 혜정과 욕망이 끓어 넘치는 효연의 닮은 듯 다른 모습을 대조하는 것도, 혜정에게 '감정적 유대'의 소중함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 주는 어린 소녀 수양(감소현 분)의 존재를 눈여겨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지난해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초이스 장편 부문에서 관객상을 탔다. 같은 해 제5회 춘천영화제, 제9회 광주여성영화제,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에도 연이어 초청받았다.
◇ 슬프고도 명랑한 '우리집'(8월 22일 개봉)장편 데뷔작 '우리들'로 제25회 부일영화상,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등 11관왕이라는 기록을 쓴 윤가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우리집'. '우리집'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숙제 같은 '가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어른들 대신 직접 나선 동네 삼총사의 빛나는 용기와 찬란한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지난 8월 22일 개봉한 영화 '우리집' (사진=아토 제공)
'우리집'에 나오는 세 아이는 모두 '집'과 관련한 고민을 안고 있다. 하나(김나연 분)는 자꾸만 싸워서 저러다 헤어질 것 같은 엄마·아빠 때문에 근심이고, 유미(김시아 분)-유진(주예림 분) 자매는 부모님 일 때문에 자꾸만 이사 가는 것 때문에 걱정이다. 서로의 언니와 동생이 되어주며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가던 셋은, 어쩌다 삐끗해 자꾸만 꼬이는 일 때문에 크게 다투고 정성껏 만든 집 모형도 부숴버린다. 영화는 가정이 꼭 유지되지 않아도 괜찮고, 다른 동네로 가게 되더라도 우정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집'은 13일 기준 5만 2566명의 관객을 모아 전작 '우리들'의 5만 450명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올해 제63회 BFI 런던영화제에 초청됐고 제14회 파리한국영화제에서는 폐막작으로 선정됐다.
◇ 작은 새의 놀라운 날갯짓 '벌새'(8월 29일 개봉)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개별적으로 보이는 한 중학생 소녀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그 시대의 '보편'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벌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중산층 가정에서 온전히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은희(박지후 분)의 이야기다. 제목 '벌새'는 1초에 날갯짓을 80번 넘게 하는 작은 새에서 따 왔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소외된 은희가 한문 교실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김새벽 분)과 교감하고 깊은 위로를 받고, 닥쳐온 슬픔과 시련을 이겨내며 성장한다.
지난 8월 29일 개봉한 영화 '벌새' (사진=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제공)
'나는 노래방 말고 서울대 간다'라는 구호를 자못 비장하게 외치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흐리는 방해꾼을 색출하고자 아이들에게 날라리를 적어 내라고 하며, 성적에 따라 냉혹하게 반을 가르는, 그게 야만인 줄도 몰랐던 그 시절의 야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가정 내 폭력도, 가부장제가 작동한 자리에 남은 상처도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을 받은 '벌새'는 개봉하기 전부터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25관왕을 기록해 이목을 끌었다. 개봉 후에는 제25회 아테네국제영화제 최우수 각본상, 제20회 베르겐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공동 대상을 받아 27관왕이 되었다. 50개 전후의 적은 스크린만이 배정됐지만, 13일 기준 12만 4358명의 관객을 모으며 선전 중이다.
◇ 낯설고 색다르게, 허 찌르는 코미디 '메기'(9월 26일 개봉)이옥섭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기'는 미스터리 펑키 코미디라는 장르를 표방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게 뭐지?' 할 수 있지만 보고 난 후라면 아마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될 것이다. '메기'는 병원을 발칵 뒤집은 19금 엑스레이 사진, 도심 한복판에 등장한 싱크홀과 위험을 감지하는 특별한 메기까지 믿음에 관한 가장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을 담은 작품이다.
지난 9월 26일 개봉한 영화 '메기' (사진=국가인권위원회, 2X9HD 제공)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자꾸만 묻는 영화는 교훈을 주려고 애쓰지도 않고 딱딱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가 혹시나 놓쳤거나 무심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허상, 찍은 사람보다는 찍힌 사람에 손가락질하는 세태 등을 산뜻하고 알록달록한 화면에 녹아냈다. 웃기지만, 웃음의 끝엔 생각거리를 남긴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13일 기준 3만 관객을 돌파한 '메기'는 지난해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먼저 알아본 작품이다. CGV아트하우스상, 시민평론가상, KBS독립영화상, 올해의 배우상 4관왕을 휩쓸었고,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제14회 오사카아시안영화제 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으며, 제23회 판타지아국제영화제 데뷔 작품 부문에서 특별 언급됐다.
◇ 여성의 몸과 삶의 고단함을 바라보는 '아워 바디'(9월 26일 개봉)한가람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워 바디'는 8년간 행정고시에 번번이 떨어지며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청춘 자영(최희서 분)이 우연히 달리는 여자 현주(안지혜 분)를 만나며 달리기 시작하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멈추고 싶은 순간, 달리기 시작했다"라는 메인 카피와 달리는 최희서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만 보면 '달리기 자극 영화'로 보이지만, '아워 바디'는 그보다 입체적인 영화다.
지난 9월 26일 개봉한 영화 '아워 바디' (사진=한국영화아카데미 제공)
오히려 '아워 바디'는 '달리기 같은 운동에 몰입하면 정말 달라지고 조금 더 행복해질까?'라고 질문한다. 의외로 삶은 견고하고, 지루함과 막막함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동시에 주인공 자영의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선택의 연속이 판타지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착실히 운동한 결과로 얻은 몸의 변화를 집요하게 좇고 정직하게 담아내는 점이 신선하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은 '아워 바디'는 제14회 오사카아시안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특별 언급됐다.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제43회 홍콩국제영화제, 제7회 무주산골영화제, 제14회 파리한국영화제에 초청되거나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