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의 백남준 회고전에서 전시된 'TV정원' (사진=연합뉴스)
26일(현지 시간) 런던 템스강변에 위치한 테이트모던 미술관. 오전 10시 문이 열리자 일찌감치 줄을 서서 기다린 관람객들이 하나둘씩 전시관 안으로 들어섰다.
이들을 먼저 반긴 것은 'TV 정원'(1974/2002). 어두컴컴한 공간에 설치된 초록색 수풀 사이로 불을 밝힌 수십 대 TV가 마치 원래 그 속에 존재하던 것처럼 어우러져 있다. 자연과 기술의 경계가 허물어진 기이한 광경 앞에서 관람객들은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곳에서는 지난 17일부터 '미디어 아트 선구자' 백남준(1932~2006) 회고전이 열리는 중이다. 휴일 오전인 만큼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온 가족 관람객들이 눈에 띄었다.
이번 회고전은 총 12개 부문으로 나눠 백남준 작품 200여 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다. '혁신적' '선구적' '급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백남준 작품답게 그의 선구안을 엿보는 작품들이 눈길을 붙들었다.
관람객들은 '시스틴 채플'이 설치된 마지막 방안에 들어서자 "판타스틱"이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시스틴 채플'은 백남준이 1993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선보여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대규모 설치 작품으로, 이번에 26년 만에 재현했다. 36개 빔프로젝터가 한 방이 꽉 찰 정도로 설치돼 벽면과 천정에 자연풍광과 몽골인 등 다양한 영상을 투사했다. 화려한 영상의 향연에 방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됐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는 판넬라 씨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 전시를 알게 돼 찾아왔다"면서 "빔프로젝터를 이용한 '시스틴 채플'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관람객과 함께 하는 '참여 TV'(1969,2001)도 인기인 작품. CCTV 3대가 서로 연결돼 빨강, 파랑, 초록색 3가지 빛을 비추고 스크린 앞에 선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빛은 다르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친 자기 모습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다.
토니 밴더하이든 씨는 "40~50년 전에 이미 미래까지 통용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또 다른 관객은 "과거에 미래 미디어 환경을 예측하고, 움직이는 영상이나 사운드로 작품을 만드는 창의성을 발휘한 점이 놀랍다"고 말했다. 샬럿 존 씨는 "20년 전 뉴욕에서도 백남준 전시를 본 적이 있다"면서 "벽에 걸린 일반적인 작품들과는 확연하게 차별화한 작품 세계를 지닌 것 같다"고 전시를 둘러본 소감을 밝혔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전시된 '몽골텐트' 앞에도 사람들 발길은 오래 머물렀다. 독일 뮌스터뮤지엄에서 대여한 작품으로, 몽골 등지에 대한 백남준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첼리스트 샬럿 무어맨과 협업한 'TV 첼로'(1971) 역시 관심을 끈 작품. 백남준의 첫 로봇 작품인 '로봇 K-456'(1964)를 비롯해 장난기 넘치는 유쾌한 작품들 앞에는 어린이 관객들이 몰렸다.
이번 백남준 테이트모던 전시는 규모나 시의성 면에서 현지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방대하고 유익한 전시에서 백남준 작업을 마주하는 것은 실험의 즐거움을 찬양하고, 모든 형태의 예술이 이어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며 "세계주의와 국제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글로벌 미디어가 한때 얼마나 혁명적으로 보였는지를 기억하는 일"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휴대폰을 치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백남준의 희망차고, 창의적이며 정교한 비전 속을 거닐어 보라"고 권했다.
런던 소식을 다루는 매체인 런더니스트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TV정원'을 두고 "항상 켜져 있는(always-on) 요즘 시대에 매우 들어맞는 작품"이라며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게 놀랍다"고 격찬했다.
회고전이 열리는 테이트모던은 지난해에만 590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미술관이다. 영국 여행을 왔다가 전시 소식을 듣고 찾아온 한국인 관람객들은 "세계적인 명소에서 전시가 열려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테이트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이 주관한 백남준 회고전은 내년 2월 9일까지 열린다.
테이트모던에서는 백남준 후예들의 작품 세계를 보는 행사도 열리는 중이다. 지난 24일 개막한 제4회 런던아시아영화제(LEAFF) 부대 행사 중 하나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장민승과 이이남, 김영미와 일본 작가 2명의 작품을 테이터모던 내 영화관인 스타시네마에서 상영한다.
이이남 작가는 대표작 13점을 새롭게 제작한 60분짜리 작품 '뿌리들의 일어섬'을 선보인다. 장민승 작가는 3년에 걸쳐 제주도 풍광을 담아낸 '오버 데어'와 설악산 토왕폭포와 겨울 절경을 담은 '아르카디아', 세월호 참사의 슬픔을 손짓과 음악 등을 통해 표현한 '보이스리스' 등 3편을 들고 찾았다.
이날 오전 10시 장민승 작가의 작품 첫 상영 때는 미디어아트와 영화에 관심을 가진 현지 관객들이 객석을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