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철도회관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이한형 기자)
"작년 이맘때였을 거예요. 용균이가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집에 왔을 때 제게 실수로 사진 한 장을 보냈어요. 사진 속 용균이가 답답하게 마스크를 끼고 있더라고요. 코골이 때문에 집에서도 양악기를 끼고 자는데. 넌 회사 가서도 양악기를 끼고 일하냐고 하니까 용균이가 그게 양악기로 보였냐면서 막 웃는 거야. 웃을 일이 아닌데…둘이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어요. 우리가 작별하기 전에 배가 아플 정도로 한 번 웃은 기억은 있구나, 추억하는 거죠."
지난달 26일 '김용균재단'이 출범했다. 故김용균씨의 어머니인 김미숙씨가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그녀는 경북 구미를 떠나 최근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흩어져있는 '용균이들'의 목소리를 모아 사회에 알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CBS와의 인터뷰에서 김미숙씨는 아들과의 기억을 하나씩 꺼냈다. 사고 후 10개월이 지났다. 산안법 개정안 통과, 당정 협의안, 특조위 진상조사 결과 발표 등 굵직한 '고개' 몇 개를 넘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산을 넘기 위해 그녀는 재단을 만들었다.
◇"엄마 닮아 요령 못 피우는 아들…사고 이후 크게 달라진 것 없어""애가 저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요령 피우는 걸 아주 싫어해요. 애도 그걸 닮았고…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요. 요령 좀 피우면서 일했으면 용균이가 안 죽지 않았을까…"
그녀도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남편과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컴퓨터 부품이 불량인지 확인하는 일을 했다. 2교대 근무로 한 달에 한 번 쉬었다. 성실함 하나로 살았다. 큰 불만을 말하지 않고, 묵묵히 일해내야 작업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녀가 허리를 펼 수 있는 때는 집에서 일터까지 걷는 한 시간 반 남짓한 시간뿐이었다.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철도회관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이한형 기자)
지난 29일 국회에서 중대재해사업장 노동자 증언대회가 있었다. 김용균씨의 동료인 이태성씨는 "사고 이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며 "태안화력발전소만 조금 달라졌을 뿐, 다른 화력발전소들의 환경은 그대로"라고 지적했다.
"책임자 처벌, 특조위 권고안 이행.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요. 하나라도 이뤄진 게 보이면 힘을 내서 다른 것도 더 진행하려고 노력할 텐데…둘 다 묶여 있어요. 당시 여당에서는 산안법이 부실해도 일단 통과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했어요. 나중에 고칠 수 있으니까 그때 노력하자고…하지만 개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특조위가 지난 8월 22개 권고안을 냈지만,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는다고 노동자들은 입을 모은다.
지난 4월 정부가 내놓은 산안법 시행령, 시행규칙 개정 예고안에서도 용균씨의 업무는 도급 금지 대상에서 빠졌고, 승인 대상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김씨와 시민단체는 지난 6월 산안법 하위법령을 제대로 개정해달라며 정부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쌓여 있는 노동 과제들…정부 노동정책에 아쉬움 많아" "공약을 내세워서 제대로 지킨 사람이 없어요. 대통령이 바뀌었더라도 기득권 세력이 권한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으면 그들의 힘에 눌려서 못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김씨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 행보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부는 노동자가 살기 좋은 나라를 내걸었지만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확대' 등 노동정책은 미온적이다.
김씨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확대를 두고 "기업을 위한 법일 뿐, 누구를 위해 만든 법인지 모르겠다"며 "탄력근로제 노동자들은 시기에 따라 월급의 격차가 크고, 잔업수당을 없애 더 열악하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화학물질등록평가법' 완화 움직임에도 회의적이었다. 김씨는 "지금도 가습기 살균제 문제로 사람들이 죽고, 아파하는데 기업 경쟁력만을 위해 관리 기준을 완화해준다는 것 아니냐"며 "정부는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가 하나의 '빛'…산재 피해 가족·노동자들과 연대할 것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철도회관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이한형 기자)
"우리 용균이는 그나마 밝혀져서 이렇게 누명을 벗었지만, 많은 유가족이 어디에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도 몰라서 싸움을 포기하고…저도 이 싸움을 시작하면서 처음엔 이긴다고 생각을 안 했어요. 하지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식의 누명을 벗겨주는 것밖에 없어 계속 달려왔어요."
김씨의 발길은 화력발전소에만 향하지 않는다. 산업 현장 곳곳에 있는 노동자들과 연대한다. 청년 노동자들에게 편지를 받기도 했다. 매주 산업재해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 회의를 한다.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노동 사각지대를 살펴 개선해야 할 제도 등을 논의한다. 현재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현장실습 제도 폐지 운동 등을 하고 있다.
지난 31일 세월호 사참위 중간발표를 보고 김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영석 엄마가 울분이 터져서 인터뷰하는 걸 보고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 나도 울었다"고 말했다. 영석군의 어머니는 김용균씨 사고 당시 현장을 찾아 김씨를 위로했다. 김씨는 "영석 엄마가 처음부터 웃으면서 손을 잡는데, 눈은 울고 있었다"고 전했다. 유가족들은 사고를 당하면 그날에 멈춰져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마음이 깊이 남아있어요. 내가 관심을 두고 애한테 물었다면 그런 현장에서 일하지 않았을 텐데. 아이를 위험한 곳에서 못 빼냈다는 미안한 마음에 머물러있어요. 제가 죽어서 아들을 다시 만난다면 엄마가 네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재단을 만들고, 사람들 살리는 데에 평생을 보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 잘못을 용균이가 그때 조금이라도 풀어줬으면…"
다음 달 2일부터 10일은 김용균씨 추모 기간이다. 태안화력발전소에는 용균씨를 기리는 조형물이 설치된다. 쉬운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안다. 인터뷰 도중 그녀는 몇 번이고 눈물을 보였다. 그래도 그녀의 눈에 빛이 났다. '김용균이라는 빛'을 그녀는 이야기했다. 김씨는 안전한 환경에서 노동자들이 대우받는 사회를 위해 싸우는 모두가 '빛'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함부로 나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지켜보는 것, 그게 재단의 역할이에요" 그녀는 잊히는 게 무섭다고 했다. 아들과의 기억도, 터져 나오는 노동 문제도 계속 입 밖으로 꺼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