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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서도 노래…"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된 안동 소녀

문화 일반

    "자면서도 노래…"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된 안동 소녀

    • 2019-12-03 07:24

    소프라노 황수미 "잠꼬대로 노래했죠"
    국내외 교향악단과 활발한 협연 "언젠가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설 것"

    (사진=연합뉴스)

     

    소프라노 황수미(33)는 아침이면 일기장을 꺼내 든다.

    반짝거리는 햇살 아래 일기를 쓰면 정리가 잘 되어서란다.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고, 종이 위에 펜으로 꾹꾹 눌러쓴다. 스마트폰도 거의 쓰지 않고, 주로 메모로 일정을 적는다. 스마트폰 대신 종이와 펜이 있는 삶. 황수미는 빠르고, 바쁜 삶보다는 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고, 꾸준한 삶을 꿈꾼다고 한다.

    황수미 삶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울예고에 서울대를 거쳐 독일 뮌헨 국립음대에서 프리데르 랑 교수를 사사했다. 지크프리트 마우저, 안드레아스 슈미트 등 대가들로부터도 배웠다.

    2014년에는 세계 3대 국제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콩쿠르 우승 후 본 오페라 극장에 입단해 주요 배역을 도맡았고, 2016년에는 제네바극장에서, 2018년에는 빈 극장에 출연하는 등 세계적인 무대를 연이어 밟았다.

    퀸 엘리자베스 우승 후 그는 조수미, 신영옥, 홍혜경을 잇는 차세대 주자로서 늘 손꼽혔다. 여기에 2018년 평창올림픽 무대 개회식에서 올림픽 찬가를 부르며 대중적인 인지도마저 높였다.

    수많은 예중·예고 학생이 꿈꾸는 위치에 그는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에 도달했다. 그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노력했다"고 했다. 대학원 시절에는 꿈에서조차 노래했다고 한다.

    "하루라도 연습을 안 하면 불안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어제 만들어놨던 탑이 오늘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죠. 연습하고 싶고,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싶었어요. 동생 말이 자면서도 노래를 했다 하더라고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기특할 때가 있어요."

    그를 정상급 소프라노로 올려놓은 건 완벽주의였다. 실수란 무대에서 어쩌면 필수 불가결하지만, 그런 작은 실수마저 공연이 끝나고 나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바둑이 끝나고 바둑선수들이 복기하듯, 그의 머릿속은 오페라가 끝난 후, 실수 장면을 끊임없이 복기했다.

    도이체 그라모폰 창립 120주년 기념앨범('Songs') 작업을 할 때도 그랬다. "100번을 녹음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함께 작업한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가 "너무 자기비판이 심한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살짝 실수한 것까지도 신경 쓰였어요. 무대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200%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 늘 노력해요. 하지만 실수는 있을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이제는 자제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성장했지만, 처음부터 소프라노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경북 안동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발레를 배우고 합창단 활동을 했다. 발레 대회에도 나가봤으나 성과는 언제나 성악 쪽에서 나왔다. 어느 날 그는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 그냥 예고 갈래."

    서울예고 입시를 치를 때 시험장에 가면 반주자가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반주자를 대동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낙담했다. 뒤이어 의기소침해졌다. 급하게 구한 반주자로부터 '서울에서 레슨을 받지 않고는 합격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서다.

    당시 서울이라는 도시는 그에게 심적, 물리적으로 너무 크게 다가왔다. 아버지마저 당시 '떨어지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절망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줬고, 황수미는 여러 어려움을 뚫고 결국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부모님이 축하해주셨지만, 쉽지 않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돈이 화수분처럼 들어가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가 당시 붙을 줄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내심 떨어지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 자랑스러워하세요. 아버지는 커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너는 배포도 있고, 원하는 게 있으면 노력하는 애였어'라고."

    그는 지난 2018년 7월, 안정적으로 다니던 본 오페라 극장을 박차고 나온 후 '비정규직'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었지만 조금씩 타성에 젖어가는 게 싫었"고 "좀 더 공부해 넓은 무대에 서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매달 나가는 보험료, 생활비…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계속 직장에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하지만 돈 때문에, 더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을 뒤로 미루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좀 더 어릴 때,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서 프리랜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인생이 늘 그렇듯, 뭐든 일장일단이 있잖아요. 프리선언도 뭐 비슷하죠."

    현재까지 프리랜서로서의 삶은 만족스럽다. 이달 서울시향과의 협연을 끝내고 나면 내년 1월 노르웨이로 날아가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를, 2월에는 독일에서 슈만 공연('시인의 사랑')을 해야 한다. 다시 서울로 오면 KBS교향악단과의 협연이 기다리고 있다. 이탈리아, 그리고 다시 독일…. 연간 스케줄은 이미 꽉 차 있다.

    황수미는 지난 2017년 11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아직 서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저 무대에 오르겠다는 생각이 당시 대뇌 어디쯤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여러 차례 제안을 받았지만, 아직 기량면에서 부족하다고 판단해 고사했던 '나비부인' 역할을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해 보는 것과 같은 상상 말이다.

    "10년 안에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서서 2017년 찍은 사진과 비교해 봤으면 좋겠어요." (웃음)

    인생이 그렇듯, 늘 상승기만 있을 수는 없다. 그에게도 언젠가 내리막이 찾아올 것이다. 황수미는 그 순간이 오기까지 그저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언젠가 하강기가 찾아오겠죠. 그래서 오늘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소리는 제가 노력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받은 거잖아요. 공짜로 받은 악기인 셈이죠. 다만 거저 받은 악기를 잘 관리하는 건 온전히 제 몫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소리가 나도록 저라는 '악기'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 그걸 늘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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