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사진=연합뉴스 제공)
판사의 재판 중 실책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송이 제기됐지만 1년 7개월이 넘도록 법원이 사건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법관의 잘못으로 피고인의 혐의 일부를 공소기각까지 한 사안임에도 사법부가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는 것엔 여전히 인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항소8부(황기선 부장판사)는 지난 6일로 예정됐던 A씨의 국가 상대 손해배상소송 변론기일을 내년 3월 13일로 변경했다. A씨는 이른바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의 피해자다.
A씨의 법률대리인들은 지난해 4월 1심에서 패소하고 바로 항소했지만 1년 만인 올해 5월에야 재판부가 첫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이후 7월과 이달 6일 변론기일이 예정됐지만 두 번 모두 재판 전날 연기됐다. 이 변론기일들마저도 법률대리인들이 재판부에 기일지정신청서를 제출한 후 잡힌 것이었다.
법원은 매년 2월 정기인사가 예정돼 있어 내년 3월이면 민사항소8부의 구성원도 변경될 수 있다. 연 초마다 인사를 앞둔 법관들이 '골치 아픈' 사건의 재판 기일을 미루는 것은 법원의 고질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소송 당사자에게도 큰 불편을 줘 비판받아왔다.
A씨가 제기한 소송은 염전노예 사건 가해자를 처벌하는 형사 재판에서 판사가 '처벌불원서'를 아무런 검증 없이 받아들인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내용이다.
지적장애 2급인 A씨는 자신의 이름 외엔 한글을 읽지 못하고 생년월일을 쓸 수 있을 뿐 주민등록번호 전체를 외우진 못한다.
A씨를 약 13년간 무임금으로 착취해 기소된 고용주 B씨 측은 A씨를 찾아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인쇄된 문서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지장날인하게 했다. A씨의 후견인이 없는 사이 벌어진 일인데다, A씨의 신분증 사본이나 인감증명서, 본인서명 사실확인서 등이 모두 첨부되지 않았지만 재판부는 이 처벌불원서를 선고를 3일 앞두고 받아줬다.
당시 B씨는 영리유인·준사기·감금·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기소돼 검찰이 징역 4년을 구형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처벌불원서 덕에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나왔고, 나머지 혐의에서도 유리한 양형 기준으로 인정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실형을 피했다.
당시 재판을 맡은 광주지법 목포지원 형사1부(진현민 부장판사)는 B씨 사건을 다루기 전 다른 염전노예 가해 사건들을 최소 13건 다룬 적이 있었다. 특히 앞선 사건에서 비슷한 경로로 피해자인 지적장애인의 처벌불원서가 제출되자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지능이나 지적 수준, 사회적응력 등에 비춰볼 때 처벌불원 의사표시의 의미와 효과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보인다"며 배척한 바 있다. 당시 피해자는 A씨보다 지적장애도가 낮은 지적장애 3급이었다.
A씨의 국가배상 소송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50단독도 이러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당시 광주지법 목포지원 형사1부의 실책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관의 재판에 법령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위법한 행위가 되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며 2003년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려면 법관이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을 가지고 재판을 했거나 직무수행상 준수 기준을 현저히 위반했다는 점이 입증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사50단독은 이 판례만 제시했을 뿐 목포지원 형사1부가 어떠한 이유로 지적장애인의 처벌불원서 처리를 통상적인 경우와 달리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다. 이에 A씨 측은 이번 항소심 단계에서 진 부장판사 등 당시 재판부 구성원 3명을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이마저도 채택이 보류된 상황이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최근 항소심에서 판사의 과오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 사례가 드물지만 나오고 있어 재판부의 고심이 깊을 것"이라면서도 "재판부 변경 후엔 사실상 심리를 새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어서 소송 관계인 입장에선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