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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딸 무덤서 15세기 연호 쓴 화장용기 나온 까닭은

문화 일반

    영조 딸 무덤서 15세기 연호 쓴 화장용기 나온 까닭은

    • 2019-12-22 17:23

    학술지 '고궁문화'에 화협옹주묘 분석 논문 실려
    "후대에 모방 제작 가능성…18세기에 중국·일본 문물 수용"

    (사진=연합뉴스 제공) 확대이미지

     

    수년 전 조사가 이뤄진 경기도 남양주 삼패동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 무덤은 당대 여인의 화장문화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나와 학계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조선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협옹주는 사도세자 친누나로, 10세에 옹주로 봉작됐다. 미색이 뛰어났다고 전하나, 신광수와 혼인한 뒤 19세에 홍역으로 사망했다.

    삼패동 무덤은 후대에 남양주 진건읍으로 이장하기 전에 조성했는데, 화장품 추정 물질이 남은 청화백자합 약 10점과 분채(粉彩·도자기에 칠한 연한 빛깔의 무늬) 자기, 목제합, 청동거울과 거울집 등이 발견됐다.

    그런데 화장용기 중 청화백자 바닥 굽에는 '대명성화년제'(大明成化年製)라는 글자가 있다. 명나라 성화제는 재위 기간이 1464∼1487년. 그렇다면 화협옹주는 250년 전 유물에 화장품을 담아 사용했던 것일까.

    화협옹주 무덤 발굴조사를 진행한 고려문화재연구원 최광훈 연구부장과 황윤희 연구원은 국립고궁박물관이 펴내는 학술지 '고궁문화' 최신호에 실은 논문에서 "250년 이상 전해 왔다기보다는 청대에 송·명대 문화의 복고 열풍으로 '성화년제'가 하나의 브랜드처럼 여겨져 모방 제작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그 근거로 분채 자기에 또 다른 '성화년제'(成化年製) 글자가 존재한다는 점을 들었다.

    그들은 "분채 자기는 18세기 청 옹정제와 건륭제 연간에 개발된 것으로 알려졌다"며 "자기 제작 시기는 화협옹주 생몰연도와 비슷하지만, 성화년 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청화백자와 분채 자기에는 당시 내용물로 보이는 물질이 그대로 또는 탄화된 상태로 남았다"며 "백색 덩어리, 적색과 갈색 물질, 투명한 액체가 있었는데 화장품 종류로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화장 도구로는 빗과 먹 등이 발견됐다. 특히 먹은 눈썹 화장에 사용했는데, 출토된 먹에는 앞쪽에 '어제묵명'(御製墨銘), 뒤쪽에 '○우국중 관어○내'(○于國中 冠於○內)라는 글자가 있어 궁중에서 제작한 것으로 판단됐다.

    무덤에서는 일본 에도(江戶) 시대 자기로 짐작되는 그릇도 있었는데, 사도세자 적장자인 의소세손과 원빈 홍씨 무덤에서 나온 자기와 제작 기법·형태·문양이 유사해 일본 규슈 아리타(有田)산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일본에서 제작된 물품 중에는 청동거울도 있다. 거울 상단에 일본 가문 문장인 호랑나비 문양이 있고, 아래쪽에는 봉황이 양 날개를 펼쳐 비상하려는 모습을 새겼다. 왼쪽 하단에는 미쓰나가(光長) 글씨를 썼다.

    저자들은 "가문 문장이 있는 거울은 17세기 후반에 등장하며, 18세기 이후에는 문장 대신 벽사나 길상의 뜻이 담긴 글자로 장식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소재하는 '미쓰나가'명은 '후지와라 미쓰나가'(藤原光永)명만 알려졌으며, 일본에 1706년 작품이 있고 1862년까지 세습해 사용한 것으로 전한다고 설명했다.

    저자들은 이처럼 18세기 왕실 무덤에 중국제 자기와 일본제 물품이 부장된 데 대해 "청과 왜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자 조선이 탄력적이고 유연한 수용 자세를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화협옹주 동생인 화유옹주 남편 황인점이 중국을 왕래한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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