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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얼룩진 '과거' 묻다…"올해엔 달라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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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에 얼룩진 '과거' 묻다…"올해엔 달라질까요?"

    • 2020-01-01 05:00

    [신년기획] 과거사법 통과 위해 싸우는 생존자들
    785일째 노숙농성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씨
    간척사업 강제노역 시킨 '서산개척단' 피해자 정영철씨
    '소년판 삼청교육대' 선감학원 피해 알린 김영배씨

    국가폭력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보상은 고사하고 아직 정확한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아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의 국회 통과가 해를 넘기면서 뼈아픈 역사의 진실 규명도 한 걸음 멀어졌다. 새해를 맞아 CBS노컷뉴스는 국가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었다.[편집자 주]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씨가 27일 서울 국회 정문 앞 형제복지원 노숙 농성장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이한형 기자)

     

    ◇"2020년에는 집에 돌아갔으면"…농성 785일차 형제복지원 생존자 최승우씨

    1월 1일자로 '785일째'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50)씨. 지난 27일 취재진과 만난 그는 새해 바람을 묻자 "과거사법이 통과돼서 내년에는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최씨는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국회 정문 앞 1평 남짓한 텐트에 또 다른 피해 생존자인 한종선씨와 2년 넘게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그는 입법 촉구를 위해 수차례 국회를 찾았다. 그는 개정안의 법사위 통과가 좌초되자 고공 단식농성을 벌였고 실성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1987년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있었던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부랑인 임시 보호소였다. 당시 정부는 '내무부 훈령 410'에 따라 일정한 거주지나 직업 없이 돌아다니는 이들을 보호하고 선도한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형제복지원으로 강제로 끌어들였다.

    1982년 중학교 1학년이던 최씨는 학교에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개금파출소 앞에서 경찰관을 마주쳤다. 경찰은 최씨를 불러세우며 가방 안을 뒤지고는 "빵을 어디서 훔쳤냐"며 다짜고짜 심문했다. 할머니와 함께 살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최씨는 학교에서 준 무료 급식을 받아둔 것이라고 답했지만, 경찰은 최씨를 고문했다. 두려움에 떤 최씨는 훔쳤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 뒤 '선도원'이라고 적힌 완장을 찬 형제복지원 관계자들이 최씨를 끌고 갔다.

    형제복지원 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폭력과 성폭력, 살인이 난무했다. 최씨는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돈"이었다고 회고했다. 갓난아이부터 유아, 청소년, 성인들까지 복지원에 갇혔다. 직원들은 수용자의 정신질환 여부를 임의로 판단해 정신병동에 입원시켰다. "사람 죽은 걸 봤다"는 게 피해 생존자들 대부분의 증언이라고 최씨는 전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씨가 27일 서울 국회 정문 앞 형제복지원 노숙 농성장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이한형 기자)

     

    ◇진상규명은 '깜깜이'지만…"짐승에서 사람이 되는 시간"

    최씨는 공권력이 저지른 폭력에 맞서 싸워온 그간의 시간을 '짐승에서 사람이 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랑아로 낙인 찍혔지만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초기에는 피해 보상에 초점을 맞춰 생각했지만, 중요한 건 '진상 규명'이라는 것을 차차 깨달았다"고 말했다.

    삭발, 1인 시위, 노숙농성, 단식. 최씨는 국회 앞에서 안 해본 게 없다며 웃어 보였다. 깊게 패인 눈가 위로 서글서글한 주름이 잡혔다. "많이 느끼고 깨달았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성탄절엔 한 가족이 "방송을 보고 찾아왔다, 힘내시라"며 먹을거리를 가져왔다고 최씨는 전했다.

    과거사법 개정안이 법사위에 계류돼 있는 상황 속에서도 최씨는 희망을 보고 있다. 그는 "내년에는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20대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두 손을 꼭 잡았다. 이어 "정부나 국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했으면 한다"며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당한 사람도 국민이다, 국가가 국가폭력의 진상을 밝히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산개척단 시사회 참석한 주민과 맹정호 서산시장(사진=연합뉴스)

     

    ◇“국가는 우리를 필요할 때만 쓰고 버렸다"…서산개척단 생존자 정영철씨

    과거사법에는 형제복지원 외에도 권위주의 시절 국가 폭력에 의해 피해 입은 여러 사건이 포함돼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서산개척단'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정부의 '사회명랑화사업'을 명분으로 충남 서산시에 전국의 부랑자와 고아, 윤락 여성 등을 납치해 간척사업을 하는 등 강제 노역을 시킨 대표적인 인권탄압 사건이다.

    19살 어린 나이에 자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해병대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개척단에 끌려간 정영철(77)씨는 당시를 "짐승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팬티 바람으로 열차에 실려 창문도 닫힌 채 끌려갔다. 야밤에 도착해 어디로 왔는지도 모르고, 몇 달을 살다가 지나가는 원주민에게 물어 그곳이 '서산'인 줄 알았다"며 "매일 개 패듯 패가면서 짐승같이 일을 시켰다"고 말했다.

    1961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청년과 부녀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와 대규모 개척 사업을 벌였다. 정씨는 "당시 포크레인도 없었고, 리어카 같은 기본 장비도 안 줬다. 순전히 삽과 등짐만으로 바다를 메꿀 흙과 바위를 옮겼다"고 말했다. 그렇게 61년부터 66년까지 1700명이 납치됐다. 이들은 새벽 6시부터 종일 폭행과 배고픔을 견뎌가며 강제노역을 했다. 폭행, 영양실조, 사고 등으로 죽은 사람들만 백여명이 넘는다.

    당시 정부는 "국유지였던 폐염전을 개간하면 그 땅을 모두 일군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땅이 개척되자 정부는 말을 바꿨다. 무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해 온 이들에게 '장기분할(20년) 저리 매각' 이라는 방식을 택한 것. 땅을 받은 이들은 민주화 이후 무상분배를 요구하며 정부에 여러 탄원과 법적 소송 등을 벌였지만 모두 패소했다.

    정씨는 "땅은 이미 빼앗겼다고 보고, 우리도 이제 땅 달라는 소리는 안 한다. 대신 우리가 강제로 붙들려 와서 노동하고 억울한 부분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분개했다. 그는 "우리는 정부의 홍보물이었다. 국가는 우리를 필요할 때만 쓰고 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강제로 합동결혼식 시킨 뒤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태조사가 진행 중이다.

    정씨는 진실규명을 위해서 하루빨리 과거사법이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회에서 선거법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등에 밀려 과거사법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에 대해 "정작 서민들과는 큰 상관없는 법들로 싸우고 있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정씨는 새해엔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이라 희망했다. 그는 "국회가 빨리 정상화 되면 새해에는 좀 발전이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며 "어찌됐든 해결은 결국 의원님들 손에 달렸다. 망치만 치면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을 텐데, 만약 망치 들기가 무겁다면 우리가 가서 들어주겠다"며 웃어 보였다.

    1943년 11월 선감학원 야외교육 장면(사진=연합뉴스)

     

    ◇"끌려 온 사람 중 13세 미만이 72%"…소년판 삼청교육대 선감학원 생존자 김영배씨

    '소년판 삼청교육대'라고 불리는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운영돼 온 소년 수용소다. 1942년부터 1982년까지 40년 동안 운영되며 수천명의 소년들이 강제로 끌려와 강제노역과 폭력에 시달렸다.

    이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피해자 김영배(65)씨는 "명백한 납치였다. 어린아이들이 울고 불며 집에 보내달라고 그러는데도 막무가내로 수용시켰다"면서 "공무원들에게 일인당 몇명씩 잡으라고 명령이 내려왔던 것 같다. 공무원들 실적의 재물이 됐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9살이던 1963년 서울역 앞에서 서성이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혀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옮겨진 뒤 선감학원으로 이송됐다. 그는 "거기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배고픔이었다. 워낙 1인 식사량이 적고 부실했다. 강냉이밥 먹은 기억 밖에 없다"고 말했다.

    끌려 온 소년들은 그곳에서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며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주변을 잘 못 믿고 항상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김씨는 "아동 시기 부모 밑에서 인격을 쌓는다거나 가족간의 사랑을 나누고 그런 과정이 없었다. 남의 것을 뺏어먹지 않으면 자기가 당하는 그런 어린 시절을 지내다보니까 지금도 그때 생각에 머물러 있는 친구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주변에는 몇마디 얘기해보면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주먹이 먼저 나간다거나 하는 그런 불안감이 늘 존재한다"며 "국가가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이 이들의 어린 시절을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감학원사건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을 맡은 김씨는 현재 생업까지 관둔 채 진상규명에 몰두하고 있다. 올해 6월 운영하던 사업체의 폐업신고까지 마쳤다는 김씨는 "생업과 진상규명을 병행하는게 너무 힘들었다. 최근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김씨에게 2019년은 특별한 한해였다. 과거사법 통과를 위해 1년 동안 동분서주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사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지난해 모든 것을 다 퍼부었는데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며 "어린아이의 인권을 이렇게 유린했다는 게 국가적으로 부끄러운 일 아니냐. 국회의원들이 이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김씨는 "새해에는 희망이 아예 없는 것 아니다"며 각오를 다졌다. 그는 "선감학원 사건이 사회에 알려진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늘 어제보단 오늘이 낫다"며 "연대해주고 고통을 나누려고 관심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아 희망이 있다. 하루 속히 과거사법이 통과돼 많은 이들의 아픈 가슴이 위로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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