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노컷뉴스 사옥에서 배우 최성은이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마동석, 박정민, 정해인, 염정아…까지는 알겠는데 저 빨간 머리는 누구지?' 지난달 18일 개봉한 영화 '시동'(감독 최정열) 포스터를 보고 든 생각이다. 힌트는 권투 장갑을 메고 있거나, 권투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커다란 검은색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터라 수수께끼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빨간 머리'가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이라는 걸 알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자칫하면 겉멋 들어 보일 수 있는 가출 청소년 소경주를 안정적으로 연기한 이 배우는 누굴까. 한예종 연기과 출신인 최성은이다. '시동' 이전 작품은 연극 '피와 씨앗'(2018)뿐이다. 더더욱 궁금해졌다.
2019년의 끝자락이었던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 노컷뉴스 사옥에서 배우 최성은을 만났다. 한 번 보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 빨간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누가 날 건드리면 가만있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보여주는 듯한 눈빛의 소경주와는 또 다른 얼굴과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 복싱 테스트까지, 두 달 가까운 오디션 끝에 '시동' 합류최성은은 '시동'의 많은 것에 마음을 뺏겼다. 우선 시나리오가 재미있었다. 자신이 도전하고 싶은 역할에 끌렸고, 같이 해 보고 싶은 배우들이 이미 캐스팅되어 있었다. 최성은은 "무엇보다 경주라는 역할이 되게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너무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제가 (박)정민 선배님의 팬인데 이미 캐스팅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동석 선배님도 그렇고 같이 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1차 오디션은 다른 영화와 비슷했다. 최정열 감독과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 독특한 점은 복싱 테스트가 있었다는 점이다. 극중 경주는 복싱을 잘하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복싱을 연기로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자연히 오디션 기간은 길어졌다.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확답을 받기까지 두 달 가까이 걸렸다.
최성은은 "사실 너무 하고 싶었던 역할이지만 정말 계속 (오디션을) 거듭하면 할수록 시간이 걸리니까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과연 내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쨌든 복싱 테스트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을 때 일단 너무 감사했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18일 개봉한 영화 '시동'. 최성은은 포스터에서 미스터리한 빨간 머리로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외유내강 제공)
최성은은 최 감독이 얼굴을 보고 합격 소식을 전했다는 점에 감격했다고 전했다. 전화나 문자 등의 연락을 받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최성은은 "얼굴 보고 같이하자고 얘기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근데 제가 좋은 걸 티 내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감독님이 좋은 거 맞냐, 진짜 좋은 거 맞냐고 물어보시더라"라며 웃었다.
◇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자꾸 노출되는 소녀, 경주영화에서는 전사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웹툰 속 경주의 사정은 좀 더 복잡했다. 가출 청소년이라는 처지는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 원인이 새아버지의 폭력이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새아버지가 복싱을 하는 체육관 관장이라는 점도 나타나지 않는다. 최성은은 이런 경주를 '버팀목이 없어서 자기가 자신을 지켜야 하는 사람'으로 바라봤다.
"의지할 가족도 없고 주변에 친구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상태에요. 딱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 없이 커왔던 친구,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친구여서 남들한테 약해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제일 컸죠. 자기가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계속 노출돼요. 강해지기 위해서 혼자서 노력해 왔던 친구인 것 같아요. 남들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복싱을 시작했고요. 남들과 가까워질 때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속은 되게 여리고 상처가 많아서 그렇게 (거리를 두는) 행동할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부분에 되게 매력을 많이 느꼈고, 관객들이 봐도 이 인물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경주는 흔히 그려지는 가출 청소년처럼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지는 않는다. 돈을 아끼려고 방을 같이 잡은 이들에게도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선 자기 생각을 말하고, 추근대거나 폭력을 행사하려는 남성에게 지지 않고 맞선다. 첫인상이 나쁜 채로 만났으나 자꾸만 마주치게 되는 택일(박정민 분)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극중 택일과 경주는 어떤 사이였던 것 같냐고 묻자, 최성은은 "택일이가 경주를 보면서 느끼는 것, 경주가 택일이를 보면서 느끼는 게 있다고 봤다.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과정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최성은은 '시동'에서 자기 힘으로 자신을 지켜나가려는 가출 청소년 소경주 역을 연기했다. 새빨간 짧은 머리가 인상적이다. (사진=외유내강 제공)
이어, "경주 입장에서 보면 경주는 항상 남자에게 조금 경계심이 있다. 택일이와 악연처럼 맺어지다가 택일이가 처음 봤을 때만큼 그렇게 나쁜 친구가 아니라는 걸 점점 알게 된다. 나와 같은 아픔이 있고, 택일이도 경주처럼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좋아도 좋다고 안 하고 약간 돌려서 하는 걸 보며 자기(경주)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라고 부연했다.
최성은은 "둘 다 제대로 된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한 친구들이다 보니까, 거기서 또 동질감이 있다. 택일이가 경주를 계속 도와주고 챙겨주려고 하는 마음을 경주도 분명히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성숙해지는 시기에 서로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경주는 장풍반점에서 일하면서 피 섞이지 않은 관계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믿을 수 있는 어른들도 만난다. 일을 하며, 학교에 다닌다. 어려움이 닥친 친구를 돕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동'을 소경주의 성장담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에 교복 입고 나온 건 성장이라기보다는… (경주는 청소년이니까) 부모가 아니어도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경주한테는 그런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꿋꿋이, 묵묵히 살아오다가 장풍반점에서 일하게 되면서 정말 처음으로 경주한테도 가족 같은 사람들이 생긴 거죠. 경주가 어떤 성장을 했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마음의 벽을 허물어간다고 봤어요. 그것도 하나의 성장이라면 성장일 수 있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흐름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 처음 하는 액션 연기 소감최성은은 오디션 때부터 복싱을 배웠다. 영화 촬영에 들어가면서는 복싱 기술과 영화적 액션을 결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최성은은 "(소경주는) 복싱을 한 친구이기 때문에 뭔갈 하더라도 복싱 동작을 이용해서 때릴 텐데, (그래서 실제) 복싱 동작보다는 좀 더 크게 하고 약간의 멋을 내야 했다"라며 "저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남자분들이랑 붙는 씬이 많다 보니까 합을 맞춰야 했다. 제가 신경 쓸 지점이 많아서, 확실히 액션 씬을 찍으면서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그런 그에게 힘이 된 건 함께한 배우들이었다. 특히 가장 붙는 씬이 많았던 박정민이 그랬다. 최성은은 "저랑 같이 호흡 맞추는 선배님들이 '너 편한 대로 해라. 잘 받아주겠다'라고 하셨다. 정민 선배가 너무 잘 받아주시는 거다. (저는) 처음이니까 힘이 들어갈 때가 있었다. 실제로 힘주고 때릴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막 괜찮다고, 편하게 하라고 그러셨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민 선배님은 실제로 몸을 잘 쓰시고 복싱도 하셔서 저에게 도움을 많이 주셨다. 맞는 호흡을 잘해주셔서 제가 때리는 게 어설프더라도 액션 씬들이 잘 살았던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계속>
배우 최성은 (사진=황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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