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남산의 부장들' 곽상천 역을 맡은 배우 이희준을 만났다. (사진=쇼박스 제공)
※ 영화 '남산의 부장들' 내용이 나옵니다.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오랜 시간 긴장감을 유지하며 나아가는 영화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를 소재로 하기에, 어쩌면 '역사가 스포일러'일 수 있지만 영화에서 김빠지는 순간을 찾기 힘들다. 다 보고 나면 물을 마시고 싶어질 정도로 입이 마른다.
영화 개봉을 6일 앞둔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남산의 부장들' 곽상천 역을 연기한 배우 이희준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영화를 본 소감을 묻자 그는 처음에는 아주 차갑다고 느꼈고, 두 번째 봤을 때는 소름 끼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그 순간에 언제 총을 쏠지 아는데도 긴장되더라"라며 그 공을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에 돌렸다.
◇ 읊조리는 대사까지 대본에 있었다이희준은 언론 시사회 당시 "배우들의 숨 막히는 연기,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근거 있는 자부심이었다. 모두가 다 아는 그 결말로 달려가는데,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희준은 '남산의 부장들'을 처음 봤을 때와 두 번째 봤을 때 느낌이 다르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차갑다고 생각했고, 두 번 볼 때는 소름이 끼쳤다고. 더 파고들 수 있는데 그렇게 가지 않고 절제한 것에서 차가움을 느꼈다는 게 이희준의 설명이다.
"병헌이 형(김규평 역)이 도청하는 날 클로즈업 확 들어갔을 때 너무 좋은 거예요. 음악도 나오고 그 인물의 심리도 공감할 수 있잖아요. 이걸 좀 더 보고 싶은데 갑자기 화면이 확 밝아지죠. 우리가 으레 보던 영화라고 치면 혁명의 순간들, 한강 다리를 건너는 씬 이런 게 한 번 있을 법하죠. 젊은 시절 없이 아주 절제돼 있어서 되게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제 두 번째 딱 보고 되게 소름 끼쳤어요. 이게 되게 의도된 것 같아서요. 더 깊게 못 들어가게 효과를 주신 것 같기도 하고요."
10·26 사태라는 정치적인 사건을 다뤄 출연하기까지 부담감이 작용하진 않았냐는 질문에 이희준은 "부담감도 있긴 했지만 그래서 '왜 그랬을까'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나는 배우로서 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을까. 감독님도 믿었다. 감독님이 편협된 시각으로 가지 않고 끝까지 잘 유지하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남산의 부장들' 엔딩 크레디트에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최후 변론 육성과 언론 보도가 나온다. 이희준은 이를 두고 "이 두 가지는 팩트고 나온 사실이다. 나머지는 관객들에게 맡기는 의도가 느껴져서 좋았다. 차갑게 연출하고 편집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라며 "저희도 일체의 애드리브를 못 했다. 저도 애드리브를 하면서 유연하게 하려고 애쓰는 배우인데 그냥 읊조리는 말까지도 다 대본에 있었고, 욕하는 장면도 정확하게 지켜서 했다"라고 전했다.
이희준은 대통령 경호실장이자 각하를 국가로 여기는 신념에 찬 곽상천 역할을 맡아 이병헌이 연기한 김규평과 충성 경쟁을 벌인다. 두 번째 사진 오른쪽은 전두혁 역을 연기한 배우 서현우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젬스톤픽처스 제공)
"역사적 사실이 있긴 하지만 거기에 뭘 막 새로운 상상으로 장면을 삽입하지 않고, 딱 그 40일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카메라 렌즈를 슥 들이밀어서 확대해 본 느낌? 그렇다고 또 막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마지막에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사실 이 시기, 지금의 우리, 편협할 수도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선으로 줄타기를 하신 게 아닌가 싶고요.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줄타기요. '난 이렇게 생각해' 하고 편하게 연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고 아주 신중하게 예리한 줄타기를 하신 느낌이라 정말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가장 긴장하면서 본 장면은 역시 김규평의 박통(이성민 분) 저격 장면이었다. 이희준은 "마지막 그 순간에 언제 총을 쏠지 아는데도 긴장되더라. 그건 진짜 배우들의 연기(덕)가 아닌가. 옆에서 계속 기분 나쁘게 깐죽깐죽하는 제 대사도 그렇고, 재미있었다. 좋더라"라고 밝혔다.
◇ 감탄 나왔던 배우들의 연기이희준은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다른 배우들이 연기한 어떤 장면이 좋았다고 말했다. 특히 김규평, 박통 역을 맡은 이병헌과 이성민의 연기를 보고 감탄했다고. 이희준은 "박통 캐릭터가 설명이 없다. 연결도 안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40일 동안 고뇌와 스트레스로 확 지치고 늙어가는 모습이 보이더라. '와, 저건 어떻게 하는 거지?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하고 깜짝 놀랐다. 병헌이 형은 심리적 갈등이 섬세하게 묘사가 잘된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저도 (선배들에게 그런 걸) 배우고 싶고 다 빨아들이고 싶지만 소화가 안 될 것 같다. 제 건 따로 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전두환 씨를 모티프로 한 전두혁 장군 역의 서현우를 두고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예종 동문인 두 사람은 졸업 후 같은 작품을 한 건 '남산의 부장들'이 처음이다. 이희준은 "좀 놀랐다. (전두혁은) 대사가 '예~' 이것밖에 없어서. 그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고민을 많이 했구나 싶었다. 마지막에 대통령 자리를 탁 쳐다볼 때 저는 섬뜩했다. 멋있게 쳐다봐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보면 표현이 안 될 텐데"라며 "무서웠다. 잘한다. 좋은 배우인 것 같다"라고 밝혔다.
"텐션이 있었죠. 애드리브도 안 하려고 애썼고. 그게 아주 좀 표현하긴 힘든데 되게 재밌었어요. 서로 (긴장된) 공기가 생기니까요. 배우들은 그럴 때 되게 긴장하지만 지치지는 않아요. 그게 마약 같은 거죠. 그런 극적인 상황 속 긴장감이 되게 짜릿해요. 특히 병헌 선배님하고 멱살 잡고 할 때, 선배님이 나한테 막 얘기하고 할 때 서로 리액션하는 순간들이 되게 재밌었어요. 어차피 이 캐릭터들은 각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갈등들을 연기하는 거라, 재밌죠. 그래서 중독 같아요. 평화로운 일상 말고 얼른 갈등이 있는 극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게 배우들이 계속 작품을 하려는 이유인 것 같아요."
이희준은 "곽상천을 봤을 때 '저 사람도 사실은 믿고 있었던 것뿐이잖아?' 하면서 제 캐릭터도 이해는 간다고 (관객들이) 생각하신다면 저로서는 되게 큰 소득인 것 같다. 막 웃으며 '아이 참~' 하다가도 '저럴 수도 있겠네' 하면 좋을 것 같다"라고 전했다.
이희준은 '마약왕'을 함께하며 우민호 감독에게 '남산의 부장들'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좋은 선배 배우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어서 작품을 선택하게 됐다고 전했다. (사진=쇼박스 제공, 이한형 기자/노컷뉴스 자료사진)
"여러 세대가 보고 대화 나누기에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명절에.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지만 그런 대화들(이 이루어지는 게) 그것도 영화의 기능이니까요. 요즘 특히나 세대 간의 대화가 더 없어졌잖아요. 저도 메이크업해 주는 20대 스태프한테 물어봤어요. 너무 궁금했거든요. 어떻게 봤는지. 좋아하더라고요.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몰랐고 마지막 장면에 대해 들은 것만 있는데도, 왜 이렇게 계속 긴장되고 손이 저린지 모르겠다고, 재미있게 봤다고 하더라고요. 네 인물의 심리를 충분히 따라가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인 것 같아요."
◇ 작품을 마칠 때마다 넓어지는 이해의 폭'남산의 부장들'은 이희준 본인에게도 매우 뜻깊은 작품이다. 그는 "이 대본을 처음 접했을 때는 '야~ 이런 캐릭터가 어딨어? 세상에!' 싶다가도 준비를 열심히 해서 끝나고 나니, 자신을 100%, 120% 믿는 사람, 신념이 아주 강한 사람들을 보는 제 시선이 좀 달라졌다. 이게 배우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운을 뗐다.
"'남산의 부장들'을 안 했다면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을) 일상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아요. 사람이 저렇게 생각하고 저런 경험을 하면 저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 싶은 거죠. 저게 틀렸다고 누가 얘기할 수 있지? 어떤 건 완전히 틀렸고 다른 게 맞다고 누가 얘기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희준 입장에선 물론 쉽지 않겠지만, '남산의 부장들'을 작업한 배우로서는 절대 굽힐 수 없는 120% 신념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하고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전엔 말도 안 섞었다면요. (웃음)"
살을 25㎏ 찌우는 건 결심부터 쉽지 않았지만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 나가기도 했다. 5~6년 정도 꾸준히 한 108배가 도움이 됐다. 체형이 확연히 달라지고, 배가 나올 거라는 생각에 토할 것 같은 기분과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나와도 된다. 배 나오면 어때?' 하는 생각으로 108배를 했다. 이희준은 이렇게 스스로를 토닥이는 행위가 배우에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극적인 상황을 겪고 공감하는 것이 연기라서 가짜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린 그 영화에서 사는 거다. 이성민 선배님의 40일 만에 확 늙어버린 표정, 그건 분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순간적으로 그 캐릭터로 갈등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다. 이런 걸 끝내고 바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건 진짜 기계다, 기계. 그럴 때마다 애쓴 스스로를 토닥여줘야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일상은 우리가 찍는 영화보다 훨씬 고요한데, 그걸 받아들이기 쉽지 않더라. 저는 그래서 늘 저를 위해 수행한다. 제 일상을 위해"라고 설명했다.
성공적인 증량 후 다시 살을 빼려고 헬스장 앞 고시원 생활을 자처했을 때, 그동안 배우 이희준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되었다고도 털어놨다. 대구 출신인 그는 연기하겠다는 방향을 정하고 서울에 와서 고시원 생활을 했다. 30만 원 중 월세 15만 원을 빼면 남는 건 15만 원. 신라면 하나로 아침저녁을 해결하던 시기였다.
이희준은 "갑자기 그 찰나가 떠올랐다. 닭가슴살을 먹는데 (과거의) 그 시간이 지나가더라. 내가 진짜 운이 좋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 선생님을 만났고 이 선배를 만났을까. 사실 다 고마운 사람밖에 없다. 내가 한예종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전부 그 사람들 덕택에 내가 지금 여기서 다시 닭가슴살을 먹고 있구나, 하는 게 필름처럼 지나가서 울었다"라고 전했다.
인터뷰 후반, '남산의 부장들'의 흥행을 어떻게 예측하느냐는 질문에 이희준은 "제가 '몇백만이야' 하고 맞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감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너는 대본을 고르는 기준을 모르겠다'는 말도 듣는다"라고 답했다. 이희준은 "저는 정말 그 순간에 대본을 봤을 때 '와, 너무 재밌겠는데?' 하고 심장이 막 뛰고 흥분되는 걸 고른다"라며 "내가 재미있고 하면서 신나야 보는 사람도 신나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그 기준으로 선택받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22일 개봉했고, 영화 '보고타'와 드라마 '키마이라'가 차기작으로 기다리고 있다. <끝>
배우 이희준 (사진=쇼박스 제공)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