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남산의 부장들' 김규평 역 배우 이병헌을 만났다. (사진=쇼박스 제공)
※ 영화 '남산의 부장들' 내용이 나옵니다.
김재규. 민주화의 시작을 알린 투사. 혹은 신실히 모셨던 1인자를 저격한 배신자. 이처럼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저격당한 인물도 만만치 않다. 1979년까지 18년 동안 독재자로 군림한 박정희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신화'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인물을 주인공으로 해, '10·26 사태'(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를 다룬 영화, 제작진도 배우들도 선택이 쉽지만은 않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22일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에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 역을 연기한 이병헌 역시 고민했다. 다만 그가 주목한 것은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아니었다. '이미 너무 알려진 사건을 영화화한다고 해서 그게 뭐가 그렇게 매력이 클까'라고 생각했고, 박통(이성민 분)을 둘러싼 2인자들의 치열한 수 싸움과 심리에 카메라를 들이댄 점에 끌려 출연을 결심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남산의 부장들' 배우 이병헌의 라운드 인터뷰가 열렸다. 그는 만약 '남산의 부장들'이 누군가를 영웅화하거나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려는 영화였다면 아마 고사했을 거라고 말했다. 본인을 포함해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가장 경계했던 것도 역사나 실존 인물을 왜곡하는 것이었다고.
◇ 가장 피하려고 했던 건 '왜곡'이병헌은 '남산의 부장들'에 들어가면서 책 네 권을 받았다. 전체적인 배경과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였다. 언론 시사회 때 밝혔듯 "실제 존재한 사건과 인물을 연기하는 건 훨씬 더 힘든 작업"이었다. '광해'와 '남한산성'에서도 역사 속 인물을 연기했으나 '남산의 부장들'은 달랐다. 이병헌은 "정말 이건 한두 다리 정도만 건너면 그때 생활했던 분들과 전화 통화를 하거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근현대사이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병헌은 "처음 제안받았을 때 드라마를 보고 고민스럽기도 했지만, 이 캐릭터의 심리를 '아, 정말 내가 표현하고 싶다', '이걸 내가 하고 싶다'라는 그저, 배우로서의 판단으로 결정했다. 저는 이야기의 힘, 어떤 아주 예민하고 디테일한 심리 묘사와 감정을 (표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만약 이 시나리오가 되게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려고 하고, 또 누군가를 영웅화시키는 그런 이야기였다면 저는 고사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사건을 굉장히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가졌던 감정과 서로 간의 관계와 심리는 과연 어땠을까, 하는 드라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전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부연했다.
지난 22일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제2의 권력자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이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사건을 벌이기 전 40일 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젬스톤픽처스 제공)
그는 "우리는 어쨌건 상업영화를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이미 너무 알려진 사건을 영화화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뭐가 그렇게 매력이 클까 생각했다"라며 "그 사람들의 감정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이걸(10·26 사태) 주제로 만들었던 다른 드라마와 영화와는 다른 부분"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인 해석을 풍부하게 해 배우로서 '마음껏 뛰노는 것'보다는, 왜곡을 피하고자 절제하고 또 절제해야 했다. 이병헌은 "그런 지점이 가장 힘들었다. 사실적인 부분을 왜곡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촬영 현장에서 감독님도 그렇고 힘들게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맞았을까?' 하고"라고 전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서 더 조심스러웠다. "내가 보고 겪은 거였다면 자신감이 있었겠지만, 자료와 증언만으로 어떤 실존 인물을 (캐릭터로) 형성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웠다"라는 이병헌에게, 이번 김규평 역할 역시 전혀 어색함 없이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질 것 같다고 하자 "(제가 연기를) 오래 해서 그런 것 같다"라며 하하하 웃었다.
"아까 '나만의 색깔'을 말씀하셨는데, 픽션 영화에는 작가가 창조한 것 외에도 내가 나름대로 창조하는 것도 있고 자유롭게 그 안에서 노는 재미가 있어요. 이번 영화 같은 경우에는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근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이기도 했고 실존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생각과 혹은 애드리브라든가 감정의 선이라든가 이런 건… '내가 막 자유롭게 놀았다'라는 느낌이 들 만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반대로 틀에 너무 갇혀서 그 안에서 꼭 그걸 해야만 하는, 나를 설득시키고 나와 타협해야 하는 성격이 가장 강한 작품이었죠. 아무래도 왜곡되지 않기 위해서."
◇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로 남겨둘 것김규평은 헌법 위에 있는 권력 박통을 지근거리에서 지킨 2인자다. 각 부처 수뇌부들이 모인 회의가 끝나고도 박통이 따로 불러 독대할 만큼. 하지만 '남산의 부장들'은 그런 호시절은 약간만 보여주고, 점차 박통과 멀어지는 김규평의 처지에 카메라를 댄다. 그가 보필하는 박통, 박통 곁에서 새로운 2인자로 치고 올라오려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분)과의 관계는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중요한 요소다.
우선, 이병헌은 박통을 향한 김규평의 태도를 '존경'이라고 봤다. 여러 가지 자료와 증언을 종합해서 본 결과 느낀 점은 그랬다. 이병헌은 "존경과 충성이 기본이다. 곽 실장이 (박통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는 캐릭터였다면, (김규평은) 자기감정을 꾹꾹 누르고 자제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해야 할 말을 하는 캐릭터로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곽 실장과 김 부장, 1인자(박통) 세 사람의 관계는 아주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직장에서 흔히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을 대입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런 충성 경쟁이 생경해 보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직장 생활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런 면에서 많이 공감할 감정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존경과 충성의 감정에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영화 속 박통은 김규평의 '확실한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김규평이 무안하거나 모욕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방관자처럼 있다. 그럴 때 김규평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병헌이 맡은 김규평은 1979년 독재정권의 말기를 누리는 박통(이성민 분)의 곁을 지키는 권력의 2인자이자 중앙정보부장이다. 언제나 박통에게 충성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선 박통의 행보를 우려하고 있는 인물로, 충성심과 본심 사이에서 흔들린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젬스톤픽처스 제공)
이병헌은 "그건 감독님 생각을 듣는 게 더 맞을 것 같지만, 용인술(사람을 쓰는 방법)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느낌으로 전 시나리오를 읽었다"라며 "(지난) 17~18년 세월을 다 보여준다면 우리가 그런 감정도 안타까워하며 보겠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변해있는' 지점을 아주 극대화해 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게 더 부각돼서 보이지 않았을까"라고 바라봤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우리가 예상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김규평이 박통을 저격하는 장면. 이 장면을 찍을 때 김규평을 연기한 이병헌은 어떤 감정이었는지 물었다. 그의 목표는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서도 관객들이 확실한 답을 얻기보다 알쏭달쏭한 상태로 남는 것이었다. 대의를 위해 그런 건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었는지 추론하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둔다는 의미다.
이병헌은 "그렇게 그냥 미스터리하게 남는다는 것이 목표였다. 연기할 땐 '사람이 어떤 한 가지, 아주 순수한 한 가지 이유로 행동하지 않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있는 상태에서 누가 날 찔렀을 때, 머릿속에 있던 것이 튀어나올 수 있다고 봤다"라고 설명했다.
김규평은 박통을 쏘고 곽상천도 쏜다. '거사' 이후 방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방 안에 낭자한 피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진다. 엄청난 일을 벌인 주인공에게는 조금 모양 빠지는 장면일 수도 있다. 이 장면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카메라 워크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리허설할 때 카메라 워크만 반나절 연습했던 것 같아요. 이만큼 찍고 또 이어서 이만큼 찍고 행동을 맞췄죠. 행동이 (장면마다) 다르면 아무리 CG라도 (아귀가) 안 맞거든요. 최대한 맞춘 것들을 붙여야 해서 NG가 상당히 많이 났어요. 굉장히 힘주어서 찍어야 하는 장면이라 거의 하루는 리허설로 쓰고 며칠 동안 나눠서 그 장면을 촬영했어요. 피에 넘어지는 건 사실은 감독님하고 저하고 얘기해서 그 부분을 넣었던 거예요. 저는 그 장면에서 어떤 걸 주고 싶었냐면, 아주 패닉에 가까운 그 감정 상태를 쫙 힘있게 밀어붙이다가, 어떻게 생각하면 되게 주관적인 느낌으로 가다가 그 방의 광경을 순간적이지만 잠깐 객관적으로 살짝 느끼고 다시 정신없이 주관적인 감정으로 간다고 봤어요. 그런 순간이 있으면 더 영화적이고 드라마틱한 느낌이 있겠다는 생각이었죠. 그 설정이 근현대사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면, 영화로서는 더 풍요로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그렇게 주관과 객관이 왔다 갔다 하는 시점 하나가 차 안에서 피에 젖은 양말을 만지다가 내 손에 묻은 피를 보는 순간이었어요. (그때) 또 다른 감정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두 군데 정도가 맨 마지막 시퀀스에서 힘있게 쫙 주관적으로 자기 일을 처리하다가, 객관적으로 삭 빠졌다가 들어가는 순간이라고 봤어요."
리허설에만 오랜 시간을 들인 장면인 만큼, 배우로서도 버겁지 않았냐는 물음에 이병헌은 '액션 배우'라서 괜찮았다고 답해 웃음을 유발했다. 실내에서 찍어서 좀 나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과 육군본부 중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하던 김규평이 왜 육본으로 갔는지 생각해 봤냐는 물음에는 "그걸 우리가 역사적으로도 모르지 않나. 영화에서도 모르는 것"이라고 답했다.
"실존 인물 김 부장이 그날 그런 일을 했던 게 역사적으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죠. 정말 대의를 위했던 건지, 자기의 어떤 개인적인 욕심이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욱하는 성질 때문이었는지… 역사 안에서 미스터리라면, 영화 안에서도 미스터리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부분은 감독님하고 저하고 작품 들어가기 전부터 촬영하면서도 지키려고 했던 부분이에요." <계속>
배우 이병헌 (사진=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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