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개봉한 영화 '작은 빛'에는 밥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사진=영화사 낭 제공)23일 개봉한 영화 '작은 빛'(감독 조민재)에는 유난히 밥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주인공 진무(곽진무 분)가 엄마 숙녀(변중희 분) 집에 왔을 때 주로 하는 일은 밥 먹는 것과 잠을 자는 것이다. 누나 현(김현 분) 가족을 만나서도 밥을 먹고, 형 정도(신문성 분)와 만나서는 밥을 먹고 술을 먹는다. 식사가 워낙 일상적인 행위라는 점을 고려해도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 느낌이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작은 빛' 조민재 감독은 원래 '가족 영화에서 밥 먹는 건 최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해 의외의 웃음을 안겼다. 하지만 이내 왜 '밥 먹는 장면'이 잦았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서사가 없어야 했고,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면 안 돼서 택한 방법이었다.
밥 먹으면서 하는 대화는 배우에게 맡겼다. 카메라 밖에서 4~5개월 동안 밥 먹으면서 나눈 대화가 시나리오에 상당 부분 반영됐다. 이날 함께 만난 곽진무는 그동안 작품 하면서 이렇게까지 배우들이 자주 모인 적은 없었다며, 조민재 감독이 밑 작업을 치밀하게 해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 해체된 가족을 그린 이유뇌 수술을 받고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캠코더를 들고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하는 진무(곽진무 분). 원체 말수가 없어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그가,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가장 자주 하는 건 '밥 먹기'다. 유독 밥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하자, 조민재 감독은 "저도 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까, '가족 영화에서 밥 먹는 건 최악이다'라고 생각했다. 너무 관습적으로 밥 먹는 것 같아서 내 영화에선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라고 말해 웃음을 유발했다.
'작은 빛' 배우들은 대본을 같이 읽어보기 전부터 밥을 먹었다. 조 감독은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가장 빠르게 알 수 있는 게 밥을 먹을 때의 태도와 말할 때의 언어를 익히는 거라고 봤다. 테크닉적으로는, (영화의) 서사가 없어야 했다. 서사가 앞으로 나가면 안 됐다. 공간 안에서 맴돌아야 했다. 엄마 집, 누나 집, 형 집에서"라고 설명했다.
이어, "어떻게 맴돌까 하다가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하자' 했다. 그러다 보니 밥 먹고 설거지하는 행위가 메인이 되더라. 저희가 같이 밥을 4~5개월 먹었다. 그때 시나리오에서 배우들 대사 디벨롭을 많이 했다. (영화에 나온) 배우들 대사는 본인 입에서 나온 말이 많았다. 제가 직접 썼다기보다는"라고 말했다.
'작은 빛' 진무 역 배우 곽진무 (사진=이한형 기자)곽진무는 "사전에 배우들끼리 많이 모였다. 제가 영화 하면서 (이번처럼) 그렇게 많이 모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 과정에 같이 참여하는 분들이 불편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라며 "감독 태도가 치밀했던 것 같다. 시나리오 처음 받았을 때도 좋았지만, 배우들이 좀 더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각색했더라. 그래서 뭔가 디렉션을 많이 주지 않아도 연기자들이 호흡을 잘 맞춰갈 수 있었다. 밑 작업을 치밀하게 해나가는 게 (조 감독만의) 독특한 부분이라고 본다"라고 전했다.
조 감독은 "연출자가 세운 캐릭터가 있긴 한데, 배우들이 거기에 맞춘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배우들의 모습을 영화 안에 넣을 수 있을까 했다. 실재하는 저희 가족 모습과 똑같지는 않길 바랐다. (배우들이) 저희 가족을 흉내 내지 않길 바랐다"라고 부연했다.
배우에게 자유가 주어진 부분은 또 있었다. 캠코더를 찍는 장면이었다. 이때 찍는 사람은 찍히는 사람에게 사는 게 어떠냐고, 좋았던 때는 언제냐고 묻는다. 곽진무는 "거기(캠코더 장면)만큼은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자유를 얻은 장면"이라며 "제가 관습적인 걸 좋아하지 않는데 아주 본질적인 그런 질문이 나오더라. 카메라 들었을 때 거의 모두 그 얘기를 했던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흔히 말하는 '4인 정상 가족'이 아니라 '해체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이유를 묻자, 조 감독은 "왜 그런 것들이 (하나의) 경향으로 나올까. 당연하다고 본다. 저희가 아이일 때 IMF 경험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가족이 붕괴되는 걸 봤다. '4인 가족의 완벽함'이나 '이렇게 살아야 가족이다'라는 것에 반발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라고 답했다.
"사실 제가 영화라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 되게 외로워졌어요. 누구도 제 삶에 대해서 대변해주지 않는 거예요. 이혼하고 부모 없이 지내면 슬프고, 노동자면 슬프다? 미디어가 주는 학습 효과는 되게 큰데 아무도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 같아요. (가족 해체를 다루는 게) 경향이어서 그걸 따라간다기보다는, 그 경험을 이제는 더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봤어요. 굉장히 많은 미디어에서 다양한 영화가 나온다면, 거기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거죠."
조 감독은 "예전엔 굳이 가족을 안 만났다.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있었다. 온전한 가족도 아니었고 가정형편도 그렇게 좋지 않아서. 사오 년 만에 만난 형, 누나는 자기 공간을 이루고 있더라. 그 모습을 보니까 '가족'이란 작은 틀에 묶이는 게 아니라 각자 자신의 공간을 일구고 사는구나 싶더라. 그렇게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다. 가족이기 때문에 더 가까이 살아야 한다기보다는 서로에게 피해를 안 끼치는 게 중요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조민재 감독과 배우 곽진무의 '요즘 살이'왼쪽부터 '작은 빛' 진무 역 곽진무, 숙녀 역 변중희, 조민재 감독, 현 역 김현, 정도 역 신문성 (사진=시네마달 제공)극중 진무가 엄마에게 했던 질문을, 두 사람에게 했다. 요즘 사는 것 어떻냐고. 조 감독은 "여전히 힘들고 언제 좀 나아지나 싶다"라고 말했다. 반면 곽진무는 "저는 긍정적이라… 좋고, 좋다"라면서도 "고민이 있다면 먹고 사는 문제가 있다"라고 답했다.
곽진무는 '노동'이 자신에게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곽진무는 "먹고 생존한다는 게 본질적으로 중요하고, 연기할 때 제가 시기마다 연기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이유야 어쨌든 성장하거나 변화를 겪는 과정이 생기니까. 연기자가 일상적인 감정을 갖는 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기자를 할 거면 평생 노동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노동하면서 얻는 감정과 관계들이 연기에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나중에 소득이 많이 생겨도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계속 노동할 것 같다"라고 밝혔다.
그럼 '작은 빛' 이후, 두 사람은 어떤 걸 찍고 어떤 걸 연기하고 싶을까. 조 감독은 "앞으로라고 하기에는, 영화를 언제 찍을지 몇 편이나 찍을지 모르겠다. 노동과 관련한 영화를 꼭 찍어야겠다는 마음은 있다. 제 몸으로 체득하고 버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곽진무는 "연기자는 일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성질의 직업이 아니라서, 지금 당장 어떤 희망 같은 걸 갖진 않는다. 최대한 이 일을 하기 위해 제가 가진 노력을 하는 건데, 선명하게 보이는 건 하나도 없다. 대신 항상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냥 지금처럼 영화(작업) 하기 위해서 영화를 많이 보는 정도"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작은 빛'을 볼 관객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했다. 조 감독은 "이 영화는 어려운 영화가 전혀 아니"라며 "영화 보시는 분들이 어려운 영화를 본다는 생각보다 잘 쉬다 가셨으면 좋겠다"라고 당부했다. 곽진무는 "조민재 감독의 탁월한 연출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지 않을까"라고 자부심을 보였다. '작은 빛'은 지난 23일 개봉해 현재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끝>
왼쪽부터 '작은 빛' 진무 역을 연기한 배우 곽진무, 연출을 맡은 조민재 감독. 두 사람을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이한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