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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눈물로 기도했고, 아빠는 기적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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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은 눈물로 기도했고, 아빠는 기적으로 답했다

    3쿠션 부녀 김병호-김보미, 프로 첫 우승 감격

    '보미야, 아빠가 해냈다' 김병호(가운데)가 28일 끝난 '웰컴저축은행 웰뱅 PBA 챔피언십' 결승에서 극적인 역전 우승을 확정한 뒤 울음을 터뜨린 딸 김보미(윗줄 오른쪽)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고양=PBA 투어)

     

    운명의 마지막 7세트. 1 대 7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가장 중요했던 초구를 놓친 데 이어 쉬운 공에 잇딴 실수가 겹쳤고, 속은 타들어갔다. 생애 첫 늦깎이 우승에 도전하는 47살 노장에게 스페인의 천재 선수의 벽은 높아보였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딸의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두 손을 모아 아버지의 승리를 간절히 바랐다. 딸의 기도가 통한 걸까. 쓰러져가던 아버지는 단숨에 10점을 몰아치며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냈다.

    이미 마지막 점수를 얻기도 전에 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위닝샷이 성공하자 딸은 울음이 폭발했고, 아버지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당구 부녀가 이뤄낸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의 기적이었다.

    '보미 아빠' 김병호(47)가 프로당구(PBA) 투어를 제패했다. 2012년 동호인에서 선수로 뛰기 시작해 지난해 프로에 데뷔한 이후 8년 만에 거둔 첫 우승이었다.

    김병호는 27일 경기도 소노캄 고양에서 열린 '웰컴저축은행 웰뱅 PBA 챔피언십' 결승에서 다비드 마르티네스(29)를 풀 세트 접전 끝에 4 대 3 (15-7, 8-15, 13-15, 15-8,15-6, 1-15, 11-7)로 눌렀다. 밤 10시 시작돼 자정을 훌쩍 넘긴 3시간 가까운 혈투 끝에 거둔 대역전승이었다.

    이날 승리로 김병호는 생애 첫 우승컵과 함께 상금 1억 원을 거머쥐었다. 지난해 11월 PBA 투어 5차전 우승자 마르티네스는 김병호의 돌풍에 PBA 투어 사상 첫 2승 문턱을 넘지 못했다. 상금 3400만 원에 만족해야 했다.

    '아빠, 멋져요' 김병호(오른쪽)가 28일 끝난 '웰컴저축은행 웰뱅 PBA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정상에 오른 뒤 딸 김보미와 함께 우승컵을 들어 포즈를 취하고 있다.(고양=PBA 투어)

     

    '보미 아빠'가 일으킨 무서운 돌풍이 우승으로까지 이어졌다. 김병호는 그동안 철저한 무명이었다. 선수들 사이에서 연습 벌레로 정평이 나 있지만 정작 전국대회 16강이 최고 성적일 만큼 실전에는 약했다. 트라아이웃을 거쳐 PBA에 입성하긴 했지만 6차전까지 랭킹 70위에 머물며 1부 잔류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오히려 김병호는 당구계에서 여자 3쿠션의 강자인 김보미(23)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김병호는 10년 가까이 자신보다는 딸의 선수 생활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해왔기 때문이다. 김보미는 이번 대회 LPBA 투어에서 4강에 오를 만큼 두각을 나타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김병호는 이번 대회에서 '보미 아빠'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 베트남 선수를 누르고 8강에 오른 김병호는 특히 4강전에서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프데레릭 쿠드롱(벨기에)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세계주니어선수권과 유럽선수권에서 주목을 받은 마르티네스마저 제압했다.

    결승은 그야말로 팽팽한 승부가 펼쳐졌다. 첫 세트를 따낸 김병호는 2, 3세트를 내주며 끌려갔지만 5, 6세트를 가져오며 우승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마르티네스의 반격도 거셌다. 6세트 첫 이닝에 무려 10점을 뽑아내며 승부를 3 대 3 원점으로 돌렸다.

    마지막 7세트. 김병호는 긴장한 듯 초구를 놓쳤다. 후구인 마르티네스는 1이닝에 4점을 몰아치는 등 3이닝까지 7 대 1로 달아나 쿠드롱도 하지 못한 PBA 2승째를 거두는 듯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천재보다 더 강했다.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병호는 4이닝째 환상적인 고난도 횡단샷을 펼치는 등 연속 9점을 뽑아내며 10 대 7 매치포인트를 먼저 맞았다. 이미 김보미는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결국 김병호는 침착하게 절묘한 뒤로 돌려치기로 3시간 가까운 접전의 대미를 장식했고, 축포와 함께 딸의 울음까지 터졌다.

    김병호가 우승을 확정하자 축포가 터지는 모습.(고양=PBA 투어)

     

    경기 후 김병호는 "어휴 정신이 하나도 없네"라면서 생애 첫 우승의 얼떨떨한 소감을 밝혔다. 이어 미리 적은 듯 손바닥을 보면서 "대회 타이틀 스폰서인 웰컴저축은행과 PBA 투어, 6년 동안 후원해준 김치빌리어드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전해 우승 경험이 없는 순진한 티(?)를 냈다.

    우승 원동력은 역시 아버지의 힘이었다. 김병호는 "보미에게 힘을 많이 받은 것 같다"면서 "7세트 상대가 너무 잘 쳐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보미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집중력이 확 살아났다"고 말했다. 이어 "축구 선수인 아들까지 자식을 위해 열심히 쳤다"면서 "보미야, 사랑해"라며 애정어린 인사를 잊지 않았다.

    현장에서 지켜본 딸의 마음도 벅찼다. 김보미는 "아버지가 1 대 7로 뒤지고 있을 때도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평소 너무 열심히 훈련하는 아빠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꼭 10점을 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10 대 7 역전을 이뤘을 때 이미 우승하는 모습이 상상이 됐다"면서 "그래서 눈물이 났고, 승리가 확정되자 울음이 확 터졌다"고 당시를 돌아보며 감동이 가시지 않는 듯 울먹거렸다.

    그동안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온 아버지의 고충을 알기 때문이다. 김보미는 "대구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당구를 시작했다"면서 "이후 아버지는 나의 선수 생활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했다.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대구를 떠나 둘이서만 2016년 상경한 것.

    그야말로 맹부삼천지교가 따로 없었다. 김병호는 당구장 매니저로 일하면서 딸을 지도했다. 김보미는 아마추어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하며 차세대 스타로 주목 받았고, 프로 무대에도 뛰어들었다. 김병호도 선수 등록을 했지만 딸이 우선이었다. 김병호는 "최근 일하던 당구장 매니저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생활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김보미는 "고등학생 남동생은 축구를 위해 강릉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엄마는 고향인 대구에 있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김병호가 딸보다 먼저 프로 무대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이다. 김병호는 "보미가 매일 '아빠는 우승도 못 했지?'라며 놀렸는데 이제 큰 소리를 좀 칠 수 있을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보미도 "아빠가 열심히 노력해 우승을 했는데 나도 자극을 받아 꼭 프로 첫 우승컵을 들어올리겠다"고 화답했다.

    하지만 그래도 선수보다 아버지의 마음이 더 강한가 보다. 김병호는 "(사람들이) 이제 선수 김병호로도 부르겠지만 아직까지 보미 아빠가 좋다"면서 "언제까지나 나는 내 자신보다는 딸을 더 응원할 것 같다"고 아빠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했던가. 남자는 강하지만 아빠는 더 강하다는 말도 성립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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