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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과 기일, 상반된 기억 관통하는 '전쟁'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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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과 기일, 상반된 기억 관통하는 '전쟁' 들여다보기

    [노컷 인터뷰]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감독 ①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감독이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사람들을 죽이던 남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아. 트라우마가 되어서, 수염 난 남자들이 생각날 때마다 무서워." (응우옌 티 탄)

    "어쩔 수 없이 작전을 하다 보니까 피해를 입었는데, 어느 나라거나 전쟁 땐 소수 양민이 조금 피해를 입을 수 있고…"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

    "사람이 다 죽고 울음소리가 그치면 병사들이 다른 곳에 갔어. 한국군은 집도 불태웠어. 죽인 다음 바로 태워버리니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됐어." (응우옌 럽)

    "아니야. 우린 안 죽였어. (…) 내가 살고자 상대를 죽인 건 나라의 부름을 받고 한 거지, 우리가 뭐 죽이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또 다른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

    베트남전이라는 하나의 사건은 누구에게 '말해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표현된다. 어떤 이에게는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하고 참혹한 일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큰 일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사소한 비극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일을 자랑스레 '기념'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기일'에 제삿상을 차린다.

    이길보라 감독이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이 같은 상반된 기억과 태도 때문이었다. 이길 감독의 할아버지는 베트남전에 나갔다가 고엽제 후유증을 앓아 고생했지만 '참전 용사'였던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이길 감독은 대학 진학 후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책과 문건을 통해 알게 됐다. 도무지 한 줄기로 엮이지 않는 각각의 기억에 의문이 생겼고, 여기서 작품이 출발했다.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카페에서 '기억의 전쟁'을 연출한 이길보라 감독을 만났다. 그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을 저마다의 위치에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했다고 밝혔다. 그 답은 아직 찾아가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베트남 참전 군인의 손녀인 이길 감독이 할아버지의 침묵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찾아간 베트남에서 듣게 된 50여 년 전 그날의 기억을 담은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에는 베트남인 증언자 응우옌 티 탄, 응우옌 럽, 딘 껌이 등장한다.

    탄은 베트남전 당시 퐁니 퐁넛 마을에서 살아남은 자이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관련 발언을 꾸준히 해 온 인물이어서 연이 닿았다. 시각장애인 럽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전쟁 2세대'라는 위치가 분명했다. 껌은 학살을 직접 봤다고 주장하는 농인(청각장애인)이다. 이길보라 감독은 농인 부모님과 오랜 시간 수어로 대화해 왔기에 껌과 좀 더 원활히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세 사람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길 감독은 "만나자마자 (카메라를) 들이댄 건 아니었다. 굉장히 천천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 같다. 제작진 모두 조심스럽게 관계를 형성하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작업을 시작한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매 기일에 맞춰 베트남을 찾았다. 촬영 허락을 받는 것뿐 아니라, 기일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제삿상에 올릴 음식을 사고, 함께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기억의 전쟁'에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증언한 사람들. 맨 위부터 응우옌 티 탄, 응우옌 럽, 딘 껌 (사진=영화사 고래 제공) 확대이미지

     

    이길 감독 표현에 따르면 "정말 식구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탄 아주머니 막내딸이랑 제가 동갑이에요. 막내딸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린 '20대 여성'이라는 위치 덕에 관계의 거리를 더 좁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탄은) 40~60대 한국인 남성이 앞에 있으면 벌벌 떨고 말도 안 하시거든요."

    탄은 "우리 가족은 전부 여자와 어린아이였단 말이야"라며 "왜 죽인 거야? 난 혈혈단신으로 살아왔다고. 총을 들고 우리 가족을 죽인 그 사람들이 정말 증오스러워"라고 말한다. 껌은 5살일 때 한국군이 베트남 사람들을 모아 놓고 총으로 쏘는 것을 봤다고 증언한다. 어른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척을 했지만 아이들은 그러지 못해서 "다 죽어버렸다"라는 럽은 본인도 지뢰 폭발 사고로 맹인이 됐다.

    세 사람이 보고 듣고 경험한 전쟁은 참혹했지만, '참전 용사' 이길 감독 할아버지에게 전쟁이란 자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강원도에 있는 월남참전용사 만남의 장을 보면, 그 전쟁에서 '용맹하고 지혜로운 국군'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흔적이 보인다. 이길 감독은 "베트남에서 가족 잃은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국에 오니 '전쟁기념관'이라는 말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라며 "정말 상반된 기억이 분리돼 있다는 생각이 들어 놀라웠다"라고 밝혔다.

    역사적으로 외세 침략이 잦았고,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핍박을 받아온 만큼 한국은 '피해자' 입장에 서는 게 익숙하다. 그래서 '내가 가해자일 수도 있다'라는 인식에 다다르는 데도 힘겨워하는 건 아닐까. 이길 감독은 "확실히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게 정말 어려운 거 같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어서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니까"라며 "어떤 사람이 가해자만일 수도, 피해자만일 수도 없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시면 되게 어려 가지 기억이 나와요. 한국 시민사회의 기억, 베트남 내 박물관의 기억, 21세기를 사는 사람의 기억 등이요. 결국 이 영화를 통해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관객분들에게 던지고 싶었어요. 여러 가지 기억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고요."

    ◇ '공적 말하기'를 거듭해 온 사람의 변화

    '기억의 전쟁'은 지난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후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서 비프메세나상에 특별언급됐다. 영화제 때는 증언한 베트남인 세 사람을 비슷한 비중으로 살렸다면, 개봉판에서는 '탄 아주머니', 응우옌 티 탄이 중심에 섰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왜 그랬을까.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탄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관객들도 쉽게 알 수 있게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그날의 기억을 꺼내어 공개했고, '공적 말하기'를 거듭하면서 탄이라는 사람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길 감독은 "영화 중간부터 탄 아주머니가 주인공이 되어서 영화를 끌어가는데, 사실 촬영 시작했을 때만 해도 세 번이나 한국에 오실 줄은 저희도 몰랐다"라고 운을 뗐다.

    '기억의 전쟁' 스틸 (사진=영화사 고래 제공) 확대이미지

     

    애초 기획한 촬영은 다 마쳤다. 하지만 탄은 멈추지 않았다. 이길 감독은 "탄 아주머니가 (한국에) 간다고 하면서 '꼭 사과받고 싶다'고 했다. 인물이 변하고 있다는 걸 그때 느꼈다. 그전에는 이 주제로 얘기할 때 수동적인 태도로 대답하곤 했는데, 증언을 여러 차례 하고 한국에 다녀오면서 인물이 변하더라"라고 말했다. 제작진은 추가 촬영을 결심했고, 그 덕에 2018년 4월 열린 '한국군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참석 장면도 같이 넣을 수 있었다.

    "그 사람(탄)이 주인공임을 영화 앞에서부터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전 편집본에서는 완전히 독보적인 캐릭터는 아니었거든요. 이번에는 탄 아주머니가 주인공이다 보니까,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라는 걸 관객들도 유추할 수 있게 오프닝을 그렇게 했죠."

    '기억의 전쟁'에는 시민평화법정 때까지만 담겼지만, 탄의 활동은 진행형이다. 지난해에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103명에게 받은 청원을 제출하러 한국을 찾았다. 한국 정부가 진상 조사를 해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게 청원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으며, 사실 확인을 위해서는 베트남 당국과의 공동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나 여건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탄 아주머니가 그 답변을 듣고 너무너무 실망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라는 이길 감독은 현재 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공동 진상조사를 먼저 제안하기 어려운 처지라는 점을 먼저 언급했다. 한국과의 외교·정치·경제적 관계를 고려해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만큼,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이 벌어진 '과거'를 들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길 감독은 "베트남 사람들은 정말 너무 어렵게 용기 내서 청원했다. 청원할 수 있는 조건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서 설명하고 사인을 받은 것이고. (한국 정부는) 90일 넘긴 후에야 굉장히 미온적이고 실망스러운 답을 준 거다. '드디어 공식 사과를 받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탄 아주머니에게. 어떤 분들은 '이럴 거면 차라리 미군 손에 죽을 걸'이라고 하더라. (미군은) 사과도 하고 박물관, 병원, 학교 지어주는데 우리는 한국군에게 죽어서 다 잃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계속>

    지난달 27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부산국제영화제 공개 당시와 달리 개봉판에서는 응우옌 티 탄의 비중이 커졌다. 이길보라 감독은 촬영하면서, '공적 말하기'를 거듭한 탄의 변화를 체감했다고 말했다. (사진=시네마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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