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소련 정상이 만나 냉전 종식을 선언한 역사적인 몰타회담에서 남북 긴장완화 등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지 못한 이유가 불순한 기상 여건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외교부가 31일 비밀 보존기한 30년이 지나 공개한 외교문서(1577권, 24만여 쪽)에 따르면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89년 12월 2~3일 지중해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소 양측은 공동기자회견에서 동서가 냉전체제에서 새로운 협력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선언했고 그 여파는 공산권 붕괴와 독일 통일 등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세계를 양분했던 두 정상 간 만남인 만큼 회담 의제는 유럽과 중남미, 중동, 아시아 등 세계 이슈를 망라했고 한반도 문제도 빠지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회담 10여일 전인 11월 21일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문제와 일본 북방영토 문제를 협의할 용의가 있는지 묻는 질문에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비록 상호 입장이 크게 다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서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논의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같은 달 24일에는 미국 백악관 더글러스 팔 아시아담당 보좌관이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에게 "소련 대외정책의 '신사고(New Thinking) 적용 문제와 관련해 북한, 쿠바, 니카라과,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지역 등에서 구정책(Old Policy)이 잔존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맥락에서 부시 대통령이 먼저 한반도 문제를 거론토록 할 계획이나 고르바초프가 먼저 거론할 경우 이에 적절히 대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팔 보좌관은 또 "구체적으로 미측은 소련의 대북한 신예무기 공급, 북한의 핵기술 개발 징후와 관련, 긴장완화를 위한 소련의 구체적 협조를 촉구하고 아국의 북방정책과 한소관계 증진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표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주미대사관은 다만, 팔 보좌관이 "최근 동구(동유럽) 정세에 비춰 양국 정상이 동구 정세와 향후 미소관계에 대한 토의에 주력하게 될 것이므로 상기 실무 준비안과 같이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인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움"이라고 말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정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노태우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몰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를 적극 거론해줄 것을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편지에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안정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한으로 하여금 문호를 개방하고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나오도록 촉구함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직전 독일과 헝가리 등 순방에서 동·서독의 극적 사태 전개를 목도한 노 대통령은 "동·서독과 한반도는 여러가지로 차이점은 있지만 북한의 개방화를 위해서는 소련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보므로 이번 정상회담에서 소련의 적극적인 협조를 촉구하여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운하게도 한반도 문제는 정작 회담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이유는 날씨 탓이었다. 주미 대사관은 전문 보고에서 "몰타의 불순한 일기 관계로 12.2 예정된 2차 회담 및 만찬 기회를 상실하여(정상회담 예정 시간 중 3시간 단축) 지역 문제가 중남미, 중동문제,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해 국한해서 협의가 진행"됐다고 밝혔다.
날씨가 주요 변수가 된 이유는 회담 장소가 몰타 섬 자체가 아니라 인근에 정박한 양국 해군함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문제는 비중 있게 다뤄졌다. 이미 동독 붕괴 조짐이 뚜렷했던데다 소련 역시 수세에 몰린 가운데 냉전 종식의 역사적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던 상황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의 승자가 되길 희망했던 미국은 회담 전에 부시 대통령과 베이커 국무장관이 각각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한스 겐셔 외상과 각각 긴급통화를 갖고 사전 조율을 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도 '독일문제는 독일인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임을 확인했다.
결국 "냉전은 금세기 말까지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등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과 달리 통독 열차는 빠르게 질주했다.
결과적으로 불발됐지만, 몰타회담에선 미소 화해의 상징으로 2004년 올림픽을 베를린에서 개최하자는 공동제안이 나왔을 정도다.
한편 올해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우루과이라운드협상 △미국 무역통상법 Super 301조 협의 △재사할린동포 귀환 문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의 협의체제 수립 △동구권 국가와의 국교수립 관련 문서 등이 포함됐다고 외교부는 설명했다.
공개된 문서 원문은 외교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열람실'에서 누구나 열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