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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김현정의>
조선 선비의 기개와 지조의 표상인 면암 최익현 선생은 경기도 포천 생으로 화서 이항로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익힌 뒤 과거 급제로 출사하여 외교문서와 감찰, 언관(언론담당) 벼슬을 주로 역임했다.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해 74살의 나이에 의병장이 되어 싸우다 체포돼 대마도로 유폐된 뒤 단식투쟁 끝에 순국한 우국지사이다.
을사늑약 다음해인 1906년 순국했으니 올해가 순국 105주기가 된다. 투쟁 중 쓰러져 사경에 빠진 날이 음력으로 10월 16일, 양력으로 치면 이번 주말이고 한 달 뒤인 음력 11월 17일에 세상을 떴다.
◇ ''토건''과 ''개방''을 중지하고 백성을 아끼소서!면암의 스승 화서 선생은 "신하가 되어 마땅히 상소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인데 입을 꼭 다물고 묵살하며 그냥 국록이나 타먹는 일은 매우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출사하는 면암을 훈계했다고 한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면암은 자신의 신위를 돌보지 않고 강경한 상소를 잇달아 올리고 이 상소들은 면암을 조선 유림의 지도자로 밀어 올린다.
가장 유명한 것이 단발령에 저항해 올린 ''계유상소(癸酉上疏'')지만 그전에 올린 ''무진소(戊辰疏)''가 눈여겨 볼만하다. ''무진소''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늘려 짓는다고 국가재정을 파탄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핑계로 봉건적인 전제정권을 강화하려는데 제동을 건 상소이다. 면암이 탄원한 내용은 대대적인 토목공사 중지, 백성 강제부역과 수탈정책 중지 등이었고 이 상소로 언로가 트여 대원군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고 대원군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때는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으로 가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라는 상소를 올린다. ''할 말 해야겠으니 그 후 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막강한 기개였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조선이 일본보다 강국이라면 모를까 힘에 떠밀려 개방하면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어떻게 채울까 걱정이다. ▲우리의 경제력과 시장으로 그들을 이겨내지 못하니 통상을 시작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나라가 피폐하게 된다. ▲서양 세력을 등에 업은 일본이니 화친한다고 개방하면 서양문물이 밀려 들어 우리의 고유 미풍양속이 흔들린다. 일본은 청국보다 더 위험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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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열강의 침범 아래 조선조 지식인으로서 세계사의 흐름과 열강들의 구도를 제대로 다 읽지는 못했지만 제국주의의 약탈 본능과 산업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통찰해 내고 있음이 놀랍다. 결국 면암은 흑산도로 유배당했고 이후 풀려난 뒤 대원군이 공조판서 자리를 내주겠다 했으나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조약체결에 참여한 오적을 처단하라며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疎)''라는 상소를 또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뜻이 이뤄지지 않자 74살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체포되어 쓰시마(대마도)에 유폐되었다. 면암을 구심점으로 의병운동과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이 번지자 일본의 압력으로 대마도에 가둔 것이다.
단식 투쟁으로 숨졌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고령에 단식을 하다 병을 얻어 숨진 것이 정설이다. 대마도로 끌려가기 전 ''왜놈 땅은 밟지 않겠다''며 버선 속에 조선의 흙을 채워 갔고, 식량과 물까지 준비해 간 뒤 준비해 간 것이 떨어지자 ''왜놈 것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그런데 자신들의 식비를 고종 황제가 따로 챙겨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충정을 어쩌지 못해 미음을 입에 넣기 시작했으나 이미 여러 병을 얻어 늦은 상태였다.
일본군이 저항하는 면암을 굴복시키려 세 걸음만 걸으며 지내라고 작은 독방에 가두자 그까짓 것으로 굴복시키려 하느냐며 두 걸음을 떼면 그 이상 움직이지 않고 버티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일본인들마저 면암을 흠모해 유해를 극진히 수습해 조선으로 보냈고, 대마도에 선생의 순국비가 남아 있다.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에 서둘러 편입해 이제라도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개화개방. 서양 물질문명의 침략성과 한계를 걱정하며 민족의 자주와 정체성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
◇ 당신들도 자유로운 상어인가? 오늘의 시국과 닮은 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실은 많이 다르다. 한미 FTA는 개방과 쇄국, 선택의 기로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GATT 일반관세 및 무역협정 체제, WTO 세계무역기구 체제, 우루과이 라운드 등 세계 경제의 개방체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한미 FTA는 미국이 주도하는 극단의 신자유주의적 방식을 일시에 대거 받아들이면서 그 체제 아래로 흡수되느냐 문제이다.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흡수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피해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 이치가 그러하니 걱정하는 것이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말처럼 ''바다 속 상어의 자유는 작은 물고기에겐 죽음을 의미한다''. 좁은 한국 시장에서 미국 대기업과 자본이 자유롭다면 한국의 기업과 산업은 도망갈 곳조차 없는 작은 물고기가 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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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미국에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비판할 것은 하면서 응하는 유럽식 모델로 가거나, 아니면 한국식 독자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여러 의견이 있겠으나 진보진영은 유럽식 모델을 참고로 한 한국식 모델을 개발하기까지 시간을 벌었으면 하는 쪽이 대세일 것이고, 보수 진영은 어차피 FTA 시대로 갈 거면 정부가 스케줄 잡은 대로 빨리 가서 미국 시장을 선점하자는 것일 터.
그런 점에서 ''FTA에 찬성하면 보수파이자 한나라당 지지자, FTA에 반대하면 좌파이며 야당 지지자''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은 부적절하다. 모두가 나서서 자기 관련 분야의 문제점이나 애로 사항을 진지하게 토로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판사들의 FTA 문제점 지적이나 FTA 청원문 등은 지금까지 설정되어 있던 ''보수 찬성 - 진보 반대''라는 FTA에 대한 조악한 인식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반갑다.
판사들의 청원 움직임에 대해 검찰 일각에서는 사법부야 입법부가 만든 법을 해석해 판결에 적용만 하면 되는 것인데, 입법에 해당하는 조약의 체결에 직접 의견을 내놓는 것은 3권 분립을 침해하는 것이라 반박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식당 요리사는 요리만 하는 것이 마땅한가? 식품자재 구매부에서 썩은 식재료를 사온다고 지적하면 주제 넘는 일에 업무영역 침해가 된단 말인가?
한미 FTA는 3권 중 어느 권에 속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3권에 민중의 생존권, 경제.사회 질서의 자주권까지 묶은 국가의 자주권 문제이다. 사법에서의 문제를 고려조차 않고, 입법에서조차 단독강행 날치기 처리한 여권 권력이 오히려 3권을 침해한 것이다. 당신들도 자유로운 ''상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