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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내린 눈이 햇살에 반짝여 눈이 부셨던 지난달 30일 아침. 한 평생 ''자유''를 위해 싸워온 백기완 선생(78)을 만나기 위해 혜화동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았다.
거실에는 전날 대학로 일대에 술을 배달하는 노동자 오 모씨가 선물로 보내왔다는 유기농 막걸리 한 상자가 눈길을 끌었다. 선생은 파란 한복저고리에 흰색 조끼를 받쳐 입고,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욱끈(몸과 마음의 건강)은 어떠시냐"고 인사했다.
선생은 "몸은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고, 정신은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차있다"고 답했다.
인사치레나 의례적인 덕담은 없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반백(半白)의 할아버지지만, 그 강렬한 눈빛과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아직도 그가 ''청년''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방안의 공기는 터질듯이 팽팽해졌다.
◈ "새해에는 평화와 자연, 말의 자유, 서민을 위해 싸워야!" 가장 먼저 토끼해를 맞아 이 땅의 시민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청했다.
"새해에는 이 땅에서 ''전쟁'', ''전쟁''하는 이야기와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깡그리 몰아내야 해. 그런데 그 전쟁은 남북 간에만 있는 게 아니야.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독점자본과의 싸움도 벌어지고 있다니까. 세 번째는 말의 자유, 예술 창작의 자유, 학문·문화·교육의 자유를 지키려는 싸움도 있어. 또 하나는 자연을 죽이고자 하는 세력과의 싸움도 일어나고 있다고. 새해에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인간적으로 승리하도록 온 시민이 정말로 피눈물의 노력을 기울이자 그런 이야기야."
선생은 특히 젊은이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그는 ''미국 경제의 파탄으로 신자본주의는 이미 운명을 다했다''라면서, ''신자유주의의 피해가 무엇인지를 자각하는 젊은이가 돼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젊은이들을 깨진 병 조각처럼 파편으로 만들어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해. 그리고 자본주의 재생산구조에 다 흡수해서 알맹이만 빼먹고 뱉어버려. 그러니까 속지 말라 이거야. 또 요새 젊은이들에게 ''꿈''을 빼앗아 가고, 어설픈 뚱속(욕심)만 남겨놔. 개념 있는 말을 쓰면, 모두 ''이기주의자''와 ''개인주의자''로 만든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요새 젊은이들은 ''환호''만 있지, ''감격''을 할 줄 몰라. 축구장이나 공연장에 가서 ''와~''하고 환호만 할 줄 알아. 옳은 일을 위해 싸우다 핍박받아도 같이 울어줄 줄 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굴레 속에서 노동자들이 서로 싸우는 피눈물의 현장을 보고도 아무것도 못 느껴. 요새 젊은이들은 환호는 있어도 감동을 빼앗긴 껍데기야. 그걸 우리말로 ''개죽''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젊은이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먼저 자본주의 문명의 피해가 뭔지를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고!"
선생은 이야기 도중에 탁자를 여러 번 내려쳤다.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그의 몸과 정신을 가득 채웠던 ''분노''와 ''긴장''은 이제 막 폭발을 시작한 ''화산의 용암''처럼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최루탄을 먹은 지 60년이 된 이 백기완이 이명박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먼저 그는 내가 겪은 역대 권력자 중에 최악의 사대주의자야. 그리고 이 땅을 돈 많은 몇 사람만의 자유를 보장하는 부자들을 위한 나라로 만들려고 해. 또 난 언론자유를 원천적으로 억압하는 반민주주의적인 권력자의 상징이라고 봐. 내가 공개적으로 하나 물어보고 싶어. 지금 휘두르고 있는 그 독선적인 권력을 도대체 누가 줬냐 이거야. 이 땅이 무슨 땅인 줄 알아? 통일을 위해 싸우다 수백만 명이 죽었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우다가 수백만 명이 죽어갔다고. 이렇게 우리가 피눈물을 흘리며 일구어 온 역사적 현실은 그에게 그런 독선과 오만을 부여한 적이 없다니까. 내 말이 고깝게 들린다고 하면, 독선을 부릴 자격조차도 없어. 오직 물러가는 것밖에 없어! 그 외에는 아무 자유도 없는 거야. 이건 ''시(詩)''야. 주장이 아니라 시라고!"
2
◈ "백범 선생이 살아계셨으면, 채찍을 들고 피눈물을 흘렸을 것"선생은 이 대목에서 기자에게도 "왜 자네 무서워? 아이고~ 이 할아버지, 잘못 찾아왔다. 뭐 이런 생각 들지!"라며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1979년 12월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을 당시 썼던 시 한 편을 읊었다. 고문으로 당시 80kg이 넘던 선생의 몸은 40kg으로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입을 열라면 죽어도 못 하겠고··· 벌써 이레째구나! 어디 한 번 더 갈겨보아라··· 물러서라고 못 한다··· 포기하라고 못 한다··· 타협하라고 못 한다···<진술거부> 中''
백기완 소장의 할아버지인 백태주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은 절친한 사이였다. 백범 선생은 일본군 병사를 때려눕히고 감옥에 갔다 나와서 한동안 백태주 선생의 집에 묵은 적이 있다.
백태주 선생은 "왜놈 때려잡은 영웅이 오셨다"며 기르는 소를 잡아 보름 동안을 아침저녁으로 김구 선생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그에게 "백범 선생과 관련된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1947년인가 1948년인가 아무튼 남쪽과 북쪽이 나라로 성립되기 전이야. 그때 아버지하고 백범 할아버지를 찾아갔더니 깜짝 놀라시면서 내 손을 잡아주셨어. 그리고 ''기완아~ 너 통일이라는 것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싸움의 세계가 아니야. 통일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던 민족의 곧맴(양심)이 하나가 돼서 진짜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거야''라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다 가고 너희가 크면 이 뜻을 그대로 이어주었으면 하는구나!'' 하셨어. 그때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내가 봤거든.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어? 백범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62년이 지났는데 지금 어떻게 됐냐고? 백범 선생님의 뜻을 정면에서 거역하고 있잖아."
''백범 김구 선생이 만일 오늘 다시 살아오셔서 이 땅의 현실을 보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 것 같으냐?''라고 다시 물었다.
"딱 이런 말씀을 하셨을 거야. ''네 이놈들! 종아리를 걷어 올리거라!''하시고는 부들부들 떨며 채찍을 들긴 들었는데, 종아리를 때리지는 않고 피눈물만 흘리셨을 거야."
백기완 선생의 덧이름(별명)은 ''쌍 도끼''다. 두 개의 도끼는 ''말''과 ''주먹''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덧이름은 ''울보''다. 어느새 백기완 선생의 눈가도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날노래(유행가)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다. 즉석에서 노래가 나온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임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보통사람은 단 60분을 울기도 어렵다. 그런데 자신의 친형이나 다름없었던 장준하 선생이 참혹하게 암살당했을 때, 너무나 원통해서 이 노래를 6개월이나 혼자 부르면서 울었다고 한다.
3
◈ "언론은 글 한 줄 쓰고, 말 한마디 하더라도 목숨을 걸어야 해!"선생은 다시 이 땅의 언론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지금의 상황을 세 가지로 진단했다.
"지금 이 땅의 언론은 이명박 정권의 대변지만 있지, 참 언론은 없어! 두 번째로 미국 오바마 정권의 대변지만 있지, 우리 민족 언론은 없어! 마지막으로 이 땅의 언론은 신자유주의 대변지만 있지, 서민의 아픔을 대변하는 언론은 없어! 언론의 자유는 언론기관의 소유물이 아니야. 언론기관 종사자들의 생활수단이 아니라니까. 그럼 뭐야? 사람, 특히 일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살티(생명)의 자유가 언론의 자유라 이 말이야! 그걸 위해서 CBS 노컷뉴스부터 싸워주길 바래."
이어 그는 피를 토하듯 언론인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글 한 줄을 쓰고,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목숨을 걸라고도 했다.
"이거 봐. 신문기자라는 건, 글 한 줄을 쓰더라도 목숨을 거는 거야! 방송인이라는 것은 입에서 뭔가 한 마디가 나오더라도 목숨을 걸어야 돼! 그래야 그 글 한 귀, 말 한마디가 예술이 되는 거야. 예술은 타협할 수 없어. 무슨 이야긴 줄 알아? 장사꾼들의 나발은 빛깔을 막 바꿀 수 있어. 그런데 예술은 빛깔을 바꿀 수도 없고 내용을 바꿀 수도 없어. 그 한마디, 그 한 글귀에 사람의 목숨이 달렸으니까. 살티가 달렸다고 살티!"
백기완 선생의 한살매(일생)을 매겨온 새김말(좌우명)은 ''노나메기''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세상)''라는 뜻이다.
특히 노나메기는 우리 겨레의 정서를 대변하는 보편적인 염원이라는 것이 선생의 설명이다.
"가난이라는 것은 모든 짐승 가운데 사람의 세상에만 있어. 참새도 가난이 없고, 멧돼지도 가난이 없고, 범도 가난이 없거든. 그러면 가난은 어디서 오느냐? 간단하지 뭐. 내 것은 내 것이라고 안 내놓는 거야. 그러니까 사적소유제도를 인간적으로 바로 잡아야만 가난은 없어지는 거요. 새해에는 노나메기가 이 땅의 민중 아니, 전 인류의 새김말이 되는 것이 내 바램이야. 노.나.메.기!"
선생의 방에는 화가 신학철 씨가 그려서 선물한 ''가위질하는 엿장수''가 한쪽 벽면을 큼지막하게 차지하고 있다.
농사를 짓다 쫓겨나 공장노동자가 됐지만, 프레스에 손가락을 잘리고 결국 엿장수가 된 한 인간의 애달픈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이다.
"난 지금껏 실패와 눈물의 인생을 살았어. 하지만, 난 실패에 절대 주눅이 들지 않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실패에 도전하는 인생을 살았어. 이제 나도 늙었지만, 말은 하다가 내 일생을 그치려고 해. 누군가는 이 역사의 먹구름을 갈라칠 양심의 소리, 민중의 소리를 대변해야 하지 않겠어?"
그림 속 가위질하는 엿장수는 거리 한복판에서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큰 소리를 외치며 울보 백기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진술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