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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또 얼마나 불행할까. 감히 판단한다. 감성 멜로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은 이같은 편견을 단숨에 날린다. 분명 불편하지만 결코 불행하진 않다. 특히 자신의 반쪽을 만난 부부는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
달팽이의 별은 눈과 귀가 멀어 마치 달팽이처럼 오직 촉각에만 의지해 아주 느린 삶을 사는 영찬 씨와 그런 남편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생명줄 같은 존재인 척추장애인 순호 씨의 아름다운 일상을 담은 작품. 한 사람은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또 한 사람은 등이 굽어서 집안의 형광등 하나 교체하는 것도 만만찮다. 하지만 둘의 사랑으로 극복 못할 일은 없다.
오히려 남편의 장애는 아내의 존재를 더욱 크게 만들고 둘의 사랑을 더욱 곤고히 한다. 또한 가진 게 적다보니 사물과 사랑 그리고 인생의 본질에 더 가까이 서있다는 느낌이다. 두 사람은 비장애인들은 놓치고 마는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살아간다.
마치 손가락을 건반삼아 피아노를 치듯 점화(기존의 점자를 손등 쪽 손가락 위에 찍어 대화하는 방식)로 느릿느릿 소통하는 두 부부. 그들의 그림 같은 모습을 담아낸 주인공은 이승준 감독이다. 이 감독은 지난 2007년 평범한 시골 할머니들의 생활을 담은 TV 다큐멘터리 ''들꽃처럼, 두 여자 이야기''로 한국독립PD상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22일 개봉을 앞두고 만난 이 감독은 "일상 속에서 특이한 것을 끌어내는 걸 좋아한다"며 "처음에는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시청각장애인 영찬 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고 출발을 떠올렸다.
이 감독은 지난 2008년 ''인간의 손이 가진 위대함''을 주제로 한 EBS 원더풀 사이언스라는 과학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영찬 씨를 처음 만났다. 이후 새 작품을 모색하다 그를 떠올렸고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시청각장애인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우선 큰 가치를 뒀다.
하지만 영찬 씨를 알수록 그가 세상을 표현하고 읽어내는 독특한 감성에 매료됐다. 더구나 영찬 씨는 발군의 시인이다. 그는 자신을 우주인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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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하고도 대화 못하고 혼자 고립돼 있으면 혼자 우주공간에 고립돼 있는 기분이라고 하잖아. 시청각장애인들은 다 우주인 기질이 있는 것 같아"라고 시를 썼다. 또 그는 결혼의 첫번째 준비물로 지독한 외로움을 꼽는다.
"외로울 때 외롭다고 하여라. 피하여 달아나지 말고 돌이켜 뛰어들지 말고 그저 외롭다고만 하여라. 어둠은 짙어야 별이 빛나고 밤은 깊어야 먼동이 튼다."
촬영은 지난 2009년 3월 당시만 해도 제작비가 없어 선배에게 빌린 카메라로 나홀로 시작했다. 6개월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스태프를 꾸렸는데 당해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EIDF) 사전제작피칭 지원작으로 선정돼 방송콘텐츠진흥재단에서 3000만원을 지원받으면서다. 이후 미국의 선댄스다큐멘터리펀드 등이 후원했고 일본의 NHK와 핀란드 영화위원회가 공동제작에 나서는 등 10개국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영찬 씨에게 초점을 맞췄으나 점점 두 사람의 사는 모습에 눈이 갔다. 이 감독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어쩜 변함없이 잘 살까. 아내는 어떻게 저렇게 헌신적인가. 천사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고 초기에 느낀 감정을 털어놨다.
하지만 가만히 2년을 촬영하다보니 다른 것이 눈에 보였다. 바로 아내의 내면에 숨어있던 외로움이었다. "아내도 지독하게 외로웠구나. 그래서 남편의 마음을 공감했구나. 서로의 외로움을 보듬고 공감했기에 지금껏 잘 살아왔구나 싶더라." 이 감독은 "당시 소통이 사회적 화두였는데 그들을 지켜보면서 소통보다 공감이 더 중요한 가치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달팽이의 별은 비장애인이 잊고 지내거나 혹은 굳이 인식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비오는 날 두 사람은 빗방울을 느끼면서 서로의 추억을 나누는가 하면 산책을 나갔다 가만히 나무를 끌어안고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이 감독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빗방울을 느낄 기회란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무를 끌어안아보는 그런 순간도 없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야말로 정말 소중한 게 아닌가"라고 피력했다. 시적인 영상을 담아내려 노력한 것도 이 때문.
마치 예술사진을 찍듯 일렁이는 파도, 빛을 머금은 물방울 등을 담아낸 이감독은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다큐멘터리도 있지만 영상이나 사운드를 통해 드러내는 다큐멘터리도 있다"며 "달팽이의 별은 후자다"고 말했다. 감병석 프로듀서에 따르면 총제작비 3억 중에 사운드 작업에 4000만원이 들었다.
또 다른 특징은 기존 장애인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달리 경제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두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또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지 않는다. 이 감독은 "의도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들이 힘든걸 봐야 안심이 되는 것인가.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다루는 방식이 싫다"며 "주제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 생활상의 문제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말했다.
"영찬 씨가 자신의 처지를 힘들어하면서 나는 지금 어려워서 한 푼이라도 돈을 벌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 말하는 내용을 찍기는 했다. 편집감독과도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빼기로 했다. 영찬 씨나 순호 씨도 우리의 선택에 수긍하고 오히려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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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3월 일본 NHK에서 방영된 52분짜리 방송용 버전에는 영찬 씨의 생활고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이 감독은 "방송은 영화와 호흡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차이를 설명했다.
달팽이의 별에는 영찬 씨의 자작시가 수편 소개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를 묻자 이 감독은 두 편을 꼽았는데 나중에 좋아하게 된 시는 ''우주인''(참고로 영찬 씨의 시는 모두 무제다)이라고 답했다.
"사람의 눈 귀 가슴들은 대부분 지독한 최면에 걸려있거나 강박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아의 깊은 늪에 빠져 세계를 전혀 모른 채로 늙어간다. 그런 눈과 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나처럼 우주인이 되면 된다"
그는 왠지 통쾌하고 또 패배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최종적으로 남기고 싶은 한 장면으로는 두 사람이 손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꼽았다.
그는 "한명은 키가 크고, 다른 한명은 키가 작고. 그런 둘이 어딘가로 같이 간다는 느낌이 좋았다. 저 두 사람은 어디까지건 가겠구나 저렇게 손을 맞잡고. 예뻐 보였다"고 답했다.
달팽이의 별은 지난 해 11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장편경쟁부분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다큐멘터리로는 최초로 오는 4월 18일 개막하는 미국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 월드다큐경쟁부문에도 진출했다. 해외에서 인상적이었던 반응을 묻자 이 감독은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쑥스럽다"고 머쓱해했다.
이어 "암스테르담에서 시상식할 때 아프리카인 심사위원이 한 심사평이 기억난다"며 "당신들 중 누가 물방울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 누가 저 섬세한 감각을 가져본 적이 있느냐, 이 영화는 앞으로 다큐멘터리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줬다고 평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