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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목발을 짚고 버스를 타는데, 주변에서 돕겠다고 부축하면 더 힘들어요. 쉽게 오를 수 있는 몸에 밴 방법을 못 쓰니까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있다고 쳐요. 누군가 '내가 밀어주겠다'며 자기 편한 길로 데려갑니다. 걷기 편한 길과 휠체어가 다니기 좋은 길은 다를 수 있다는 걸 그 사람은 놓치고 있어요. 선한 의지가 오히려 독이 된 셈이죠. 그럴 땐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하고 먼저 물어보세요. 그게 동등한 입장에서 우리를 대하는 모습입니다."
김효진(50) 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는 장애 문제에 대한 사회적 진단이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장애인을 지나치게 보호해야 할 불쌍한 존재가 아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차별, 역차별 없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장애인 인권의 확립이다.
한평생 지체장애를 안고 살아온 그가 온몸으로 받아들인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김효진 대표에게는 아홉 살 아들이 있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같은 장애를 가진 남편을 만나 낳은 소중한 아이다.
"저는 남들이 말하는 평범한 삶을 살려고 큰 대가를 치르고 있어요.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해야 하는 가사·육아 노동 말입니다. 도우미를 쓸 형편도 못되니 예전처럼 일을 과감하게 벌이지 못하는 면도 있죠."
하지만 김 대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덕에 자신의 일에 더 큰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진짜 장애여성으로 산다는 걸 절감합니다. 아이를 낳기 전 그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살까'라고 생각했던 점이 50%였다면 지금은 100% 공감해요. 가족이 제 생각의 틀을 넓힌 셈이죠."
그는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세 살때 허리 아래가 마비됐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1학년 등하굣길 내내 할아버지 등에 엎혀 있어야 했다.
2학년부터는 목발을 짚고 혼자 학교를 오갔는데, 남들 100m 갈 때 10m 움직일 만큼 느리고 힘이 들었다.
"고교 1학년 때 집이 이사하는 바람에 버스를 타고 먼 거리에 있는 학교를 다녀야 했죠. 승객이 많으면 버스를 안 태워줬어요. 몇 대 보내고 1시간 넘게 기다린 적도 있죠." 학창 시절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은 책이었다.
언니들이 읽던 책부터 길거리의 분식을 담는, 신문·잡지로 만든 종이봉투까지 활자라면 닥치는대로 읽었다. 기본적인 독서량이 있으니 학교 성적도 좋았다.
현재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깨는 글을 쓰는 작가로 활동하는 데도 밑거름이 됐다.
"장애가 있으니 남 앞에서 튀지 마라." "네 힘으로 살아가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 김 대표가 자라면서 자주 들었던 말들이다.
고교 2학년이 끝날 즈음 그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고민이 찾아왔다.
"당시 고교를 졸업한 여성은 보통 사무직으로 갔죠. 제 경우 몸이 불편하니 시켜줄 것 같지 않고, 생산직으로 가자니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몸이 못 버틸 게 불보듯 뻔했죠. 어떻게든 대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고, 1980년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10여 년 동안 취업이 안됐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매번 면접에서 떨어졌다. 결국 문제는 장애였다.
"면접을 볼 때는 '대단하다' '웃는 모습이 좋다' '내 조카도 장애가 있는데, 당신 이야기가 힘이 될 것이다' 등의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집에 돌아가면 감감무소식이었죠."
그 사이 그는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원때부터 도움을 준 선배의 추천으로 한 정부 출연기관에 들어가 출판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출판을 부수적인 일로만 여기는 기관 측은 갈수록 인원을 줄였고, 나중에는 홀로 남아 엄청난 양의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지쳐갔죠. 평생 이렇게 사는 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당시 1990년대 후반은 시민사회운동이 꽃을 피우던 때다. 김 대표는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고, 한국장애인연맹과 인연이 돼 장애여성의 인권 지킴이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1999년부터 이 일을 시작했으니 14년째네요. 그간 스스로에게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일만 했는데, 손에 잡히는 성과가 없어 아쉬워요. 그만큼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어렵다는 거겠죠. 하지만 장애 문제를 인권 차원에서 접근하자는 주장을 널리 알렸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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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장애인 인권인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장애인 운동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좋지 않았다. 우리의 목소리를 단순히 생존권 문제로만 보고 '장애인들이 움직이는 데는 이권이 엮여 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 동안 장애인 운동이 복지에 치우쳐 이뤄진 탓이다. 장애는 죄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다. 지역 사회가 장애인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 복지와 인권, 무엇이 다른가.
"복지는 최소한의 삶이다. 장애인들은 시설에 사는 걸 원치 않는다. 사육되는 개, 돼지가 아니니까. 인권은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은 공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휠체어 탄 사람도 지역 반상회에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다. 복지는 금방 효과가 나타나지만, 인권은 오랜 기간 공을 들여야 한다. 5%도 안되는 성공한 장애인들을 내세우고, 긴급처방 식의 복지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는 장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 둘 사이의 대립도 있겠다.
"인권과 복지의 대립은 장애인 당사자와 시설 관리자 등 전문가 단체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수십 년간 전문가 단체가 이끄는 복지 위주로 장애인 정책이 이뤄진 게 사실이다. 이제는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자는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도 시설 관리, 인력 확보 등을 위한 예산 지원보다 지역 사회에 장애인들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다."
▶ 인권 확립, 어려움도 많을 텐데.
"전반적으로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 반영이 안된다. 전문가들은 장애인의 참여를 골치아프다고 생각한다. 10명 중 장애인 1명을 끼워넣는 식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장애 관련 의사 결정 기구의 참여가 활발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의사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과반수 이상, 적어도 20%는 포함돼야 한다."
▶ 장애여성 문제의 심각성은.
"장애여성의 70%가 초등학교 이하 학력이다. 제대로 된 직장, 결혼 생활은 꿈도 꿀 수 없다. 이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은 대부분 1, 2개월이고 길어야 6개월이다. 더욱이 남성 장애인 중심으로 정책이 이뤄져 여성이 소외받기 일쑤다. 장애인 고용 가운데 장애여성은 3분의 1에 머물고, 직업 교육도 장애남성이 할 수 있는 게 훨씬 많다. 별도의 법령을 제정해 장애여성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