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나 서점 운영을 그만두려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한 사람. 서점을 재개점할 때마다 간판에다 자신의 주장을 새겨놓고 지향점과 실천의지를 채찍질했던 사람. 사회과학에서 출발해 문화과학, 문화사랑방을 거쳐 자연 속으로 들어간 사람. 지난 1982년 문 연, 국내 사회과학 전문서점 1호 '인서점'의 심범섭 대표(71)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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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학교 후문 근처에 자리한 인서점의 내부는 손님 한 명 없이 조용했다.
서점 안쪽 모서리에 다소곳이 앉은 심 대표는 "한 일이 없는 데 존경받아 민망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세상과 공동체를 향한 청년들의 열정이 예전만 못한 것 아니냐는 물음에는 "청년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의 위기, 문명의 위기"라고 바로 잡았다.
- 서점은 잘 되나. "잘 안 된다."
- 서점은 몇 시에 문여나. 매일 나오나. "매일 아침 8시쯤 열어 밤 9시쯤 문을 닫는다. 5년전 양수리로 거처를 옮겼는데, 막내 아들이 차를 몰고 함께 출퇴근한다."
- 칠순인데 건강해보인다."일흔 한 살인데, 농사짓기 좋아해서 그런지 건강하다. 출근 전 밭에 가서 농사일 하고 서점 끝나고 밭에 가서 또 일한다. 3300여㎡(1000평)의 땅에 배추와 마늘을 심었다."
- 3300여㎡의 넓이라면 가족들이 먹고도 남겠다."아는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인서점을 통해 알게 된 지인들이 많다. 어떤 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양수리로 한꺼번에 찾아온다. 며칠 전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서점 30주년 기념식에도 300명이 넘게 왔다."
- 모두 예전에 책을 사간 사람들인가. "책 사갔다고 해서 그렇게 친해지진 않았을 거다. 어둠의 시대 촛불 켜 놓고, 그걸 횃불로 들고 라면 끊여먹으면서 87년 6월 항쟁 전후 과정을 함께했던 동지들이다. 농민 노동 문화운동 같이 하고 함께 탈춤 추고 풍물패 했던 이들이다. 서점을 그만두려 할 때마다 모여들고 돈 걷어왔다. '꽃다지' 멤버 4쌍을 포함해 주례 본 사람이 500쌍이 넘는다."
- 예전에 자주 어울렸겠다."박정희, 전두환 시기에는 김지하의 '5적'을 갖고만 있어도 구속됐다. 책도 제대로 못 쓰니까 저항지식이 얕으니까, 담론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 담론의 공간은 어떻게해서든지 지켜지고 남한테 발각되면 안됐다. 서너 사람 모여 말 잘못하면 그대로 끌려가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이었다. 밤에 문닫고 토론하고 라면 끓여먹고 막걸리 갖다 마시면 어깨동무하고 눈물 흘리고…."
- 출발 당시는 어땠나. "길동에서 서점을 하는데, 학생들이 부족한 돈 대주면서 가자고 해서 옮겨왔다. 민주 민족 민중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론과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적 입장의 철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회과학을 내걸었다. 사람들이 신선하게 받아줬다."
- 고초도 겪었겠다."책 팔기가 목적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얘기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숨고, 특히 정을 나누면서 자기 의지를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책을 천장에 숨겼다. 천장에 구멍을 뚫어 탈출구도 마련했다. 새벽 2~3시 눈이 하얗게 왔는데 문을 막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나가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라면 끓여 먹이고 돈 쥐어주면서 지방으로 보냈다. 그런 중간자의 역할을 했다. 90년대 후반 '세기와 더불어'라는 김일성 회고록을 감췄놨다 잡혀갔다."
- 이래저래 사람들이 참 많이 몰렸겠다."경찰들의 말이다. '목포에서, 강릉에서, 강화도에서 사람 잡아 문건 나왔는데 모두 당신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인서점 아느냐고 추궁하면 한결같이 모른다고 말한다, 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냐?'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자생간첩'이었다. 당시 인서점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호를 해야 할 대상이었다. 난 한 일도 없는데 존경받아, 민망스럽다."
- 간판 부제가 계속 달라졌다"95년 간판에 '문화과학서점'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모금운동 덕분에 이사했으면서도 학생들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사회과학의 시대는 갔다, 문화과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랬더니 '인서점 아저씨는 잡사상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더라."
- '문화사랑방'이라는 방 문패가 보이는데… "2005년 위기가 닥치자 또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문화과학을 표방했지만 주변에서 잘 이해를 안해주니까 이번에는 토론 공간으로서의 인서점을 표방했다. 한신대 이해영교수, 정지영 영화감독을 초대해서 토론했다. 올해에는 미국에서 소수민족운동하는 김동석소장을 초청했다."
- 요즘엔 무엇을 말하나. "인간에 대한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무한경쟁이란 자본주의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가치에 대한 담론을 먼저 설정하자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이제는 인류 단위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그런 어떤 씨알 같은 걸 파종하자는 이야기를 한다."
- 요즘 대학생들 취업이 잘 안된다. 분위기가 예전과 다를텐데…"요즘 대학생들 책 잘 안 읽고, 돈 벌어 자신만 잘 살려고만 한다고 비난한다. 난 청년들을 나무라고 싶지 않다. 모두가 경제적으로 잘 살겠다는 게 시대 분위기다. '사적인 가치는 나쁘다'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 새로운 담론을 창출해내지 못하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문학의 씨앗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지식창출력에 비난을 보내야 한다."
-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가. "어둠의 시대 밝히자는 인문학은 세상이 환해지면서 시효가 사라졌다.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통일담론이 효력을 상실한 이때, 이젠 좀 발상을 바꿔야 한다. 새로운 가치,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만한 사람 찾아 밭 만들어 주고, 거름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 인터넷서점이 생겨나 책방 운영이 점점 힘들어질텐데… "전기가 들어오면 초 장사 안된다. 새로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갈 수 있는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고 조류독감 등으로 돼지 소 닭 잡아 다 매몰처분한다. 문명이 인간을 퇴화시키고 재앙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한 더 큰 반성이 필요하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7년전부터 글나루 운동을 하고 있다. 매월 책 30권을 추리고 그 중 4권을 고른 뒤 2권 뽑아 서평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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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은 언제까지 운영할 생각인가 "지금 한계에 와있다고 본다. 2~3년째 매월 100만 원 정도씩 적자다. 은행 대출로 양수리에 3500평 땅을 사서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을 찾고 있다.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너무 벗어났는데, 삶을 좀 더 자연으로 가져가서 영혼을 치유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담론을 끌어내자는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젊은들에게 책 한 권을 추천한다면?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라는 책이다. 기생충은 삶의 방식 자체가 자연으로 엄청난 지혜를 지녔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 조직, 물건 만들었는데, 그 지식과 문명이 오히려 인간을 재앙으로 몰아가고 있다. 자연과 어울리는 무한의 지혜를 기생충의 삶 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