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3년 6월 03일 (월) 오후 7시 3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
◇ 정관용> 시사자키 3부 시작합니다. 오늘 3부에는 여러분 잘 아시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안경환 교수 초대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장 지내셨고요. 또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 조직을 축소하려고 할 당시에 이명박 전 대통령 상대로 소송을 건 당사자이시죠? 또 지난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 캠프의 새정치위원회 위원장 맡으신 바도 있고요. 그런데 그래서 모신 게 아니라요. 그분이 이번에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황용주, 잘 모르시죠? 저도 처음 듣는 분인데요. 한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독대할 정도로 가까웠던 5.16 군사쿠데타의 숨은 주역이라고 합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안경환 교수 직접 모셔보죠. 어서 오십시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안경환 교수
◆ 안경환> 안녕하세요?
◇ 정관용> 황용주, 지금 돌아가셨죠?
◆ 안경환> 네. 2001년에 돌아가셨습니다.
◇ 정관용> 어떤 분입니까?
◆ 안경환> 지금 분들은 잘 모르시죠? 초대 문화방송 사장이었습니다. MBC 사장이었습니다.
◇ 정관용> 초대 MBC 사장?
◆ 안경환> 네. 그 전에는 부산일보 주필 또 국제신문 주필을 했고요. 박정희 대통령하고는 대구사범학교 동창이었고 그리고 대구사범학교를 퇴학을 당하고 난 뒤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 정관용> 왜 퇴학을 당했어요?
◆ 안경환> 당시에 좌익서적을 읽어서요, 독서회사건으로. 당시에 뛰어난 수재로 알려져 있었죠. 그리고 부산에서 주필할 때 그때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박정희가 부임해서 그때부터 박정희 소장을 상대로 해서요. 소위 말하는 군사혁명, 자기들은 민족혁명으로 생각했죠. 쿠데타를 부추긴 사람이고요.
◇ 정관용> 대구사범학교 동창인데 일본 유학하고 그러느라고 오래 못 만났었겠군요?
◆ 안경환> 네. 아마 직접 못 만나고 나중에 50년대 후반 들어와서 만난 된 걸로 돼 있습니다. 그리고는 5.16의 주역이 되죠. 그 전에 4.19에서는 3.15 부정선거. 그래서 마산사건을 특종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세계에 알린 사람입니다.
◇ 정관용> 마산의 김주열 열사.
◆ 안경환> 네. 김주열 그 사진을 부산일보에서 특종을 가지거든요. 혼자서 안 쓰고 전국적으로 다 퍼뜨리고 또 일본과 미국에도 전파했어요. 결정적으로 4.19의 도화선을 만든 사람이었죠.
◇ 정관용> 그렇군요. 그래서 친구였던 박정희가 소장으로 부산에 왔을 때 시국을 함께 개탄했을 것이고.
◆ 안경환> 그리고 계속해서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이렇게 강론하죠. 하라고 그러면서. 이건 그러기에 오래전부터 50년대부터 신문에 글을 써요.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세계의 민족운동에 대해서 글을 쓰고. 특히 거기 나세르의 아랍혁명에 대해서 굉장히 감명을 받으면서.
◇ 정관용> 이집트 나세르 혁명? 거기도 군부 출신이죠.
◆ 안경환> 군부 출신이죠. 신생국가에서 나라를 이끌 엘리트부대는 결국은 군밖에 없다라는 사명감을 심어주면서요. 끝까지 그걸 챙기죠. 그래서 나중에는 쿠데타 성공하고 난 뒤에 보면 1963년에 박정희 이름으로 나왔던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걸 4.19와 5.16을 같은 맥락에서 보고 5.16의 정당성을 얘기하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의 사실상의 저자인 셈이죠. 그걸 다 주고. 그러다가 68년...
◇ 정관용> 그런데 쿠데타가 성공한 직후에 쿠데타의 숨은 주역이라고 하셨고 어떻게 보자면 쿠데타를 부추긴 사람이고 박정희로 하여금 쿠데타의 어떤 역사적 정당성을 다른 세계역사를 통해서 인식시킨 사람이란 말이잖아요.
◆ 안경환> 네, 그렇죠.
◇ 정관용> 요직을 맡지 않았나요?
◆ 안경환> 그래서 문화방송 사장이 됐죠.
◇ 정관용> 정부요직은 맡지 않고?
◆ 안경환> 정부일은 안 맡고요. 언론을 맡아서 그러다가 문화방송 사장 시절에 통일에 관련된 글을 씁니다. 그게 유명한 세대지 64년 11월.
◇ 정관용> 문화방송 MBC 사장 시절에.
◆ 안경환> 네. 맞습니다. MBC 사장이에요. 그래서 세대지에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라는 소위 말하는 글을 쓰는데 그게 뭔가 하니까 남북한이 서로 UN 동시 가입해야 한다 군비 축소해야 한다. 그 결과 통일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게 문제가 돼서 국회와 그때 당시 야당과 그리고 박정희 주변에 있던 젊은 사람들 소위 말하는 군인세력에 의해서 쫓겨나죠.
◇ 정관용> 그게 몇 년도 입니까?
◆ 안경환> 64년 11월입니다.
◇ 정관용> 64년. 뭐, 불과 몇 년 안 됐네요?
◆ 안경환> (웃음) 네. 그래서 그로부터 반공법 위반으로 그로부터 야인이 되죠.
◇ 정관용> UN 동시 가입, 군비 축소 등등의 주장이 반공법 위반이 됐군요.
◆ 안경환> 그렇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이 그때 이 사람이 주장한 일이죠. 그로 인해서 쫓겨나고는 야인이 되고 그리고는 평소에 그러다가 그냥 외롭게 외롭게. 가난과 실의 속에 살다가 죽었죠.
◇ 정관용> 그러면 64년 이후에는 뭔가 공식 직함을 가진 게 없습니까?
◆ 안경환> 사회활동은 거의 못했고요. 배려차원에서 정수장학회 이사를 시켰습니다.
◇ 정관용> 정수장학회.
◆ 안경환> 왜냐하면 정수장학회를 만든 사람이 입안 아이디어도 여기에서 나왔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 정관용> 황용주 씨가 정수장학회 아이디어맨이에요?
◆ 안경환>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이 사람이 부산일보의 부일장학회에 들어서 그걸 황용주 씨가 그 당시 사장 김지태와의 관계에서 중간에 조정을 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정원 보고서에도 이렇게 되어 있고.
◇ 정관용> 조정을 했다? 사실 근데 헌납을 강요한 것 아닙니까?
◆ 안경환> 결과적으로 그랬는데 저쪽 얘기는 저쪽 얘기대로 또 있어요. 어쨌든 그런 부분도 그렇게 한쪽 얘기는 그런데요. 저쪽 얘기는 저쪽 얘기대로 나름대로 뭔가 주장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부분이 있죠. 어쨌든.
◇ 정관용> 어쨌든 그 분의 주장에 의하면 본인이 중간에 조정을 해서 정수장학회를 만들었다?
◆ 안경환> 5.16장학회가 나중에 정수장학회로 변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그게 부일장학회가 5.16장학회가 되고 정수장학회는 전두환 집권 이후에 그렇게 됐죠. 나중에는 그래서 거기에 배려차원에서 그런 부분에 자리를 좀 맡기도 하고.
◇ 정관용> 장학회 이사?
◆ 안경환> 네, 이사. 실체 이사 역할을 못했고요.
◇ 정관용> 별로 일은 없잖아요. 장학회 이사가. (웃음)
◆ 안경환> 그랬죠. 그리고 결국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 사람이 1918년생인데요. 1935년부터 일기를 썼어요.
◇ 정관용> 일기를?
◆ 안경환> 네. 그리고 죽을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장이 죽고 난 뒤에 저한테 왔어요.
◇ 정관용> 어떻게요? 안 교수님하고는 어떤 인연이 있는 겁니까?
◆ 안경환> 제가 64년 그때쯤 그 분의 행적에 대해서 특히 부산일보 주필 시절 아주 명문의 글을 썼거든요. 저희 중학생 때 굉장히 감명 받았어요. 그분의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때 이쪽으로 국제신문은 이병주라는 나중에 소설가가 된 사람이 있거든요. 그분들이 아주 쓰던 명문의 소위 칼럼들이 저희들 중고등학생들에게 영향을 줬죠. 그러다가 64년 필화사건이 소위 통일론 주장이 요새 그 이후에 늘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었죠. 그러다가.
◇ 정관용> 글로만 접했던 거네요. 그때는.
◆ 안경환> 글로만 접했죠. 그러다가 제가 87년에 교수가 되고 난 뒤부터 그때 이미 야인이 되어 있었어요.
◇ 정관용> 야인된 지 한참이죠.
◆ 안경환> 한참이죠. 그래서 제가 연락해 찾아갔죠.
◇ 정관용> 그냥 무턱대고?
◆ 안경환> 중간에 연락을 해서 찾아갔죠.
◇ 정관용> 그러니까 연락해서 저는 중학교 때 선생님의 글을 읽고 감명받았던 사람입니다. 이러고 가신 거예요?
◆ 안경환> 그런 것도 있고. (웃음) 그다음에 또 하나는요.
◇ 정관용> 또 뭐 있습니까?
◆ 안경환> 그리고 또 이분 고향이 제가 태어난 고향에서 처음에는 학교를 만드셨어요. 경남 밀양에서.
◇ 정관용> 밀양에서
◆ 안경환> 해방 직후에.
◇ 정관용> 학교를 설립했어요?
◆ 안경환> 자기가 돈이 있는 게 아니고 만들어서 초대 교장을 했죠. 그 전에는 뭐를 했느냐 하니까 해방 직후에는 학병에서 돌아와서. 옛날 김원봉이라는 분 아십니까?
◇ 정관용> 김원봉?
◆ 안경환> 북으로 간 민족주의자.
◇ 정관용> 남로당 분 아니에요?
◆ 안경환> 남로당은 아닌데요. 어쨌든 간에 그 당시 건국 초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죠. 북으로 간 분이요. 그 분의 민족주의 비서를 했죠. 그래서 이미 다 20대에 나라를 어떻게 만들겠다라는 생각을 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한 뒤에는.
◇ 정관용> 젊은 시절에는 상당히 좌파적 생각을 했군요?
◆ 안경환> 민족주의자죠, 좌파라기보다는.
◇ 정관용> 민족주의이면서 좌파적 민족주의.
◆ 안경환> 그 좌파는 모르겠습니다만 맑시스트는 아니었고요. 왜냐 하면 그때 어린 나이의 소위 독서회 사건은 그 당시는 맑시스트적인 성향이 있었는데. 이미 마르크스 보기에서 벗어나서 그다음에 문학청년이었고 나중에 굉장한 지적 세계를 가진 사람이었죠. 그러다가 어쨌든.
◇ 정관용> 어쨌든 거기에서 학교 초대교장을 했는데.
◆ 안경환> 그래서 그때부터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분에 대해서.
◇ 정관용> 그건 안 교수님이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거잖아요.
◆ 안경환> 그렇죠.
◇ 정관용> 어린 시절의 학교 교장으로 또 중학교 때는.
◆ 안경환> 제가 다닌 학교는 아니었고요.
◇ 정관용> 그러니까요, 보시기에.
◆ 안경환> 그렇지만 대체로 볼 때는 역사에서 한 분, 굉장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 정관용> 제가 여쭤본 거는 87년에 찾아갔다고 그러셨잖아요.
◆ 안경환> 네.
◇ 정관용> 그러니까 나는 어려서 밀양 출신인데 그때 당신이 교장이었고, 인근 학교의. 난 중학교 때 당신이 쓴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고. 그러니 한번 만납시다, 이렇게 한 거냐 이런 말이죠.
◆ 안경환> 그렇죠.
◇ 정관용> 집안 간의 인연은 없었어요?
◆ 안경환> 직접은 없었고요. 아버지하고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노선이나 개인적인 입장 같은 게 불편한 옛날 얘기가 있긴 있었죠. 그런 부분도 잠정적으로 얘기를 하고요.
◇ 정관용> 어쨌든 그래서 87년에 교수가 되고 바로 찾아갔더니.
◆ 안경환> 아주 반가이 맞아주고 오랜 동안 지내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 정관용> 대화를 나누고.
◆ 안경환> 옛날 시대에 대한 일제시대 얘기. 특히 일제 말기의 얘기를, 지식인들 얘기를 나도 관심이 있어서 제가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기도 하고. 그리고 바둑도 두기도 하고요. 그 분이 바둑에 굉장히 강해요. 그리고 한때 한국기원 이사장을 한 적도 있고요.
◇ 정관용> 그래요?
◆ 안경환> 그렇게 바둑을 두고. 그러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몇 차례씩 만난 셈이었죠.
◇ 정관용> 87년부터 97, 2001.... 14~15년 동안을.
◆ 안경환> 그때에는 이분의 전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고요.
◇ 정관용> 정신적 교감을 나누며 그냥 지내 오셨는데.
◆ 안경환> 네.
◇ 정관용> 그런데 그 일기장을 왜 가족들이 안 교수님한테 줬냐 이 말이에요.
◆ 안경환> 가족이 거의 없어요. 보니까 외국에 살고 계신데 지금 그 글을 둘 데도 없고. 그야말로...
◇ 정관용> 결혼도 안 했어요?
◆ 안경환> 누가요?
◇ 정관용> 황용주 씨가요.
◆ 안경환> 아니, 있습니다. 딸이 한 분 있는데.
◇ 정관용> 결혼도 했고 부인도 있고 딸도 있을 거 아니에요.
◆ 안경환> 그런데 딸은 외국 가서 살고. 또 마지막에 돌아가셔서는 묻힐 땅도 없고 무덤도 없어요. 그러니까 어딘가에서 이걸 맡겨서 처리해야 되겠는데. 그러면서 여러 가지.
◇ 정관용> 1935년부터 쓴 일기면 분량만 해도 대단하겠군요?
◆ 안경환> 네, 많죠. 그리고 처음에는 거의 해방 전까지 일기장은 일본어로 되어 있고. 해방 직후에 조금 있다가는요. 그리고는 결정적인 시기, 해방부터 중요한 시기에 가령 박정희 쿠데타 이런 시기의 일기장이 없어졌어요.
◇ 정관용> 없어요?
◆ 안경환> 네.
◇ 정관용> 제일 중요한 게 없네요. (웃음)
◆ 안경환> 그야말로 그 당시에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수사기관에서 가져간 걸로 지금 봅니다. 이 사람 64년 필화사건 때.
◇ 정관용> 필화사건 때.
◆ 안경환> 그렇게 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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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용> 일기장을 보니까 박정희 얘기가 자꾸 나오니까.
◆ 안경환> (웃음) 네.
◇ 정관용> 그랬겠군요.
◆ 안경환> 그래서 나중에 조갑제 씨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박정희 얘기를 쓰면서 계속해서 인터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보면 박정희 씨 얘기를 쓸 때는 각주 비슷하게 항상 황용주가 등장을 해요. 이분은 계속해서 얘기하는 게 자기가 실제 그 얘기를 쓰고 싶은데 평생 못 썼다고 생각하면서 돌아가셨어요.
◇ 정관용> 그래서 그 일기장을 2001년에 받아두셨다가.
◆ 안경환> 네.
◇ 정관용> 이 책을 써야 되겠다라는 생각은 언제, 왜 하게 되셨어요?
◆ 안경환> 일기장을 이걸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그러다가 보니까 개인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제가 일제 말기 지식인들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대체로 우리는 4.19 이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일제 말기 특히 군대에 갔던 사람은 전부 일제 역사라고 해서 한마디로 치욕의 역사라고 하고 그냥 버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분들이 당시 일제 말기의 소위 학병, 학도병이라는 것이 지원 형식입니다. 그런데 그때 1944년 1월 20일날 당시의 전문학교 이상, 사범계와 이공계를 제외한 문과 학생들이 전부 대상이었거든요.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4380명이 입소를 해요. 그중에는 김수환 추기경도 있고 그렇습니다. 여러 분 많이 있습니다. 남북한 동시에 이분들이 건국 세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죠. 몰랐는데 제가 배운 선생님 중에 여섯 분이 바로 이 학병 출신이더라고요. 몰랐어요, 그런 부분. 그런데 그 당시 수준들이 생각해 보니까, 황용주 씨를 통해서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준도 높고 스케일도 크고 그랬다. 그리고 학병도 여러 가지 개인에 따라서 행보도 다르고 하기 때문에.
◇ 정관용> 그렇죠. 45년 해방 이후 48년까지 해방 3년의 동안은 지식인들이 좌우파, 민족주의 다 나뉘어서 국가를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만들까. 정말 뜨거운 논쟁을 하던 시기 아니겠습니까?
◆ 안경환> 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학병세대 중에서 중심인물이 바로 황용주였습니다. 상해 시절 얘기도 거기에 장준하 선생이나 김준엽 선생의 얘기 중에서도 황용주 얘기 나오거든요.
◇ 정관용>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아주 천재로 이름 났었군요.
◆ 안경환> 서로 어쨌든 간에 그 분을 리더로 생각하죠, 입장은 달라도. 실제로 기록도 나오고 자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김원봉을 따라서 역할을 하다가.
◇ 정관용> 비서로서 활동하다가.
◆ 안경환> 비서하다가. 그러다가 김원봉이 물러나고 난 뒤에는 낙향해서 학교를 세우죠.
◇ 정관용> 학교 세우고.
◆ 안경환> 하다가 나중에는 부산으로 가서.
◇ 정관용> 언론인의 생활을 하고.
◆ 안경환> 언론인 생활을 하게 되고요. 그래서 그때 박정희를 다시 만나서 평소에 생각한 얘기를 계속했죠.
◇ 정관용> 이제 대충 다 꿰어지는데. 질문의 핵심은 왜 이걸, 이분의 전기를 책으로 써야 되겠다라고 생각하셨냐 이 말이에요.
◆ 안경환> 우선은 그랬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 이걸 저는 시대사로 써 보고 싶었고. 특히 학병 세대의 고뇌를 쓰고 싶었고 이거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어요. 서울대학교 김윤식 교수 한 분만이 문학을 가지고 하고 있었고요. 나머지는 다 관심도 없고 이래서 그 공백의 세월을, 소위 지성인들의 고민을 한번 써보자라는 생각이 있었고요.
◇ 정관용> 있는 그대로 낱낱이 한번 드러내보자.
◆ 안경환> 네. 개인적으로는 황용주 씨가 이렇게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고 그랬었는데 남은 게 뭐냐? 결국은 무덤도 하나 없이 죽었으니까. 소위 말하면 글로라도 이분의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 그런 개인적인 연민의 정이 있었죠. 그래서 썼습니다.
◇ 정관용> 참... 그리고 우리 안 교수님께서는 조영래 평전도 쓰셨었잖아요?
◆ 안경환> 네. 그건 2006년에 썼죠. 그때는 저와 동시대이기 때문에 그때는 동시대에서 한 법률가가. 청년법률가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상한이 뭐였고 하한이 뭐였나를 쓰고 싶어서요. 같이 살았던 사람이지만 저희들은 후세에 대해서 판단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 정관용> 한 인물의 삶을 통해 한 시대를 드러내 보고자 하는 그런 욕심 같은 게 있으시군요? 안 교수님이.
◆ 안경환> 네.
◇ 정관용> 평전이 지금 벌써 두 번째예요, 그러니까.
◆ 안경환> 조영래의 경우는 평전이라고 붙였고요. 왜냐하면 그건 저의 생각이 담겨 있으니까. 이 사람의 경우는, 이 경우는 그냥 전기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제가 평소에 만나고 한 사람들. 제가 교류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거든요. 박정희 뭐 이래서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 정관용> 쿠데타를 사주한 인물이니까요.
◆ 안경환> 그렇죠. 그러나 그쪽에도 보면 다른 논리가 있지 않겠냐. 그 사람의 입장에서, 뭔가 역사에서 기록을 한번 들어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정관용> 그냥 기록을 남기자?
◆ 안경환> 네.
◇ 정관용> 여기에 그러니까 안 교수님의 목소리가.
◆ 안경환> 저하고 생각을 달리한 분이 많이 있습니다.
◇ 정관용> 안 교수님 목소리는 이 책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 안경환> 직접 들어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 전체적으로 사람이 지성인, 지식인이라면 한쪽만 보지 말고. 양쪽을 다 보고 그쪽에서 제 얘기가 뭔지를 잘 들어보고 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 정관용> 그래서 황용주 그 분이 남긴 일기와 각종 자료들을 꼼꼼히 모으셨더라고요. 제가 책을 쭉 넘겨보니까.
◆ 안경환> 네.
◇ 정관용> 그래서 그의 논리와 그의 목소리를 쭉 들으신 거잖아요.
◆ 안경환> 네.
◇ 정관용> 그리고 그걸 정리해 주신 거잖아요.
◆ 안경환> 그렇죠.
◇ 정관용> 그랬더니 어떻던가요? 나쁜 사람이던가요, 좋은 사람이던가요? (웃음)
◆ 안경환> 사람의 이런 부분은 종합적으로 봐야 되는 것이죠. 공도 많고 과도 많고. 그렇지만 그럴 때는 역사, 오늘날 한국의 역사를 성공의 역사로 저는 봅니다. 민주화와 산업화 이 부분을 동시에 달성했으니. 어느 게 먼저냐 이건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겠지만요.
◇ 정관용> 하여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인 것만은 사실이죠.
◆ 안경환> 양쪽에 다 기회가 있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기여도 있는데. 이 사람은 군인도 아니었고 훈련에 미친 사람도 아니었고요. 한 지식인이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들이 얼마만큼 실제 현실권력에서 얼마만큼 더 비참하게 당했느냐.
◇ 정관용> 당하느냐.
◆ 안경환> 지식인의 비애도 숨어 있는 것이죠.
◇ 정관용> 이용당하고 또 버려지고.
◆ 안경환> 그럴 수도 있고요. 그러나 처음 당시에는 이 사람 생각은 박정희하고의 관계에서 둘이 같이 그 부분을 공범으로 생각했고요. 자기가 주범이고 박정희는 하수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 정도였었어요?
◆ 안경환> 네, 모든 것을 만들어준 사람이니까요. 끝에만 와서 계속 격려를 해 주고. 그리고 예를 들면 미국애들이 걱정할 때. 박정희 쿠데타 할 때, 미국 때문에 어떻게 하겠느냐 할 때. 절대로 미국이 개입 안 한다, 걱정하지 말아라.
◇ 정관용> 그런 것도 다 안심시켜 주고?
◆ 안경환> 다 기록에 나오죠. 보충해서.
◇ 정관용>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쿠데타 당일에 어떤 거사 계획을 짜는 데 관여하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 안경환> 네, 그건 안 했죠.
◇ 정관용> 그건 아니지만.
◆ 안경환> 실제로 쿠데타 하고 난 뒤에 이 사람이 구속됐어요.
◇ 정관용> 왜요?
◆ 안경환> 거기 자유당 때 많이 경찰들 비판하고 했기 때문에. 경찰이 잡아가서 소위 말하는 그때 반혁명, 그 당시의 사회 정화. 그걸로 구속이 돼서 몇 달간 고생했습니다.
◇ 정관용> 쿠데타 성공 직후에?
◆ 안경환> 네.
◇ 정관용> 박정희가 그걸 안 빼줬어요?
◆ 안경환> 나중에는 빼줬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정도로 그랬습니다.
◇ 정관용> 몰랐었던가요? 아니면 박정희가 일부러 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했나요?
◆ 안경환> 그건 아니고요. 어쨌든 그 당시에는 아직까지 하자마자 다 장악한 게 아니니까. 시간이 걸렸겠죠. 그리고 난 뒤 그다음에는 박정희가 옆에 있으니까, 너무 존재가 무거우니까 아래 분 그 사람들이 제거를 시켰죠. 김형욱의 회고록에도 나옵니다. 누가, 어떻게, 왜 제거시키느냐.
◇ 정관용> 그러니까 박정희를 도와서 쿠데타를 성공시킨 젊은 군인 출신들의 입장어서 볼 때는. 저 분이 박정희 대통령 옆에 있으면 저분이 모든 걸 다 하겠구나, 이런 겁이 났겠군요?
◆ 안경환> 뭐 그렇기도 하고요. 언론인이라 여러 가지 직언을 하니까 현실적인 정치체제에서는 많이 부담스럽겠죠.
◇ 정관용> 알겠습니다. 몰랐던 분인데 가만히 보니까 요즘 우리가 많이 얘기하는 정수장학회, 부산일보, 문화방송 MBC... 다 아는 데에 있었던 분이네요. (웃음) 워낙 옛날 분이라서.
◆ 안경환> 네, 사실 64년... 그렇죠. 세상이 빨리 변하니까요.
◇ 정관용> 안경환 교수는 그래서 그분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다. 생각을 같이 하건 달리하건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기는 해야 될 것 아니냐.
◆ 안경환>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 의미로군요.
◆ 안경환> 네.
◇ 정관용> 꼼꼼히 한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애 많이 쓰셨어요. 몇 년 걸리셨을 것 같아요.[BestNocut_R]
◆ 안경환> (웃음) 모르겠습니다. 한 10년 더 됐겠죠.
◇ 정관용> 고맙습니다.
◆ 안경환> 네.
◇ 정관용>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안경환 교수 보내드리면서 오늘 순서 정리합니다. 내일 뵙죠.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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