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2014년 8월 관계부처 합동으로 사적 연금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이 짧은 가입기간 등으로 노후소득 보장에 충분치 않다는 점을 고려해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대책에서는 퇴직연금 도입 후 10년 동안 퇴직연금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사항들을 일거에 개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정부, 퇴직연금 활성화 로드맵 내놨지만 지켜지지 않아각 기업에 대해 퇴직연금제도 도입을 기업규모별로 2016년부터 단계적으로 의무화해서 2022년에는 전면 의무화하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또 중소기업 퇴직연금 기금제도를 2015년 7월에 도입하고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는 2016년 7월부터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대로만 된다면 퇴직연금제도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근로자들의 안정적인 노후생활이라는 목표에 한걸음 다가서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하지만 이 대책 가운데 현재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대책 대로라면 중소기업 퇴직연금 기금제도는 이미 도입됐어야 하고 3백인 이상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도 올 1월부터 의무화됐어야 했다.
이 대책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도 2016년 7월부터 도입하려면 이미 상당한 준비가 진행됐어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 "선진국 대책 가져왔지만 보완조치 마련 안 돼"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의 대책이 선진국에서 좋다고 하는 대책은 다 모아놓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고민이나 준비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류건식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선진국에서 오늘날과 같이 퇴직연금제도가 뿌리내리게 된 것은 하루아침에 제도마련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30년, 50년, 백년에 걸쳐 하나씩 하나씩 이뤄낸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선진국에서 좋다고 하는 대책을 한꺼번에 시행하겠다고 욕심을 냈다. 그런 대책을 추진하려면 엄청난 보완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이 추진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가령 2022년까지 모든 기업에 대해 퇴직연금제도 도입을 의무화하겠다고 했지만 법적으로 강제한다고 해서 모든 기업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퇴직연금제도를 시행하려면 퇴직금에 대비한 퇴직급여 충당금이 내부에 쌓여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당수의 기업들은 이를 장부상으로만 갖고 있을 뿐 운영자금으로 거의 다 소진한 상태다.
자금난에 몰리는 영세중소기업들은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기업은 법으로 강제한다고 해도 퇴직급여 충당금을 마련할 길이 없다. 퇴직연금제도가 그림의 떡인 셈이다.
◇ "영세중소기업, 의무화시 차라리 과태료 물것"업계의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제도를 의무화해서 도입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 과태료를 물린다해도 도입할 수 없는 영세중소기업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 기업은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기 보다는 차라리 과태료를 무는 쪽을 택할 것이다. 이들 기업에게는 퇴직급여 충당금을 다 마련하는 것보다 과태료를 무는 쪽이 더 싸게 먹힌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퇴직연금제도를 의무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도입할 수 없는 기업의 속 사정이 어떤지, 그에 대한 대책부터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기업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근로자의 노후생활보장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고 영세중소기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을 도입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린다는 식으로 강제로 몰아부칠 만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도입할 경우 세제지원을 하는 등의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도입을 늘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류건식 선임연구위원은 "호주와 같이 퇴직연금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된 나라를 보면 세제지원과 같은 인센티브를 통해 기업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도록 유도했다. 법적인 강제력으로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다만 "세제지원을 할 경우에도 연금제도의 적용을 받을 수 없는 층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지원의 폭을 결정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이태호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강조했다.
정부가 사적 연금 활성화 대책으로 발표한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현행 계약형 퇴직연금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대책으로 꼽힌다.
현행 계약형 퇴직연금제도 아래서는 퇴직급여를 일시금으로 받아가고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기업(DB형)이나 근로자 개인(DC형)이 수익률이 낮은 원리금보장상품으로 기우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됐지만 무늬 뿐이라고 놀림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는 국민연금과 같이 퇴직연금 적립금으로 별도의 기금을 만들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관리,운용하는 위원회를 두도록 돼있다.
이 제도 아래서는 장기간에 걸쳐 적립금을 운용하고 그런 만큼 주식과 같은 실적 배당 상품에도 투자할 수 있어 수익률도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다만 이 제도가 도입되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각 기업과 근로자 등을 대상으로 이 제도가 근로자의 노후생활 안정을 위해 필요한 제도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홍보할 필요가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도입하고 참여해야 하는 당사자가 바로 기업과 근로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뛰는 관계부처 공무원들의 자세가 요청된다.
◇ "공무원 이해관계가 달렸다면 방치되지 않았을 것"로드맵에 나와있는 시간이 다 됐지만 전혀 준비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은 공무원들의 대처에 문제가 있다는 따끔한 지적도 있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공무원들에게는 자신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들에게는 공무원연금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퇴직연금이 자신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문제였다면 퇴직연금이 과거 10년간이나 그 이후 대책추진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이렇게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다 큰 차원에서 퇴직연금제도의 관리, 감독의 문제도 있다.
퇴직연금제도는 주무부처가 고용노동부이다. 근로자의 퇴직급여와 관련된 만큼 고용노동부가 주무부처인 것은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 제도는 근로자의 퇴직 이후 노후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연금에 대한 것인 만큼 복지적인 측면도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총리실 산하 연금감독청 관리일원화도 필요"
이런 점에서 퇴직연금 관리, 감독을, 국민연금과 개인연금까지 포함해 총리실 산하의 별도의 연금감독청에서 맡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태호 교수는 “현재는 퇴직연금은 고용노동부,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 개인연금은 금융위 등으로 나뉘어 관리, 감독되고 있어 국민의 노후생활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전문성과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 연금을 총리실 산하의 별도 연금감독청에서 통합해 관리 감독하고 해당 부처가 이에 협력하는 구조로 가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법정 퇴직금 제도와 퇴직연금 제도가 동시에 시행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다.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기 전부터 법정 퇴직금 제도를 통해 근로자의 노후생활을 대비했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법정 퇴직금 제도가 퇴직연금제도의 활성화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길어진 노후생활을 안정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제도로의 일원화가 불가피하고 퇴직연금제도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범 정부적인, 범 사회적인 인식개선과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