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요즘 한국인들은 분통이 터진다.
영국의 옥시레킷벤키저는 자사의 가습기살균제로 영유아, 임산부 등 103명이 사망했지만 5년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 올해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한국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이 시작되고 나서야 뒤늦은 사과와 배상에 나섰다.
독일의 폴크스바겐은 디젤 차량 배출가스 조작으로 피해를 본 미국 고객들에게 무상 수리 등 외에 별도로 배상금 153억3300만 달러(약 17조8000억원)를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 고객에게는 임의설정(배출가스 조작장치 설치) 금지 법규가 생기기 이전이라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스웨덴의 이케아는 미국에서 6명의 사망자를 낸 서랍장 3560만개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리콜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선 사고가 없었고 제품 자체는 안전하다며 리콜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면 글로벌기업들이 한국과 한국 소비자를 '영원한 봉', '글로벌 호갱(호구 고객)'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 대륙법의 함정…집단소송‧징벌적 손배제 도입 요구 고조 글로벌기업들이 한국 소비자를 무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법 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영미법 체계를 따르는 미국은 소비자들의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한다. 소비자 한 명의 배상 판결은 모든 소비자에게 적용되고 손해배상액도 실제 피해액의 3~10배를 배상하도록 한다. 아예 한도가 없는 주(州)도 있다. 이 과정에서 기업 내부자료까지 제출해야 한다.
기업들이 재판까지 가기 전에 적극적으로 합의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유럽 대륙법 체계를 따르는 우리나라는 소비자 개인이 일일이 소송을 해야 하고 손해배상도 실제 피해액만 받을 수 있다. 심지어는 기업의 불법이나 과실을 소비자가 직접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유럽은 행정부 규제를 통한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춘 건데 한국 정부는 일련의 사태에서 면피와 책임 회피 등으로 일관해 소비자 피해를 오히려 확대시켰다.
이에 따라 영미법 체계의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사후 처벌을 강화해야 사전 예방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김선휴 변호사는 "사회가 급속도로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정부의 감시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시기상조라는 반대명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면서 "기업을 처벌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경고와 억제 효과를 통해 사전에 불법행위를 막는 강력한 예방 조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여연대는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에 참여한 시민‧사회단체들의 동의를 얻어 정치권에 관련 입법을 강하게 요청할 예정이다.
◇ 3野 "반드시 도입", 與 "공감하나 신중해야"
더민주 변재일 정책위의장, 국민의당 채이배 의원 (사진=자료사진)
야권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징벌적 배상법안'(박영선 의원), '제조물책임법 일부개정안'(백재현)을 발의했다.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은 제조물에 한정했고 징벌적 배상법안은 손해배상액 한도를 실제 피해액의 3배로 정했다.
더민주는 더 나아가 법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 모든 소비자 피해에 적용하고 손해배상액도 자산이나 매출의 일정 비율만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 법을 개정하느냐 별도 특별법을 제정하느냐도 논의 중이다.
더민주 변재일 정책위의장은 "최근 옥시 사태 등을 겪으면서 이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좀더 강하게 요구하고 소비자 피해를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되고 있다"면서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는 전제 아래 세부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김성식 정책위의장 역시 "지금 상황에서 집단소송제 등의 도입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도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안 발의를 준비중인 같은 당 채이배 의원은 "소비자들이 실질적인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놓아야 기업들이 이윤만이 아닌 소비자 권리에도 한층 주목하게 될 것"이라며 "기업에 입증 책임 부여, 국민참여재판의 민사소송 도입 등을 포함한 법안을 조속한 시일 내에 발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여당인 새누리당이다. 새누리당이 129석으로 줄어들었지만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반대로 거대 야당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새누리당도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도입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집단소송 범위나 손해배상 한도에 대해서는 '기업활동을 위축시켜서는 안된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새누리당 김광림 정책위의장은 "정리는 돼 가지만 많이 나가지는 못한다”면서 “짚어볼 곳이 많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김광림 정책위의장
야당은 다음주 임시국회가 끝나는대로 본격적인 법제화 작업에 착수해 이르면 9월 정기국회, 늦어도 올해 안으로는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여당이 협의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