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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볼 낯 없는 덕혜옹주…영화에 가려진 경술국치"

문화 일반

    "백성 볼 낯 없는 덕혜옹주…영화에 가려진 경술국치"

    "조선 왕족이 독립운동 했다고 믿고 싶지만…"

    - 실존인물을 너무 과감히 왜곡, 거의 날조 수준
    - 덕혜옹주의 굴곡진 삶 그대로 그렸어야
    - 조선 왕실, 자기 신분 보장받고 국가 주권은 넘겨
    - <덕혜옹주>는 허구 위에 세워진 '워너비'
    - 해방 후, 친일의 삶 살았던 조선황실 입국 거부
    - '우리 옹주님'에 대한 연민…회고적 정서 담아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8월 29일 (월) 오후 7시 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황진미 영화평론가

    ◇ 정관용> 8월 29일 오늘이 우리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일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극장가 지금 ‘조선 마지막 황녀’ 이런 타이틀을 단 ‘덕혜옹주’가 인기를 끌었죠. 현재 누적 관객 수 530만명을 돌파했다고 하고요. 그런데 이 ‘덕혜옹주’가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이런 논란에 휩싸여 있기도 합니다. 오늘은 영화평론가 황진미 씨 초대해서 이 두 영화를 둘러싼 논란 어떤 것들인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 씨 어서 오십시오.

    ◆ 황진미> 네, 안녕하세요.

    ◇ 정관용> 실제 덕혜옹주라는 실존인물이 있긴 있었죠?

    ◆ 황진미> 당연히 있죠. 1912년생이고요. 1989년에 사망을 했습니다. 이 실존인물에 대해서는 역사가 아주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신문자료라든지 이런 사료로써 이 인물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 인물에 대해서 마치 신라시대 사람이나 고려시대 사람처럼 많은 없었던 사실을 윤색을 해서 넣는다고 하면 사실 당장 어떤 것들이 확인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한 실존인물, 그것도 얼마 오래 되지 않은 실존인물에 대해서 너무 과감할 정도의 왜곡을 감행했다. 거의 왜곡의 수준이 아니라 날조의 수준이다라고밖에 볼 수 없거든요.

    ◇ 정관용> 조금 소개해 주시죠. 우선 실제로 덕혜옹주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고종의 막내딸이었죠?

    ◆ 황진미> 그렇죠. 고종이 환갑이 넘어서 늦게 후궁, 사실 후궁이라기보다는 궁녀에게서 얻은 자식이고요. 환갑이 넘어서 막내딸을 얻었기 때문에 굉장히 애지중지했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것이 1912년이라서 지금의 경술국치보다 2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고종은 경술국치 이후에는 어떤 삶을 살았나? 또는 덕혜옹주는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인데 어떻게 옹주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나? 라는 것이 의문스러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경술국치 때 어떤 조약이 한일 간에 이루어졌었는가에 대해서는 역사책에서도 자세히 배우지 않았습니다. 사실 거기에는 약간 껄끄럽거나 혹은 부끄러운 것이 숨어 있기 때문이죠.

    ◇ 정관용> 어떤 거요? 그 조약문은 다 공개되어 있죠?

    ◆ 황진미> 물론 공개되어 있습니다. 포털에 가셔서 한일병합에 대한 조약문을 찾아보시면 8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 정관용> 8개.

    ◆ 황진미> 네. 그중에 상당수가요, 왕실의 어떤 신분을 보장한다라는 것.

    ◇ 정관용> 조선왕실.

    ◆ 황진미> 그렇죠. 조선왕실이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황실의 그 아래로 복속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왕가, 이 왕족이라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또 약간의 방계의 사람들은 공족이라고 해서 왕족과 공족으로 편입되게 되는 것이죠. 일본의 황실, 화족 체제에.

    ◇ 정관용> 휘하에.

    ◆ 황진미> 그렇죠. 그렇게 된다는 것은요, 사실 경술국치라는 것이 민족 대 민족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지극히 수치스럽고 우리가 병합을 당하는 것이다라고 볼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그 와중에서 지배계층이 자신의 안위를 걸고서 사실은 자신들의 어떤 신분은 보장을 받으면서 국가적인 어떤 주권은 넘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는 정말 고종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앞으로 일본에 의해서 조선이 부강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이완용 같은 그런 신하가 이야기를 하니까.

    ◇ 정관용> 매국노들이.

    ◆ 황진미> 그렇죠. ‘너네는 그렇겠지. 너네는 그러하겠지. 너네는 부자가 되겠지.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그렇지 않지 않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고종 자신도 경술국치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이 왕가라는 곳으로 보존을 받고 그리고 막대한 세비를 조선총독부로부터 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죠.

    ◇ 정관용> 재정지원도 받고.

    ◆ 황진미> 그렇죠. 재정지원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어쨌든 그런 합의에 의해서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고 또 다른 조항에는 신하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훈장을 주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8개 조항 중에 3개 항목이 다 왕실과 그 신하들에게 무엇무엇을 준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일본은 아마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이 강제로 조선을 침탈한 게 아니고 조선왕실과 서로 의견이 맞아서 된 거다, 이렇게 선전하는 거겠죠.

    ◆ 황진미> 그렇죠. 일제강점기 내내 이 조선왕실이 일본 지배자들에게는 바로 그러한 선전의 도구로써 사용이 된 것이죠. 죽이지 않고 놔뒀던 이유는 계속해서 영친왕을 이방자 씨와, 그분도 일본황실의 자손이죠. 그렇게 결혼시킨 것을 대대적으로 대내외에 홍보를 했다든가 사실 덕혜옹주도 그런 방식으로 강제 국제결혼을 하게 된 것인데 그런 식으로 내선일체다. 그리고 이것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국제사회에도 계속해서 선전을 하고자 했던 것이죠.

    ◇ 정관용> 그런 조항들로 고종뿐 아니라 덕혜옹주에 이르기까지 왕족들은 계속 세비지원을 받으면서 풍족한 삶을 살았다.

    ◆ 황진미> 그렇죠.

    고종 황제의 마지막 가족사진. 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 엄씨.덕혜옹주. 촬영시기는 1915년경으로 추정된다.

     


    ◇ 정관용> 그리고 실제 덕혜옹주는 1912년에 태어나서 몇 살 때 일본으로 갔죠?

    ◆ 황진미> 14세에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 정관용> 14살 때.

    ◆ 황진미> 네. 그러니까 그 전에는 고종이 애지중지하면서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최초의 왕립유치원이죠. 유치원을 세워서 거기를 다녔었던 것이고요. 그 이후에는 일본인이 세운, 경성에 일본인이 세운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보면 청소년기에 이른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보내온 옷을 입지 않겠다. 민족의 자존심, 내가 그래도 일국의 황녀인데 어떻게 일본 옷을 입느냐?’ 라고 하면서 돌려보낸다거나 하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요. 실제 당시의 신문사료 등등을 보면 지금 매일신문 자리, 그러니까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가마를 타고 가면서 일본 옷을 입고.

    ◇ 정관용> 기모노를 입고.

    ◆ 황진미> 그렇죠. 하오리에 게다 차림으로 그렇게 가마를 타고 등하교를 했었던 그런 기록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참 희한하게도 덕혜옹주라는 사람이 지극히 영화화될 수 있는 어떤 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는 것은 저는 동의해요. 그 당시에 어떻게 국운이 기울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의 시작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황족의 개인의 삶을 이렇게 짓밟고 침탈해나갔는가라고 하는 것으로써 조명을 했다고 하면 저는 그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결국 일본으로 가서 일찍이 정신분열증, 요즘 조현병이라고 하죠.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했던 그 삶에 있어서의 굴곡들, 어떤 쓸쓸한 한 개인의 삶 이런 것에 조명을 했다고 하면 그것도 저는 굉장히 문학적이기도 한 그런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 정관용> 실제 삶을 충분히 그려도 하나의 영화가 된다.

    ◆ 황진미> 그렇죠.

    ◇ 정관용> 그런데 어떻게 그렸다는 거죠?

    ◆ 황진미> 그런데 그렇지 않고 전혀 없었던, 그러니까 일본에 의해서 사실 꼼짝할 수 없었던 그 개인의 삶에서 그 사람이 굉장히 순간순간마다 떨쳐 일어나서 일제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내가 조선의 마지막 왕녀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그러니까 일제에 의해서 일본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강제로 해야 되는, 일본친화적인 내용을 해야 되는 자리에서 처음에는 그렇게 하려고 하였으나 ‘여러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 힘을 내십시오’ 이런 식으로 동포들을 위무하는 그런 내용으로 연설을 했다는 식의 전혀 있지 않은 사실을 덧씌워서 어떤 조선황실의 한 인물이 독립운동을 했다라는 이야기를 일종의 어떤 정신승리적인, 그러니까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으로 만듦으로 해서 현재 우리가 위안을 느끼고 싶어 하는 워너비죠, 워너비. 없었지만 과거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을 덧씌워서 전혀 그렇지 않은 삶에다가 그 사람을 하나의 항일적인 민족의식이 뛰어난 선각자적인 삶을 산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한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 정관용> 실제로 조선왕실은 일제시대 내내 조선 민중들과 완전 괴리된 삶을 살았고 혜택 받고 살았기 때문에 해방되면서 조선황실은 어떻게 보자면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국민들로부터 배척당한 것 아닙니까?

    ◆ 황진미> 맞습니다. 잘 자료를 찾아보면 왕실인물들 안에서도 의친왕이라든가 이런 사람은요. 실제로 1919년 11월에 신의주까지 가서 압록강을 건너서 망명을 하려고 했었어요. 1919년 3.1운동 이후에 직후에 4월달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 정관용> 그렇죠.

    ◆ 황진미> 거기에 합류하고자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 정관용> 의친왕.

    ◆ 황진미> 네, 의친왕. 고종의 생존한 자식이 4명인데 그중에 둘째 아들인 것이죠. 셋째가 영친왕이고 첫째가 순종인 것이고 막내가 덕혜옹주인 것인데 그 살아남은 4형제, 남매 중에서 둘째라고 할 수 있는 의친왕은 그런 어떤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그 사람을 내세워서 ‘자, 봐라. 그래도 조선왕실 중에 이렇게 독립운동에 뭔가 조금이라도 참여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지 않느냐?’ 라고 했다면 저는 그것은 또 성립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의 어떤 망명기도 사건을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사건으로 영화 안에서 다뤄버립니다. 그런 것이고요.

    ◇ 정관용> 영친왕은 실제로 일본황실의 이방자랑 결혼을 해서.

    ◆ 황진미> 결혼을 했었고.

    ◇ 정관용> 그 결혼한 것 때문에 상해임시정부는 굉장히 비판하고 그랬었잖아요.

    ◆ 황진미> 굉장히 비판을 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기간지로 나오는 독립신문에 그런 식의 기사가 실렸어요. 저도 그 기사를 읽어보고 놀랐는데 이런 거죠. 나라가 망했을 때 죽지도 못하고, 실제 그런 말이 있습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참여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지도 못하고 일찍이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니 뭐니 해 가면서 이런 식의 수치스러운 결혼을 하느냐’ 이런 식의 이야기가 실려 있거든요. 그런데 일본은 그 결혼을 굉장히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었던 것이고. 그 이후에도 참 재미있는 사건이 1927년에 영친왕을 납치하려던 사건이 미수사건이 있습니다. 납치.

    ◇ 정관용> 누가 납치를 하려고?

    ◆ 황진미> 임시정부 쪽에서 납치를 하려고 한 것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순종이 사망하고 나서 이왕에 올랐거든요. 영친왕이 드디어 왕이 됐는데 그때 일본 백작의 신분으로 위장을 해서 유럽 유람을 떠나는 첫 기착지가 상해였는데 그 상해에서 하룻밤을 잔다는 소식을 듣고 납치를 해서 훈계를 하려고 했다고 해요.

    ◇ 정관용> 임시정부가.

    ◆ 황진미> 임시정부 쪽에서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살면 어떡하느냐라는 것을 훈계를 하려고 했는데 그 기밀이 새나가서 그것은...

    ◇ 정관용> 실패했군요.

    ◆ 황진미> 네, 이 사람이 상해에 아예 내리지도 않고 일본 군함에서 하룻밤을 자고 떠나는 바람에. 그런데 거의 유럽에 가서는 서로 훈장 주고 훈장 받고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귀족놀음을 하고 또 골프여행을 다니고 실제로 그러했죠.

    ◇ 정관용> 일본 백작 신분으로.

    ◆ 황진미> 위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조선의 왕이다’ 이래 버리면 이왕이라는 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그냥 일본 백작의 신분으로 위장을 했다는 것이죠.

     

    ◇ 정관용> 이런 등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어서 실제로 덕혜옹주 같은 경우 해방되고 한국으로 오려고 했는데 거부당하지 않았나요?

    ◆ 황진미> 그렇죠. 1945년도에, 이 영화 안에서도 그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나오는데요. 입국거부가 됐었습니다. 덕혜옹주뿐만 아니라 영친왕도 그랬었고요. 사실 그 당시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의 국적관계가 굉장히 모호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이 영화 안에서 그런 대사도 나오거든요. 덕혜옹주가 ‘우리가 왕실이 지금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관여를 하지 않는다면 해방이 된 이후에 우리가 조선 민족을 볼 낯이 있었느냐?’ 이런 말을 정말 합니다. 과연 맞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 겁니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내내 굉장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줬고 심지어 거기에서 영친왕이라든가 이런 왕족의 남성들은 대부분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일본 장교로서 살아갔던 것이고요. 덕혜옹주처럼 일본 대마도 출신의 귀족과 결혼을 함으로써 민중들의 삶에서는 거의 잊히다시피 했던 것이죠. 그런데다가 이승만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임시정부에 관여했던 사람이고 독립운동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친일로 삶을 살았던 조선황실에 대해서 다시 입국하는 것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았던, 관여하지 않았던 면이 있었던 거죠.

    ◇ 정관용> 그런데 덕혜옹주를 마치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이 영화가.

    ◆ 황진미> 그렇죠.

    ◇ 정관용>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 황진미> 저는요, 이것이 굉장히 어떤 회고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정관용> 회고적 정서.

    ◆ 황진미> 그러니까 이를 테면 어찌됐든 황실의 그런 아리따운 옹주로 태어나셨는데 뭔가 굉장히 연민, 그러니까 뭔가 안됐지 않느냐. 귀하신 몸인데. 이렇게 나라가 기울다 보니 인생이 쓸쓸해졌는데 그것이 굉장히 안됐지 않느냐. 이 영화 안에서도 계속 거기에 나오는 일반 사람들이 ‘아이고, 우리 옹주님, 옹주님’ 이러면서 ‘어쨌을까’ 이러면서 불쌍, 가련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의 대통령이 왜 당선이 되었는가라는 것도 살펴봤을 때 국민들의 정서 안에서는 ‘아유, 그래도 뭐 청와대에서 지내셨던 분인데 뭔가 자기 옛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 정관용> 그런 정서가 있죠.

    ◆ 황진미> 옹주, 우리 공주님 이런 정서가 지금도 사실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이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것 속에는 대한민국이 어떤 방식으로 이 공화국이 섰는가. 그러니까 계속해서 조선이 망하는 그 과정, 대한제국이라는 것이 몰락하는 그 과정.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굉장히 뼈아프게 살펴봐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것을 세웠고 그 이후에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통해서 지금의 어떤, 우리 헌법전문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써 있죠.

    ◇ 정관용> 그렇죠.

    ◆ 황진미> 그것의 정신을 살리는 방식으로 어떤 공화국의 가치를 생각하기에 지금 굉장히 그 가치가 흐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계속해서 과거 회고적인 어떤 왕실의 무엇인가를 끌고 오고 그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 속에서 계속해서 정당성을 외부로부터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죠. 이 영화에서도 내부에서 뚜렷이 말하기를 ‘실제로 독립운동에 전혀 참여를 하지 않는다면 그 이후에 무슨 낯으로 보겠습니까?’ 라고 했던 바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거기에 또 그런 대사도 나옵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게 되면 그쪽으로 가봤자 지금 일제로부터 이렇게 잘 대접받고 살고 있는데 그만한 대접을 못 받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왕족도 나와요. 실제로 이건 영친왕이 마지막에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기록에 있는 것입니다. 실제 왕족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민족의 삶은 어떻게 되든지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인 것인데 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어떤 세습, 로열티. 그러니까 어떤 귀족으로 이렇게 내려오는,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어떤 위계질서 이런 것을 계속해서 기리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여기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거죠.

    ◇ 정관용> 그렇군요. 그렇죠. 일제에 복속됐다가 해방되면 만약에 조선왕실이 정말 민중의 편에 제대로 섰다면 해방이 곧 조선왕실의 복원이 될 수도 있어야 하는데.

    ◆ 황진미> 어떤 나라에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 정관용> 우리는 전혀 그게 아니죠. 조선민중과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투사들이 왕실을 준엄히 꾸짖고 왕실을 끝내버린 거죠.

    ◆ 황진미> 그렇죠.

    ◇ 정관용> 그러니까 우리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대한민국으로 45년에 해방이 된 거죠. 민주공화국, 왕실이 아니라. 거기에서도, 그 역사적 사실에서도 그 왕실들이 일제시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가 다 드러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냥 불쌍한 우리 옹주. 게다가 참 이렇게 독립운동도 하고 참 착했던 옹주. 이런 사람 하나 갖고 싶은 거죠.

    ◆ 황진미> 그렇죠.

    ◇ 정관용> 허구로라도.

    ◆ 황진미> 허구의 아이돌을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 정관용> 허구의 아이돌.

    ◆ 황진미> 그러니까 그 당시에 가령 기모노를 입고 소학교를 다니던 그런 덕혜옹주는 일본에 의해서 아이돌처럼 그렇게 선전이 되었습니다.

    ◇ 정관용> 일본 사람들한테...

    ◆ 황진미> 네, 선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시를 일본어로 지으면 거기에다 노래를 붙여서 부르게 한다든가 계속 신문에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오게끔 한다든가 사실 아이돌로 소비된 면이 있었죠. 그런데 그것을 지금에 와서는 뭔가 지금 우리가 뭔가 있었으면 좋겠는 어떤 허구적 아이돌을 덕혜옹주에게 덧씌워서 구상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 정관용> 좀 제대로 정확한 사실을 알 건 알고 또 영화는 영화로 보더라도 그렇게 봐야 될 것 같네요.

    ◆ 황진미> 그렇죠.

    ◇ 정관용> 덕혜옹주를 둘러싼 역사왜곡 논란 오늘 좀 정리를 해봤습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 씨 고맙습니다.

    ◆ 황진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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