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골든 타임 : 생과 사의 갈림길'은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병원이라는 전쟁터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전 대한의사협회장이자 흉부외과 의사인 저자 노환규 가 그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이곳에서 의사들이 어떤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 또 어떤 문제들이 의사들이 선의 전투를 방해하고 있는지 제도적인 문제들을 함께 언급했다.
저자는 자신이 환자가 되어 바라본 병원, 3번의 사망선고를 받았던 아들의 보호자로 바라본 병원, 그리고 자신이 의사가 되어 환자를 바라보는 각각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또한 부록으로 엮은 의료사고와 의료제도에서는 의료법에 대한 억울한 이야기 '가운 입은 의사의 1인 시위', 의료제도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진주 의료원 이야기', 혼돈의 시간이었던 '메르스 그 후'를 통해 의사이자 의사협회장의 입장에서 바라본 의료계의 문제점과 제도적인 측면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1997년, 의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일명 ‘보라매병원’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 '무의미한 연명치료'라는 뜨거운 이슈로만 남았다. 하지만 2016년 1월 8일, 일명 '존엄사법' 또는 '웰다잉well-dying 법'으로 불린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존엄사법은 더 이상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2014년, 중동지방 출장을 다녀온 60대 남성이 메르스에 걸렸다. 그를 시작으로 메르스는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고 전 국민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를 대처하는 정부의 방식은 매우 미진했으며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져만 갔다.
일련의 두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의료제도의 문제점과 허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자리인 제도 앞에서 이제는 왜?라는 물음을 가지고 그 이면의 문제점들을 바라봐야 한다. '2시간 대기, 3분 진료' 시스템과 의료수가 문제, 의료사고를 낼 수밖에 없는 의사들의 환경과 초과근무 등의 병원 시스템은 달라진 게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오는 의료제도의 문제점들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말한다.
책 속으로
나는 처음에 아이가 살기만을 바랐다. 두 번째는 앞을 볼 수 있기를 바랐고, 세 번째는 걸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다음엔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아들이 되기를 바랐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지금, 나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감사를 배웠다._(35쪽, ‘그러나 아이는 죽지 않았다’)
온 나라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한 사람의 생명이 아무런 권한도 없는 흉부외과 1년차 레지던트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환자 곁을 지키며 혈액백을 짜고 점차 생명을 잃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언론에서도 의료진이 가망 없음이라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상당수의 카메라가 철수되고 응급실엔 고요가 찾아왔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쓸쓸하게 내 품에서 운명했다.
_(42쪽, ‘지강헌, 그의 마지막 4시간’)
환자를 위한 배려는 결국 재앙으로 돌아왔다. 성탄절이 지난 어느 늦은 밤 신부님이 고열로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염증이 심장 주위로 퍼진 상태였다. 상처는 벌겋게 홍조를 띠고 있었고 신부님은 패혈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외출했던 며칠 사이 염증이 확 퍼진 것이다. 신부님은 성탄절에 감당해야 할 업무를 외면하지 못하고 발열이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병원에 오지 않고 업무를 본 것이다. 패혈증에 빠진 신부님은 결국 2주 후에 돌아가셨다. 교수님과 나를 비롯한 모든 의료진들은 환자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후회하고 안타까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마도 신부님이 교수님과 지인인 VIP가 아니었다면 의료진들은 그의 외출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_(99쪽, ‘특별한 부탁’)
뇌를 크게 다친 한 남자가 보라매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서는 보호자를 찾을 수 없었지만 일단 응급수술을 했다. 다음 날, 환자의 부인이 나타나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계속할 수 없다며 퇴원을 요구했다. 의료진은 극구 반대했지만 끝내 환자 부인의 강력한 요구를 꺾지 못하고 ‘환자의 죽음에 대해 병원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은 후 가족의 요구대로 인턴이 환자를 집으로 데려 가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환자는 곧 사망했다.
_(118쪽, ‘몇 년이나 더 살까요’)
“선생님, 이거 묶다가 터지는 거 보신 적 있으세요?” 교수님은 “딱 한 번 봤지”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그러자 교수님은 “몰라, 어휴 …” 라며 고개를 절레 흔들면서 대동맥관을 묶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수술 부위가 빨간 피로 순식간에 차올랐다. 대동맥관을 묶을 때에는 실의 쓸림에 의해 대동맥관이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두 손을 함께 넣어서 양측 손가락에서 균일하게 힘을 가해 묶어야 하는데 교수님이 나와 얘기를 하다 깜빡 했던 것이다._(153쪽, ‘아찔했던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