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지난해 3월 김영란법이 국회본회의를 통과되자 참여연대는 "김영란법은 하루아침에 나온 법안이 아니라 부정부패를 없애려는 시민사회의 오랜 요구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김영란법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기까지 20여년간 시민사회의 노력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20여년간 노력'이란 다름 아닌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시민사회가 벌여온 반부패 활동을 말한다.
대한민국 대형재난사고의 원인은 부정부패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시민단체들은 그 기간 동안 입법청원, 집회, 기자회견, 농성 등 다양한 반부패 캠페인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국회의원들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벌였고, 주요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부패방지법 제정을 공약하도록 압력을 가했음은 물론이다.
그 같은 과정 끝에 김대중 정부 후반기인 2001년 6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 옛 부패방지법이다.
지금의 국민권익위원회의 전신인 부패방지위원회가 바로 부패방지법에 의해 출범된 국가기관이다.
부패방지법은 이후 2008년 2월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가청렴위원회(부패방지위원회 후신) 및 행정심판위원회가 국민권익위원회로 통합됨에 따라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법'으로 대체돼 지금의 김영란법 산파 역할을 하게 된다.
김영란 전 권익위원장이 자신의 이름을 딴 김영란법을 부패방지법으로 고쳐 불러 달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그런데 2001년 당시 부패방지법 제정에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 다름 아닌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박 시장은 1995년부터 부패방지법이 제정된 이듬해인 2002년까지 8년간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있으면서 부패방지법 제정 운동을 주도했다.
그 시절 이와 관련된 각종 토론회의 단골 발제자로 나선 것도 박원순 시장이었다.
변호사이기도 했던 그는 당시 싱가포르의 부패 방지 사례 등을 설파하면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부패 문제의 척결 방안을 주창했다.
그는 부패방지법 제정 즈음에 마련된 2001년 6월 한 토론회에서 "그 동안 참여연대가 개최한 부패방지법 관련 토론회만도 20여회, 그중 국제사례 비교를 위한 해외인사 초청 토론회도 5회, 부패방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종교계 지도자들의 시국선언만도 5회,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한 집중 캠페인도 5회에 이른다"며 소회를 나타내기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하지만 당시의 부패방지법은 △대가성 업무연관성 입증 불능시 금품수수 처벌불가 △공직자 윤리규정 제외 △부패방지원원회의 조사권 미약 △ 공익제보자 보호 장치의 미비 등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는 2002년 참여연대를 떠나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로 적을 옮긴 뒤에도 이런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활동을 중단 없이 이어간다.
그 같은 노력은 2005년 주식백지신탁제도 도입(공직자윤리법), 2009년 이해충돌 방지 의무화(공직자윤리법), 2011년 공익신고보호법 제정, 2014년 퇴직공직자취업제한 제도 강화 등의 성과로 이어졌다.
2011년 6월 '한국사회 부패방지제도 10년 평가와 앞으로의 과제' 토론회에서 부패방지법 제정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강연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박 시장은 시민단체 활동을 마감하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인 그해 10월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박 시장은 서울시장직에 취임한 이후 이제는 행정가로서 서울시의 청렴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김영란법의 제정에 숨은 디딤돌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은 박원순 시장이다.
김영란법이 처음 공식화 된 것은 잘 알려진 바처럼 2011년 6월 당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이 국무회의에서 보고한 '공정사회 구현, 국민과 함께하는 청렴 확산 방안'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는 이른바 '벤츠 여검사'가 사회적 이슈가 됐던 상황이었고 그 전해에 발생한 '스폰서 검사' 사건으로 공직자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적 원성이 자자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부 입법으로 성안된 이 법안이 정부 내부 논의 과정을 거쳐 국무회의를 최종 통과(2013년 7월)하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부처 간의 이견 때문이었지만 국회에 제출된 이후에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법의 적용 대상이 광범위하고 위헌소지가 있다는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이를 답답하게 지켜보던 박원순 시장은 이른바 서울시 공직사회 혁신방안 카드를 선제적으로 꺼내든다. 이른바 박원순법으로 불리는 서울시 공무원 행동강령이다.
법률은 국회를 통과해야 하지만 행동강령은 시장의 의지만으로 얼마든지 제정이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 때가 2014년 10월. 박원순법은 이후 김영란법의 제정을 무언으로 압박한다. 결국 박원순법이 시행된 지 5개월인 2015년 3월 김영란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물론 김영란법이 제정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세월호 사고였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갈길 모르고 헤매던 때 앞서서 손을 잡아 준 것이 김영란법보다 더 강력하다는 박원순법이었던 셈이다.
또 김영란법 시행령이 과도하다는 논란에 휘말릴 때 그 시행령에 말없이 힘을 실어줬던 것 역시 박원순법이었다.
김영란법이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를, 앞서갔던 박원순법이 일정부분 불식시켰던 것이다.
서울시 강희은 감사담당관은 "김영란법과 박원순법은 그 동안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보완적 관계로 기능해 왔다"며 "두 법 사이에 20년 넘게 부정부패와 맞서온 박원순 시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박원순법 시행 2년 동안 서울시 공무원 사회에 청렴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 김영란법 시행에 맞춰 '청사초롱(청렴 사랑, 초심 롱런) 불 밝히는 서울시'를 만들기 위한 혁신활동에 더욱 매진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