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마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로마 교황청에 맞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주장했던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아십니까?
얀 후스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화형을 당하는 순간 백년 후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성령중앙협의회 순례단과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예비한 세례 요한과 같은 얀 후스의 흔적을 만나보시죠.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기자]
[스탠딩] 송주열 기자 / 프라하
“프라하 구시가지에 있는 얀 후스 광장입니다. 광장 중앙에는 얀 후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체코가 자랑하는 관광명소답게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빕니다. 하지만 얀 후스가 종교개혁였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터뷰] 러시아 관광객
(동상위에 저 사람을 아세요?) “잘 모릅니다.”
독일 보름스에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 동상에는 얀 후스 동상도 함께 세워져 있다.
14세기 후반기에 체코 보헤미아에서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의 물결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한 얀 후스는 1401년 로마 가톨릭 사제 안수를 받고, 이듬 해부터 프라하 베들레헴 채플의 설교자가 됩니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얀 후스는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교회의 법은 신약성경이요,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의 생활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에 정면 도전했습니다.
1409년에는 프라하 내 보헤미아파 사람들의 지도자가 돼 교회 개혁과 민중들의 정치적, 종교적 권리를 대변하게 되면서 가톨릭 교권주의자들과의 갈등이 심화 됐습니다.
얀 후스는 특히 성만찬 예식을 거행할 때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성도들과 함께 분잔하는 등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조치를 단행합니다.
체코 개신교단의 상징이 십자가가 아니라 성배 인 것도 이곳에서 유례합니다.
결국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눈엣가시였던 얀 후스는 1415년 7월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돼 화형을 선고 받습니다.
얀 후스는 당시 공의회에서 “지금 당신들은 한 마리 거위를 죽이지만 100년 후에는 굽지도 삶지도 못할 백조가 등장할 것이요"라며 루터의 출현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박상욱 목사 / 프라하 한인교회
“얀 후스는 무엇인가 개혁을 일으키기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고 의지하기 위해 응답한 사람이었습니다.”
[인터뷰] 박용구 장로 / 군포제일교회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마틴 루터를 통해서 이뤄진 줄 알았는데 이미 100년 전에 얀 후스를 통해서 준비됐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말씀의 양심대로 살며 교회 공동체를 일깨웠던 얀 후스는 화형 후에도 후스주의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종교개혁 정신이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까떼지나 니므흐트로바 / 타보르 얀 후스박물관 전시 책임자
“타보르 박물관에 와서 볼 수 있는 것은 얀 후스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배경,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난 이후에 후스를 따르는 이들의 행적에 관한 것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 마틴 루터와 같은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하지만, 종교개혁 정신만큼은 루터 못지않은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CBS뉴스 송주열입니다.
[영상취재] 채성수
[영상편집] 서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