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시행 첫날, 정부청사가 이주해 공무원들이 몰려있는 세종시는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난 28일.
평소 밤 11시 무렵까지도 술에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공무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다니던 청사 인근의 한 식당가는 손님 없이 텅 빈 가게들이 일찌감치 문을 닫은 바람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겼다.
평소 밤 11시에 문을 닫던 한우전문점 주인 박모(40)씨는 9시 30분쯤부터 가게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박씨는 "손님이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며 "매출이 10분의 1도 안되게 줄었다"고 호소했다.
역시 손님이 없어 파리만 날리다 평소보다 2시간 가량 일찍 문을 닫는다는 한 일식집 주인 정모(37)씨는 기자의 손을 붙잡고 "김영란법을 수정할 기미는 없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또다른 한우전문점에서 일하는 정모(38)씨는 "하루종일 겨우 4팀만 들어왔고, 그나마도 갈비탕만 시켜먹었다"며 "차라리 전염병이 돌면 잠깐만 소고기를 피하는데 법으로 소비를 막아놨으니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정부세종청사 인근의 한 식당가. 평소 밤 10시부터 마감에 들어갔지만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지난 28일에는 밤 9시 30분 전후로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다.
이처럼 공무원 손님들이 발을 끊은 곳은 고급 음식점만이 아니다. 평소 기자나 공무원들이 회식 장소로 애용해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던 돼지 삼겹살 가게도 이날 저녁에는 30여 테이블 가운데 겨우 2개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있었다.
또 식사 후 입가심으로 차를 마시는 카페나 2차 자리로 즐겨찾는 노래방, 호프집도 덩달아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한 노래방 주인은 "하루종일 손님은 딱 한 팀만 들어왔는데, 일찍 문을 닫은 아랫층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라며 "언제 다시 공무원들이 돌아올 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총리실 맞은편 한 카페 주인도 "가뜩이나 국정감사 때문에 일이 바쁘다고 차는 생략하고 밥만 먹고 들어가던데, 오늘은 이보다도 2, 30% 가량 매출이 줄었다"며 "밥 먹으러 청사 밖에 나오는 사람 자체가 줄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세종청사 인근의 한 노래방.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지난 28일, 이 노래방의 손님은 단 한 팀 뿐이었다.
이처럼 대다수 공무원들은 김영란법 시행을 맞아 몸을 바짝 낮추면서 점심, 저녁마다 청사 출입구에서 회식 장소로 향하는 공무원들을 실어나르던 버스들도 자취를 감췄다.
고용노동부의 한 과장급 공무원은 "금액에 관계없이 일단 저녁 약속은 모조리 비워뒀다"며 "법 내용이 워낙 복잡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일단 적발 사례를 지켜봐야겠다"고 귀띔했다.
기획재정부의 한 공무원은 "하다못해 가족끼리 먹더라도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는데 카메라에 찍히기라도 하면 한동안 '자료화면'으로 쓰일 것 아니냐"며 "자칫 김영란법 '판례'가 되서 공직 생활을 접어야 할 수도 있으니 며칠 동안은 집이나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무원들이야 1, 2주 집에서 밥 먹어도 아무 문제 없겠지만 상인들로서는 2, 3일만 손님이 끊겨도 생계가 막막하다는 것이 세종시 상인들의 불만이다.
한 호프집 주인은 "보는 눈도 많은 세종시에서 누가 접대를 받느냐"며 "어차피 은밀한 로비 활동은 서울이나 인근 도시에 가서 접대 받고 돌아오는데 공무원들만 보고 영업하는 세종시 상인들만 전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고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