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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에 숨어 있는 한반도인의 흔적을 찾다

책/학술

    일본 열도에 숨어 있는 한반도인의 흔적을 찾다

    신간 '한국의 일본, 일본의 한국: 이천 년 한일 교류의 현장을 가다'

     

    '한국의 일본, 일본의 한국'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우리와 일본 간의 교류의 역사를 말해주는 일본의 유적들을 탐사한 책이다. 지난 2015년 한일 수교 50년을 맞아 기획된 이 책은 지난해 하반기 〈동아일보〉에 연재된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를 수정하여 엮은 것으로,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교류한 2,000년의 세월을 살펴본다.

    청동기와 벼농사를 전수한 고대로부터 불교, 건축 기술, 공예 등 다양한 선진 문물을 전파한 삼국시대, 고구려?백제 유민들이 대거 건너간 통일신라 시대, 조선 도공들이 일본 도자 산업을 싹틔우고 통신사가 최초의 한류를 일궈낸 조선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이 일본과 긴밀하게 교류해온 역사는 유구하다. 그 교류의 흔적들은 일본의 역사, 여러 절과 신사, 유물들 등에 오롯이 남아 있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으로 구성된 14인의 저자들은 한반도 도래인들과 조선 통신사의 발길을 좇아 일본의 유명한 관광지부터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산속 깊은 곳과 섬마을까지 탐사하였다. 저자들은 취재를 하면서 일본 곳곳에 스며 있는 우리 조상들의 향취에, 그리고 그것들을 살뜰히 보존해온 일본인들의 성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부에서는 일본에 대한 한반도 문물 전파를 이야기할 때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언급되는 백제의 활약을 이야기한다. 현 일왕인 아키히토 왕은 일본 고대 문화의 전성기인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 왕이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속일본기》의 기록을 인지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일본 왕족 또한 무령왕릉을 참배할 정도로, 현재 일본인에 백제계 도래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백제가 혈통뿐 아니라 국가 기틀을 다지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이 자명하다. 그 흔적을 찾아 백제계 도래인들이 완성한 도시 오사카, 백제 무령왕이 출생한 가카라시마 섬, 백제계 간무 왕이 세운 교토, 삼국 통일 이후 백제계 유민들이 정착한 히라카타 시 등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나는 백제의 것과 빼닮은 유물들이나 여전히 남아 있는 ‘백제(구다라)’와 연관된 지명들에서 백제가 일본에 진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인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불교와 의복 등 다양한 문물을 전수한 백제인을 비롯한 한반도 도래인들은 선진 문물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구려인은 절이나 신사 등을 축조하는 건축 기술을 전수하였고, 신라인은 제철, 도자, 직물 등 다양한 선진 기술들을 일본으로 가지고 건너갔다. 한반도 도래인들의 공으로 일본의 고도(苦都) 교토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번성할 수 있었으며, 일본의 다양한 산업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에 정착함으로써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도자 산업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에 저자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교토, 오사카, 나라 등 한반도 도래인들이 발전시킨 도시들과 그곳에 영향을 끼친 유적들,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도자기 마을 등을 방문하였다. 한반도 도래인 후예들의 활약상이나 원효?의상대사, 장보고와 같은 위인들과 일본이 교류한 흔적들을 함께 담았다.

    3부는 조선 통신사의 이야기로 꾸렸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되면서, 한반도를 통해 대륙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은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조선과의 교류로 번영하던 쓰시마 섬의 번주는 섬의 명운이 흔들리게 되자 양국의 국서를 위조해가면서까지 조선 통신사를 다시 유치하는 데 열성이었다. 그 각고의 노력으로 임진왜란 이후 19세기까지 열두 차례에 걸쳐 조선 통신사가 방문하였는데, 그때마다 일본인들은 천금을 들여 통신사들을 맞이하고 통신사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운집한 민중들의 모습은 마치 요즘 내한한 셀러브리티를 환영하는 인파와도 같았다고 한다.
    에도(도쿄)로 향하는 통신사들이 머물렀던 일본의 작은 마을과 소도시는 하나같이 통신사들과 연관된 유적이나 유물들을 고이 지키고 있다. 통신사들이 머물렀던 객관 터나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한 흔적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 등을 살피면 근대 초까지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대한 민족 감정과 별개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덕에 일본은 우리에게 친숙한 여행 국가다. 우리가 관광하며 흔히 찾는 도다이사(동대사), 기요미즈사(청수사) 같은 유명한 유적지가 알고 보면 우리 조상과 긴밀히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거나 다녀올 독자들에게 일종의 안내서가 될 수 있도록 저자들이 취재하며 직접 찍은 현장감 있는 사진들과 방문한 도시들을 표시한 지도를 함께 실었다.

    책 속으로

    백제왕실과 닌토쿠 왕실의 관계는 닌토쿠 왕릉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이 백제 무령왕릉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청동거울이었다. 1872년 닌토쿠 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것과 거의 비슷해 한일 역사학자들로부터 ‘쌍둥이’ ‘복제품’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한국 삼국시대나 고대 일본 왕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청동거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부장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둥이 유물은 또 있었으니 바로 두 무덤에서 각각 나온 환두대도(環頭大刀)였다. 고리 안에 세 발 달린 새가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것이 똑같았다. 이런 양식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어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_p57 〈6장 닌토쿠 왕가의 비밀〉 중에서

    도래인의 숨결이 묻어 있어서 그런지 교토 고쇼는 근엄하고 웅장하다기보다 경주의 안압지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신라 유적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와를 얹어 만든 흙담은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여서 위압감을 주지 않았고 왕의 집무실이나 침소는 노송의 껍데기를 짜 얹어 강원도의 너와집을 떠올리게 했다.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건너온 신라의 건축가들은 수도 경주와 닮은 분지에 자리 잡은 교토에 또 하나의 신라를 세우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무 왕의 교토 천도가 도래인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왕궁과 부속 건물인 교토 고쇼를 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000년을 이어간 고도(古都) 교토의 첫 출발은 백제인의 핏줄, 신라인의 기술, 고구려인의 신앙이 모두 어우러진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비록 후대에 복원됐지만 당시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뜬 헤이안 신궁에서는 헤이안 시대 초기 도래인들의 열정과 고뇌, 고국을 향한 향수가 함께 느껴졌다. 이들은 이런 복잡한 감정을 섬세한 건축술로 승화시켰고 지금은 양국 간 우정의 상징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_p86 〈10장 백제계를 중용한 ‘교토의 신’ 간무 왕〉 중에서

    수성이 있는 다자이후는 바다로 향하는 서쪽만 벌판으로 열려 있고 동, 남, 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수성은 이 서쪽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길이 1.2킬로미터, 높이 10미터, 하단 폭 77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성을 불과 1년 만에 쌓았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나당 연합군의 추격에 얼마나 공포를 느끼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이런 역사를 알고 보면 바람에 설레는 대나무 숲 사이에서 적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빨리 성을 쌓으라고 독려하는 백제 장수의 목 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수성 아래 누런 황토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밤낮으로 흙을 메고 날랐을 백제 유민들의 땀방울이 배어 있으리라. 수성은 얼핏 3~4세기에 건설된 서울의 몽촌토성과 흡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몽촌토성보다 진일보한 기술이 숨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_p103 〈13장 백제 유민들의 마지막 방어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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