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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형은 어떻게 희생되었나?

대통령실

    박정희 대통령의 형은 어떻게 희생되었나?

    sns도 없던 시절, 사람들을 연결시켰던 것은?

     


    -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시위는 대구폭동이 아니라
    새 나라 건설을 꿈꾼 시민 혁명적 성격의 항쟁
    - 1946년 이후 친미 반공 정권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추적할 수 있어,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10월 12일 (수) 오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김상숙 (10월 항쟁의 저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관)

    ◇ 정관용>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6년 10월 1일 대구역 광장에서 총성이 울렸고요. 2명의 노동자가 쓰러졌습니다. 김용태란 이름의 노동자가 숨졌고 다음 날인 10월 2일 그 김용태의 시신을 싣고 대구 도심 전역에서 청년과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어요. 배고파 못 살겠다. 이게 또 전국으로 확산돼 갔고요. 총은 누가 왜 쏜 것인지. 그때 구호를 외친 사람들 어떻게 되었을지. 바로 이 사건 관련해서 지난 9년 동안 400여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자료를 모은 한 사람의 노력이 역작, 책을 낳았습니다. 10월 항쟁이란 제목의 책인데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지내신 바 있는 김상숙 씨가 이 책의 저자입니다. 오늘 스튜디오에 초대했어요. 어서 오십시오.

    ◆ 김상숙> 안녕하세요.

    ◇ 정관용> 10월 항쟁, 이렇게 이름 붙이셨네요. 과거에는 그냥 대구 폭동 이렇게 알려진 사건 아닌가요.

    ◆ 김상숙> 맞아요.

    ◇ 정관용> 흔히 대구 폭동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게 면밀히 조사해 보니 폭동이 아니라 항쟁이더라. 그런 결론이 책 제목에 담겨 있는 거로군요. 처음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된 되신 건 아까 제가 소개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시절부터입니까?

    ◆ 김상숙> 대구가 고향이어서.

    ◇ 정관용> 고향이 대구이시고.

    ◆ 김상숙> 원래 10월 항쟁에 대해서 관심은 있었는데요. 저도 위원회 담당조사관이 되기 전에는 그냥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도, 그 정도로 알고 있었어요.

    ◇ 정관용> 조사관 때 이 사건을 담당하셨어요?

    ◆ 김상숙> 네.

    ◇ 정관용> 그런데 그 위원회 활동은 일찍 끝났지 않습니까?

    ◆ 김상숙> 그렇죠. 2010년에 끝났죠.

    ◇ 정관용> 그 후에 6년 동안 작업을 더 하신 겁니까?

    ◆ 김상숙> 네.

    ◇ 정관용> 어떻게 작업을 하셨습니까?

    ◆ 김상숙> 위원회에 있을 동안에는 제가 그 당시에 항쟁으로 인해서 학살되신 분들 신원을 밝히고 그분들이 국가에 의해서 불법적으로 학살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들을 주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 진실화해위원회가 아시다시피 산적한 과제를 남긴 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2010년에 종료를 하고 나니까 너무 아쉽고 그리고 그때 돌아가신 분들 제가 조사하지 못한 분들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래서 위원회 끝나고 나서도 계속 조사를 했었어요. 그런데 조사를 하다가 보니까 이게 개개인의 희생자의 신원을 밝히는 그런 진실규명 수준이 아니라 이 사건 자체의 역사적인 성격 그것을 좀 역사적으로 진실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런 걸 느끼게 됐습니다.

    ◇ 정관용> 그날로 돌아가보죠. 46년 10월 1일 그 총은 누가 쏜 겁니까?

    ◆ 김상숙> 총은 경찰이 쐈죠.

    ◇ 정관용> 왜 쏘게 된 거예요?

    ◆ 김상숙> 그전에 해방 직후의 상황이 일단 해방이 되고 나니까 건국운동이 굉장히 활발했어요. 건국운동이 그게 일부 활동가들 이런 분들만 그런 열기를 갖고 참여한 게 아니고 그 당시에 많은 학생들, 노동자들, 시민들이 조직에 참여하면서 건국운동을 진행을 했어요. 그 당시 학생이나 노동자 같은 경우에는 대다수가 조직이 될 정도로 그렇게 했었는데 이분들이 46년도에 한 해 동안 계속 여러 가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시위라든가 집회, 이런 것들을 벌였고요. 그리고 또 한축으로는 그 당시에 빈민들이 굉장히 많았었어요. 이 빈민들이라는 것은 그 당시 경제적으로 미군정이 제대로 경제정책을 펴지 못하면서 실업자들이 많았고 또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떠났다가 귀환한 동포들 이런 분들이 대구, 경북지역에 많이 몰렸거든요.

    ◇ 정관용> 일자리는 없고.

    ◆ 김상숙> 그분들이 다 빈민으로 있었는데 이분들이 실업난이라든가 그다음에 식량문제가 굉장히 심각했어요, 그 당시에. 그러면서. . .

    ◇ 정관용> 흉년이 들었어요?

    ◆ 김상숙> 처음에 미군정에서 식량정책을 펼 때 시장을 통제하지 못하니까 식량을 공출했다가 배급하는 형태로.

    ◇ 정관용> 배급형식으로.

    ◆ 김상숙> 배급형식으로 정책을 폈어요. 그런데 배급하는 양이 굉장히 적었죠. 그래서 이제 많은 시민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특히 그 당시에 콜레라도 돌고 홍수도 나고 이러니까 방역차원에서 교통을 통제하고 이러다 보니까 식량난이 더 심해졌거든요.

    ◇ 정관용> 총체적 난국이군요. 가난하고 배고프고 질병 떠돌고 이런 상황.

    ◆ 김상숙> 그러니까 한편으로 봤을 때는 건국운동을 추진하던 많은 의식 있는 조직된.

    ◇ 정관용> 주로 좌파적 건국운동 쪽입니까, 아니면 좌우막론하고입니까?

    ◆ 김상숙> 좌나 우, 이런 구분이 이제 그 이후에 생긴 거죠. 그 이전에는 사실 이제 해방 직후에 분위기로 봤을 때는 항일운동을 한 사람과 친일파 보통 그렇게 구분돼 있겠죠.

    ◇ 정관용> 그렇죠, 그렇죠.

    ◆ 김상숙> 그런 상황에서 이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요즘으로 치면 진보세력, 그 진보세력인데 그 진보세력이 나중에 좌우로 이렇게 지칭이 된 거죠.

    ◇ 정관용> 그렇게 구분이 뚜렷하지 않던 그냥 모두가 한번 건국운동에 참여해 보자라고 모여 있던. 그런데 상황은 열악하던, 이런 상황에서 그러니까 10월 1일날 무슨 시위가 있었던 거예요?

    ◆ 김상숙> 그 이전에 노동자 파업이 있었어요. 노동자 9월 총파업이라고 9월 23일부터 전국적으로 파업이 있었는데 대구 같은 경우에는 그 이전에 이렇게 노동자들이 굉장히 조직이 잘돼 있다 보니까 파업에 일사불란하게 참여를 했고 그래서 9월 30일,10월 1일이 넘어가는 시기에 서울 같은 경우에는 당국의 탄압에 의해서 파업이 분쇄가 됐는데 대구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시민들이 더 결합을 하면서 파업이라든가 집회의 규모가 굉장히 커진 거예요. 커지면서 10월 1일날 대구역 광장에서 노동자와 시민들이 연대한 그런 집회가 5, 6000명 규모로 열리고.

    ◇ 정관용> 그 시위를 막는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를.

    ◆ 김상숙> 발포는 한 거죠.

    ◇ 정관용>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그다음 날 사망자의 시신을 앞세우고 시위대는 더 규모가 커졌겠네요.

    ◆ 김상숙> 이튿날 시위를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군데에서 일어나서 이튿날 시위가. 빈민들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대구구청,요즘으로 치면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노동자들은 그 전날 대구역 광장 그 자리에서 계속 시위를 벌였고 그런데 거기에서 경찰들이 또다시 사격을 하죠.

    ◇ 정관용> 또 발포.

    ◆ 김상숙> 발포를 해서 거기에서 20명 가까이 사망을 하고요. 그런데 한편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노동자의 시신을 앞세우고 대구경찰서로 간 거예요.

    ◇ 정관용> 대구 각지로 번졌군요. 한 곳이 아니라.

    ◆ 김상숙> 그런데 학생들이 주로 보면 그 당시 대학생이 한 500명 정도. 그리고 중학생이 거의 한 6, 7000명 이 정도 있었는데.

    ◇ 정관용> 6, 7000명의 중학생?

    ◆ 김상숙> 그런데 그 대부분이 같이 참여를 해서 이 노동자의 시신을 앞세우고 대구경찰서로 가서 노동자 학살을 중단하라. 그리고 애국자를 석방하라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니까 결국은 경찰들 입장에서는 어린 중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고 그다음에 이 시위대에 시민들이 가세해서 1만 5000명 규모로 시위 규모가 늘어나니까 경찰도 일부 가세하고.

    ◇ 정관용> 그래요?

    ◆ 김상숙> 그러면서 결국 경찰들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죠. 무장해제를 하고 난 다음에 이제 바로 경찰서가 점거가 되고. 그러고 나서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그 앞에서 연좌를 하면서 이제 계속 있었는데 시내 곳곳에서 빈민들, 기층민중들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이렇게 됐었습니다.

    ◇ 정관용> 경찰서까지 그렇게 접수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됐습니까?

    ◆ 김상숙> 경찰서 접수한 시간은 얼마 안 되죠. 그러니까 한 대체로 한 12시부터 한 3, 4시까지.

    ◇ 정관용> 그렇게만 잠깐 접수했다가 나왔어요?

    ◆ 김상숙> 미군이, 미군정 쪽에서 포고령, 요즘 계엄령인데 포고령을.

    ◇ 정관용> 선포하고. 바로 10월 2일 그날?

    ◆ 김상숙> 10월 2일 그날 오후에 장갑차를 몰고 경찰서 앞으로 오니까 이제 어린 학생들은 그 생전 처음 장갑차를 보니까 전부 다 이렇게 좀 순순히 몇 명은 그 앞에서 장갑차 앞에서 누워서 저항도 하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부분은 순순히 그냥 해산을 했어요.

    ◇ 정관용> 거기서 보니까 막 교전이 벌어지고 그런 건 아니고?

    ◆ 김상숙> 그런 건 아니고요. 해산을 하고 이 학생들은 그냥 정리집회를 하고.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렇게 10월 1일, 10월 2일로 대구 전역으로 확대된 게 그해 연말까지 전국으로 퍼졌다면서요. 전국에 몇 군데 정도로 퍼졌습니까?

    ◆ 김상숙> 73개 시군으로 퍼졌죠.

    ◇ 정관용> 73개 시군. 서울까지도?

    ◆ 김상숙> 그런데 서울 같은 경우에는 사전에 이렇게 진압을 많이 하니까 아주 부분적으로 이렇게 일어났는데 주로 영남지방 또 호남지방 쪽에서 많이 일어났죠.

    ◇ 정관용> 그게 미군정의 요즘 말하는 계엄령,그 당시 포고령 치하에서도 그렇게 73개 시군으로 퍼졌다. 그럼 계속 강제 진압이 이루어졌겠네요.

    ◆ 김상숙> 그렇죠. 그러니까 요즘 같으면 SNS라든가 TV 보도 같은 게 있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바로 이렇게 소식이 전해지겠지만.

    ◇ 정관용> 그때는 모르죠.

    ◆ 김상숙> 그때는 모르니까 도보로 혹은 트럭을 타고 군마다 다니면서 소식이 전달이 되면 그 지역의 농민들이 일어나고 일어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전국을 돌아서 일어났고요.

    ◇ 정관용> 그런 어떤 시위의 주된 요구사항은 뭐였습니까?

    ◆ 김상숙> 크게 보면 두 가지죠. 이제 하나는 친일 잔재의 척결.

    ◇ 정관용> 하기는 그때 경찰도 대부분 친일 일제시대 때 경찰 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또 경찰로.

    ◆ 김상숙> 그렇죠. 미군정이 일제시대 순사들을 그대로 등용을 하니까 식량 공출을 하고 배급을 할 때 가장 앞장서서 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거든요.

    ◇ 정관용> 경찰이고.

    ◆ 김상숙> 그러니까 농민들도 마찬가지이고 도시 시민도 마찬가지지만 그분들 입장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 순사한테 그렇게 당했는데 또다시 당하니까.

    ◇ 정관용> 또 똑같은 사람한테.

    ◆ 김상숙> 그 식민지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수십 년 동안 쌓인 트라우마가 폭발을 한 거죠. 그리고 또한 중요한 축은 토지개혁을 비롯해서. 반봉건, 봉건제에 반대하는 요구가 컸어요. 그게 이제 한국 같은 경우에는 서구하고 다르게 시민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시민혁명이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 정관용> 해방이 됐고 왕정이 무너졌고.

    ◆ 김상숙> 식민지가 되었고 그다음에 해방이 되이니까 그동안 쌓여 있던 요구들이 이제 한꺼번에 또 폭발을 한 거죠.

    ◇ 정관용> 그렇군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숫자는 몇 명 정도입니까?

    ◆ 김상숙> 학살은 10월 항쟁 당시부터 계속 있었고요. 그러다가 그게 산발적으로 있다가 나중에 10월 항쟁 관련자들. 한 번 구속되었다가 나온 사람들, 가족들 뭐 이런 사람들이 계속 또 학살을 당하고 그다음에 경찰이 굉장히 자기들이 주로 빈민들이라든가 농민들이 일어나서 그 당시 항쟁 당시에 지서를 습격하고 또 경찰을 살해하기도 하고 이러니까 경찰들이 자기가 피해자다, 이러면서 경찰이 굉장히 보복을 잔인하게 했어요. 잔인하게 하다 보니까 많은 청년들이 그걸 견디지 못해서 산으로 들어가거든요.

    ◇ 정관용> 빨치산.

    ◆ 김상숙> 산으로 들어가서. 처음에는 야산대, 나중에 유격대로 발전을 하죠. 그러니까 이 빨치산이 또 군경하고 서로 전쟁을 벌이니까 일종의 전쟁이죠. 벌이니까 그 지역의 주민들이 함께 학살이 되는 거죠. 그렇게 하고 나중에 한국전쟁 때 10월 항쟁 관련자들이 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을 다해서 그대로 다 학살이 되죠.

    ◇ 정관용> 그렇게 쭉 48년, 50년 이렇게 이어지는 전체로 따지면 그 숫자를 얼마라고 봐야 해요?

    ◆ 김상숙> 그 숫자가 예전에 4. 19 때 피학살자유족회 조사부장을 하셨던 이봉영 선생님은 3만 명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셨는데 저는 여러 자료를 다 모아서 학자의 입장이니까 민간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비해서 좀 더 엄밀하게 조사를 하면서 최소치로 잡아서 봤을 때도 적어도 1만 5000명 이상은 학살이 됐다. 이렇게 보고 있어요.

    ◇ 정관용> 그럼 딱 그냥 46년 10월부터 12월 그 기간만 놓고 보면 얼마 정도라고 보나요.

    ◆ 김상숙> 그건 추산이 힘들죠.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일단 당국에 신고를 안 했으니까 피해자 입장에서는. 피해자 가족들이 그걸 감추니까 신고를 안 했어요. 그게 지금도 안 나타나고 있고요.

    ◇ 정관용> 그 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 줄 수 있는 좀 기억에 남는 인터뷰 있으면 하나만 있으면 하나 좀 소개해 주시겠어요?

    ◆ 김상숙> 47년도에 청년단체에 가입을 하셔서 48년에 잡혀가신 청년이 한 분 계신데 10대 청소년이죠. 거리의 청소년인데.

    ◇ 정관용> 그 당시 10대.

    ◆ 김상숙> 16살인데 아주 배가 고픈 상태에서도 민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일념으로 삐라를 뿌리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국가보안법 1호로 잡혀가시거든요. 그런데 이분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를 하시기를 그 당시 말단에 있는 활동가는 이름도 없고 기억도 없고 무덤도 없다, 유명한 활동가들은 역사에 이름이 남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름도 없고 기억도 없고 무덤도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지만 그게 자랑스럽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분이 계세요.

    ◇ 정관용>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도 피살되지 않았습니까?

    ◆ 김상숙> 그렇죠. 10월달 선산에서 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 당시 인민위원회 간부였었는데 그 항쟁을 주도하고 진압 과정에 경찰한테 쫓겨서 논바닥에서 사살이 됐죠.

    ◇ 정관용> 그렇죠. 바로 그래서 뭐 대구폭동에 피살된 좌파 형을 둔 뭐 이렇게 그동안 알려져 왔었는데 사실은 그게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진 어떤 민중항쟁적 그 와중에 희생당한 이렇게 고쳐서 말을 해야 되겠군요. 이걸 10월 항쟁으로 부르자라고 우리 김상숙 씨가 책 제목으로 하신 뜻, 그 취지만 마지막으로 한말씀 주시죠.

    ◆ 김상숙> 여러 가지 항쟁의 참여 주체를 봤을 때는 일부 세력이 아니라 학생, 노동자, 시민.

    ◇ 정관용> 학생, 노동자, 농민, 시민 다.

    ◆ 김상숙> 빈민, 농민 다 참여한 그런 항쟁이고 요구사항도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봉건제를 타파하려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싶어하는 그러한 요구를 담고 있고요. 그런 어떤 서구로 봤을 때는 시민혁명적인 요구를 담고 있고요. 그다음에 또 한 측면은 이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 그 이전에는 보수세력의 힘이 그다지 강하지가 않았거든요. 한국에서 보수세력이라고 할 때는 그냥 그 당시에는 친일파 이런 사람들이 보수세력이었는데 지방으로 갈수록 힘이 강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이 항쟁을 계기로 해서 지역마다 청년단체를 만들고 서북청년단이라든가 이런 단체를 보내고 또 지역 자체에 청년단체를 만들어서 나중에 대한청년단으로 다 통합이 되지만요. 이렇게 하면서 국가권력을 지방까지 이식을 하죠. 그다음에 또 계속 학살을 하면서, 이 학살을 하면서 그 당시에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전멸을 당하고 또 일반 주민들 입장에서는 학살당할 것이라는 어떤 두려움, 이런 것 때문에 반공 정권지에 다시 충성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친미 반공 정권이 수립돼 나가는 과정. 국가가 형성돼 나가는 과정.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보통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기까지 시기를 학자들이 보통 생각할 때는 분단체제 형성기, 국가 형성기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한쪽으로 봤을 때는 민주항쟁이 10월 항쟁부터 시작해서 4. 3 항쟁, 여순 이렇게 쭉 이어졌었고요. 그게 한축이 되었고 이게 같이 공존하면서 현대 한국사회가 만들어졌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서 항쟁이라는 의미를 좀 더 강조해서 이야기했습니다.

    ◇ 정관용> 그 시점으로 봐서는 사실 해방 이후 현대 우리 민중항쟁의 어떤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효시.

    ◆ 김상숙> 그렇죠. 그 10월 항쟁 자체의 양상을 보면 한축으로 보면 과거의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의 양상이 많이 드러나요. 봉화를 넣는다던가 농민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패를 지어간다든가 이런 양상들이 나타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분들이 독자들이 보시고 5. 18 항쟁이 떠오른다, 이 항쟁의 양상을 보면서. 그런 걸 봤을 때 이 항쟁의 양산이라는 게 과거 19세기 항쟁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5. 18에 이르기까지의 항쟁의 중간에 있는 그런 현대 항쟁의 효시,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 정관용> 그래요. 70년 전 이런 일, 우리는 그냥 대구 폭동이라고만 알려왔던 그 진실을 다시 한 번 알게 됐군요.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지내신 바 있는 10월 항쟁의 저자 김상숙 씨 함께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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