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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을 읽다' - 욕망과 대의, 흥망성쇠의 원리

책/학술

    '자치통감을 읽다' - 욕망과 대의, 흥망성쇠의 원리

     

    제왕학의 교과서로 알려진 '자치통감'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현대 중국의 지도자들이 늘 곁에 두고 탐독한 이유는 무엇일까? 총서기에 취임한 이래 “부패 척결”의 명분으로 25만 명이 넘는 공산당원들을 처벌한 시진핑은 왜 '자치통감'을 강조했을까? 세종대왕이 친히 밤을 새우며 교정을 보아 편찬하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가 애독한 동아시아 치세의 거울 '자치통감'을 중국 최고 전문가의 권위 있는 해설로 만난다.

    신간 '자치통감을 읽다'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가의 정치철학을 수신, 제가, 치도라는 현대 시민사회의 공동체 원리로 새롭게 재해석했다. 원제는 '덕정지요(德政之要)'. 중국 송(宋) 대 출간된 최고의 역사서 '자치통감'의 지혜를 한 권에 담았다.

    상하이 푸단대학 역사학 교수인 저자 장펑은 중국 중앙TV(CCTV) '백가강단(百家講壇)' 프로그램에서 <제왕의 교과서="" :="" 장펑이="" 음미하는="" '자치통감'="">을 강의하여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치통감'은 "다스리는(治) 도리에 자료(資)가 되고 역사를 통하여(通) 거울(鑑)이 된다(資治通鑑)"는 뜻이다. '자치통감'은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전국시대부터 송 건국 이전까지의 1362년간의 역사를 294권 300만 자에 수록한 방대한 역사서이다. 고위 정치가이기도 했던 사마광은 19년 동안 쉬지 않고 편찬 작업에 헌신했으며 고위 정치인이었음에도 매우 청빈하게 생활했다. 그의 조수 유서(劉絮, 1032~1078)는 이 방대한 작업을 하던 중 눈이 거의 실명했으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자치통감'은 사마광 시대까지의 역사서를 단순 요약한 것이 아니라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옛날이야기들을 정치적 이성으로 재해석하여 새롭게 편집한 역사서이다. 사학자이자 문학가인 사마천이 쓴 '사기'는 중국 문화의 위대한 고전이지만,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 두고 대대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어왔다. 대표적인 예로 '상산사호(商山四皓)'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사마광은 유방이 태자를 폐위시키려다가 뜻을 바꾼 일에 대해 전설 같은 '상산사호' 이야기를 사료로 채택하지 않는다. 대신 성질이 사나운 유방이 노인들 몇몇이 말린다고 뜻을 꺾을 리는 없으며, 당시 조정의 세력 있는 대신들이 태자 편이었기 때문에 태자를 바꾸지 않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증명한다(23~28쪽).

    저자 장펑은 봉건적 군신 관계가 사라진 현대 공동체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개인’(수신), ‘가정과 조직 구성원’(제가), ‘사회와 국가 지도자’(치도)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과 소양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장펑은 공중도덕으로서, 시민의 덕성으로서 ‘신독(愼獨)’을 강조한다. ‘신독’은 말 그대로 혼자 있을 때도 언행을 절제하고 삼가는 수양 자세다. 수신이 ‘신독’의 경지에 이르면 혼자 암실(暗室)에 있을 때나 사람들의 이목이 빈번한 시장통에 있을 때나 자발적으로 자기절제의 품행을 실천한다. 단속 카메라가 없는 고속도로에서 과연 자동차의 규정 속도를 지킬 수 있는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주운 타인의 지갑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가? 개인이 공중도덕을 자각하는 수준이 높을수록 사회 관리를 위한 통제 시스템은 훨씬 적어진다. 따라서 사회 관리 비용도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어서 더 많은 돈을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쓸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신독’은 현대의 시민 윤리로 재해석된다.

    장펑의 이런 입장은 제가와 치도 항목에도 동일하게 관철되고 있다. 즉 수신을 통해 얻은 ‘신독’의 덕성을 자제들에게도 가르쳐서 검약과 절제가 일상화된 집안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을 제가의 요체로 보았다.

    “재능이란 덕성의 도우미요, 덕성이란 재능의 통솔자입니다. (…) 재능과 덕성을 모두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재능과 덕성이 전부 없는 사람을 ‘우인(愚人: 어리석은 사람)’이라 합니다. 덕성이 재능보다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고, 재능이 덕성보다 뛰어난 사람을 ‘소인(小人)’이라 합니다. 소인을 얻기보다는 차라리 우인을 얻는 것이 더 낫습니다. 군자는 재능을 가지고 선을 행하지만, 소인은 재능을 가지고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_229쪽

    사마광은 집안과 조직을 이끌 사람은 외면의 재능보다는 내면의 덕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능은 집안과 조직의 성패를 가르지만, 덕은 집안과 조직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런 도덕교과서 같은 메시지가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은 '자치통감'이 다루는 1362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권문세가의 흥망성쇠를 통해 사마광이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지선자가 아들 지요를 후계자로 삼으려 할 때 친척 지과가 말렸다. “요는 남보다 뛰어난 점이 다섯 가지가 있고 어질지 못하다는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대저 다섯 가지 뛰어난 점으로 남을 능멸하며 어질지 못한 행동을 하면 누가 능히 그를 대우해주겠습니까? 만약 끝내 요를 후계자로 세우면 지씨 가문이 틀림없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선자는 지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지과는 성을 지씨에서 보씨로 바꾸었다. 조간자는 두 아들을 시험한 후 무휼을 현명하다 생각하고 그를 후사로 세웠다. 바로 이 두 후계자가 지씨와 조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게 된다. 성을 바꾼 보씨를 제외한 지씨 가문은 모두 피살되었다(213~219쪽).

    저자는 '자치통감'에 실린 중요한 정치 인물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다 보면 재미있는 규칙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어떤 사람이 인생의 밑바닥에서 살아갈 때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절이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질투와 미움을 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공가도를 달릴 때에는 적이 많아지고 한순간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바로 함정으로 굴러 떨어진다. 사회적으로 잘나갈 때에는 자만심 때문에 신중하지 못한 처신으로 위험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서도 무측천의 5촌 오빠인 무유서처럼 냉정한 ‘신독’의 자세로 이익과 거리를 둔 사람들은 가문이 몰살당하는 상황에서도 평온한 삶을 살았다(82~89쪽).

    사마광은 장지백이라는 고관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한다. “사람의 보통 심리는 검약에서 사치로 나아가기는 쉽지만 사치에서 검약으로 나아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만약 가족들이 사치에 물들게 되면 자신이 죽거나 관직을 잃었을 때 그들은 사치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결국 파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는 한나라의 권세가였던 곽광과 장안세를 비교하며 이런 주장을 증명한다. 장안세가 높은 지위와 녹봉을 사양했지만 그의 재산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한 가풍은 장안세의 교육을 통해 몇 대 동안 계속 이어졌고, 장씨 가문은 한나라 전체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성공한 고위층 가문의 하나가 되었다. 이는 권세가 막강했던 곽씨 가문이 곽광이 사망하고 나서 한 세대 만에 멸문지화를 당한 상황과 선명하게 대비된다(297~330쪽).

    수신과 제가를 거쳐 치도에 이르면 문화와 교육을 통해 명분과 대의를 내면화하게 된다. 한나라 말기 조조가 주위 측근들의 강력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황제에 오르지 않은 것은 그에게 그만한 힘과 야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조의 가슴 속에 내면화된 명분과 대의의 덕성 때문이었다. 그것은 동한이란 나라가 광무제 이래 강조해온 교화의 핵심 내용이었다.

    “배는 임금의 도(道)요, 물은 백성의 마음이다. 배는 물의 도를 따라야 물 위에 뜰 수 있지만 그것을 어기면 침몰한다.” _『자치통감』 권229에 실린 육지(陸贄)의 말

    “(…) 대저 관직은 폐하의 관직이 아니라 천하의 관직입니다. 폐하께서 관직에 맞지 않는 사람을 선택하면 그 관직은 그 사람과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고도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이 복종하도록 바란다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_『자치통감』 권34

    사마광은 천하는 모두의 것이고(天下爲公),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以人爲本)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백성이 고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라는 맹자의 민귀군경(民貴君輕)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천하위공의 자세는 “대저 관직은 폐하의 관직이 아니라 천하의 관직입니다”란 말이 그 실체를 잘 말해준다. 이는 관직이란 현명하고 유능한 적임자에게 수여하여 사회와 국가를 함께 다스리는 공공 도구이지 위정자나 치자가 사사롭게 총애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문화와 교육을 통해 개인의 품성으로 내면화한 명분과 도의의 덕성은 부단한 수신 과정에서 일상 속의 자기절제력으로 승화되고, 더 나아가 매우 현실적인 검약과 겸양의 가풍으로 확장되며, 궁극적으로는 명분과 대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기풍으로 보편화한다. 이러한 사회 기풍은 법이나 규제로 지탱되는 강제적 질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실천과 참여로 유지되는 느슨한 구속력이다. 하지만 이 느슨한 구속력은 명예와 염치와 도의를 중시하는 사회 전체 분위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어떤 강제적 구속력보다 더 끈질기고 지속적인 힘을 발휘한다. 장펑이 '자치통감'이란 거울을 통해 비춰본 수신, 제가, 치도의 의미는 이처럼 지금 여기의 삶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드넓은 보편성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자치통감을 읽다'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내용과 분량이 너무 방대해서 엄두를 못 내는 책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읽지 않고서는 한 치 앞 세상을 보지 못하는 책이 있다. 어설프게 요약하면 읽기는 좋은데 건질 게 없다. 진퇴양난이다. 엄청난 분량과 내용의 '자치통감'을 이 이상 간결하면서도 적확하게 정리한 책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앞뒤를 잘 헤아려 읽고 여러 번 읽으면 웅혼하게 우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최적의 압축 파일이다!”

    책 속으로

    『자치통감』 전체 294권에는 거의 1,400년에 가까운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 성공적으로 거대한 재산을 모아 대대로 자손에게 전해주며 역사에 영향력을 유지한 가문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 가문도 없다. 물질적 욕망에 탐닉하다가 급속도로 패망한 가문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럼 재산 축적을 선택하지 않은 양진의 행동은 자기 가문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역사적 사실이 증명한 바에 의하면 양진의 자손들은 추위나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500년 동안이나 연면하게 이어진 양씨 가문의 신화를 창조했다. 양진의 학문과 청렴함은 자손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자손들은 그의 가르침을 말과 몸으로 실천하며 가풍을 형성했다. 양씨 가문은 동한 멸망 후 위·진 두 왕조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정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이처럼 몇 세기 동안 여러 왕조의 시련을 거치며 쌓아온 위대한 가문의 명성이 양진에 의해 창시된 가풍 즉 재산을 가벼이 여기고 덕행을 중시한 가풍의 영향이 아니란 말인가? _83~84쪽, 「수신편 : 고요하고 담박하게」

    양국충은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모두 내쫓았다. 어떤 사람이 장단에게 양국충을 배알하라고 권하면서 말했다. “그분을 만나뵈면 부귀를 바로 도모할 수 있을 것이네.” 장단이 말했다. “자네들은 양 우상을 태산처럼 의지하고 있지만 나는 얼음덩이로 여길 뿐이네.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면 자네들은 의지할 데가 없을 것이네.” 그리고 마침내 숭산에 은거했다.
    양국충에게 의지하면 잠시 좋은 관직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그 부패한 시스템에 투항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단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고 발언권도 미약하여 전체 시스템을 바꿀 힘은 없지만 그들과 함께 악행에 참여하지 않는 길을 선택할 수는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관직 포기의 길을 선택했다. 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본성은 악하지 않지만 용기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저들 틈에 뒤섞여 함께 악행을 저지르는 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주관 없이 자신의 기본적 생존 이익을 위해 나치에 협조한 보통 사람들의 악행을 가리킨다)과 유사하다.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볼 때 장단의 선택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며, 공중도덕에 기초한 ‘신독’ 사상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_97∼98쪽, 「수신편 : 악의 평범함에 대한 경계」

    “차라리 염파에게 양보하기를 원하지, 조나라 망국은 원하지 않는다.” 재상 인상여의 ‘공사분별’과 ‘선공후사’의 뜻을 알게 된 장수 염파는 웃통을 벗고 회초리를 짊어진 채 인상여 집 문 앞에서 사죄한다. 나라의 두 분야에서 주축으로 자칫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빠트릴 수 있었던 둘은 갈등을 풀고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는다.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이 잘린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라는 ‘문경지교’는 바로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장수와 재상이 화해하다’라는 뜻의 이 경극 「장상화(將相和)」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가장 성공한 신편 전통극의 하나이다. _104쪽, 「수신편 : 이해득실보다 전체」

    양염과 거의 같은 시대에 고고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인품이 관대한 장수여서 병졸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다. 고고가 병사들 속에서 명망이 높아지자 절도사가 그를 질투했다. 이 때문에 절도사는 고고를 한직으로 쫓아내고 그에게 군대의 실권을 주지 않았다. 동급의 다른 장수들도 고고가 승진할 희망이 없자 그를 경시하고 능멸했다. 그러나 덕종이 죽자 조정에서는 마침내 고고를 후임 절도사로 임명했다. 임명장이 내려진 후 이전에 고고를 능멸했던 장수들은 그가 보복을 할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고고는 절도사에 취임한 후 지난날의 동료들에게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장수들의 불안한 정서는 점차 안정을 찾았고 군대 업무도 양호하게 관리되었다.
    당나라 역사에서 고고는 결코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치통감』에서 고고의 이 훌륭한 일화를 기록한 것은 양염처럼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운 복수를 일삼은 인물과 선명하게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읽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누구를 경계로 삼아야 하고 누구를 법도로 삼아야 할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_172~173쪽, 「수신편 : 공은 공, 사는 사」

    우리는 어떤 정치체제를 막론하고 모두 권력 의지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덕으로 법을 보완했고 더 나아가 덕으로 법을 인도하려 했다. 이는 모두 도덕성 함양과 권력의 자기절제력이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도덕적 역량으로 정치적 수준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_190쪽, 「수신편 : 공을 세우고도 오만하지 않다」

    지나치게 이른 성공과 득세로 인해 이 자신감 넘치는 젊은이는 철저한 자기반성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사첨은 아우의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일처리 방식과 지나치게 우쭐대는 성격이 조만간 참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임종 전에 사첨은 장중하고 의미 깊은 어투로 아우에게 “복이 지나치면 재난이 생기는 법이니 그 징험이 멀지 않은 듯하다”라고 경계했다. 그는 또 아우에게 “화와 복은 서로 의지한다”는 인생철학을 일찌감치 깨우치도록 권고했다. _253쪽, 「수신편 : 화와 복은 서로 의지한다」

    시진핑 총서기는 여러 차례의 담화를 통해 관직 생활을 하면서 돈까지 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그가 말한 핵심 이념이 공자의 말과 의미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려면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벌면 된다. 물론 재산 축적 과정에서 사회를 위해 봉사하면 더욱 좋다. 만약 정치나 학문의 길을 가면서 물질적 혜택을 오매불망 잊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호화주택이나 고급 자동차를 부러워한다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정치나 학문의 길을 가며 인생의 가치를 구현하는 일과 재산 축적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구현하는 일은 같은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갈래 길을 갈 수는 없다. 우리가 선택한 길과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충돌할 때에는 길을 바꾸거나 목표를 바꿔야 한다. 이 같은 모순을 고려하지 않고 정치의 길을 가거나 학문의 길을 가면서 물질적 풍요로움만 추구한다면 틀림없이 정치와 학문의 진정성을 해치게 되고 심지어 정치와 학문을 재산 축적의 도구로 전락시키게 된다. _273쪽, 「제가편 : 안정된 삶의 본질」

    신체부가 상소를 올렸다. “공주는 폐하께서 사랑하는 따님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씀씀이가 옛 법도에 맞지 않고 행동도 민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신은 장차 폐하의 사랑이 증오로 바뀌고 공주의 복락이 재앙으로 변할까 두렵습니다.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백성의 힘을 고갈시키고,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고, 백성의 집을 빼앗는 것은 폐하께서 몇 명의 자식을 사랑하다가 많은 원한을 맺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_369쪽, 「치도편 : 백성은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

    최언은 관대한 통치술로 명망이 높았다. 한 달 동안에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악악관찰사로 부임한 이후에는 엄격한 형벌과 법률로 그 지역을 다스렸다. 주위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최언에게 통치 방법을 왜 그렇게 크게 바꿨느냐고 물었다. 최언은 섬괵 지방은 땅이 척박하여 백성들이 궁핍한 터라 그들이 놀라 도망갈까 밤낮으로 위로해야 했지만, 악악 지방은 산천이 험준하고 풍속이 불량해서 준엄한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대답했다. 결론적으로 최언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변화에 대처할 줄 아는 걸 귀하게 여긴다.” 이 말에는 상이한 지방의 특성에 근거하여 상이한 정책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_388쪽, 「치도편 : 정치는 변화에 대처하는 것」

    등태후가 생전에 남성 중심의 정계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고 국가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면서 친정 세력을 처리하는 문제에서도 다른 어떤 황태후보다 더욱 타당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원인은 주로 그녀의 스승이며 위대한 여성 학자인 반소(오빠 반고를 계승하여 역사서 『한서』를 완성한 학자)에게서 유익한 학문을 배웠기 때문이다. 등수는 황실 여성이어서 수렴청정에 나선 후에 외부의 사대부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반소가 그녀를 위해 가장 훌륭한 정치고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등수는 마침내 동한 역사상 유일하게 탁월한 정치적 업적을 남긴 황태후가 되었다. 이는 문화와 학습을 중시한 등태후가 가져온 혁혁한 성과라 할 만하다. _431쪽, 「치도편 : 등태후의 문화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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