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스는 중국 근현대화 시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자유주의 사상가이다. 그는 ‘남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인정받을 수 없다’면서 용인(容認, Tolerance)을 진정한 자유의 조건이자 사람으로서 누구나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자신부터 엄혹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평생 ‘용인하는 정신’을 전파하고 이를 사회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분투하는 정신’으로 살았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후스는 연극이라고 말한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나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만의 역할을 멋지게 보여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다. 어떻게? 먼저 나를 멋진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갈고닦아야 한다. 그 다음엔?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필요한 핵심 덕목이 바로 ‘용인의 정신’과 ‘분투하는 정신’이라고 후스는 강조한다.
당시 후스는 중국 전역을 돌며 강의를 하고, 수많은 매체에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고, 책을 읽어 주고, 개인의 미래와 사회의 미래에 대해 토론했다.
신간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그중에서 우리가 살면서 부닥치는 문제들에 대해 참지혜를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뽑아 엮은 책이다. 특히 절대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타적 태도가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 내는 오늘날, 후스에게서 세상을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번은 한 청년이 후스에게 편지를 보내 물었다.
“선생님, 저는 왜 사는 걸까요? 제 삶에는 어떤 의의가 있을까요?”
후스는 특유의 자상한 어조로 답장을 보냈다.
“그대의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니 스스로 고치를 만들어 몸을 옭아매고 있는 것 같군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간단합니다. 인생의 의의는 각자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고상함, 비열함, 고결함, 더러움, 쓸모 있음, 쓸모없음 등등 이 모든 것은 자신이 하기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후스는 사람이 태어나든 고양이가 태어나든 개가 태어나든 생명 자체에는 다를 게 없다고 말하면서,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스스로 어떻게 사느냐’라고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그냥저냥 산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제 삶은 방치한다. 그러면서 어차피 인생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실 인생이 꿈과 같다는 것을 안다면 무언가 억지로 구하려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스는 억지로 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인생은 한바탕 꿈같지만 꿈을 꿀 기회는 오로지 이 한 번뿐이니, 어찌 제대로 된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후스는 대충 살려는 우리 모두에게 일침을 놓는다.
“어떻게 몽롱한 채로 수십 년을 어영부영 보낼 수 있을까요?”
후스는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고는 했다. 세계는 무대고 우리는 무대에서 연기를 한다. 그게 인생이고, 연기를 대하는 마음은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라는 무대는 이미 주어져 있고,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사실 사회적 인간으로서 개인의 개성은 ‘1천 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1천 분의 999’는 사회적 산물이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은 ‘1천 분의 1천’에 속한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1천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개성을 갈고닦아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한다.
대표적으로 예수가 그런 사람이다. 누가 자신을 한 대 때리면 한 대 되갚아 주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에 그는 “누가 나의 왼쪽 뺨을 때리거든 오른쪽 뺨도 내어주라”고 했다. 그의 ‘미친 짓’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점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고 언행을 따라 하게 되면서 큰 종교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그 ‘1천 분의 1’의 개성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후스는 “자신의 성격과 가깝고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서 평생을 배우라고 강조한다. 이때 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신경 쓰지 말아야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 형, 친구가 ‘변호사가 되라’, ‘의사가 되라’ 해도 신경 쓰지 말고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주문한다. 오로지 자기 흥미에 따라 결정해야 전망이 무궁무진할 것이고, 결국 그것이 오히려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스는 아무리 미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큰 영향력을 미친다고 자주 말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회에 영원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니 기왕이면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평소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이를테면 인생관을 세우는 법, 평생 배움에 관심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는 법,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킨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사는 법 등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해 준다.
그렇다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나만의 개성을 발전시키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까? 후스는 ‘용인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시대를 앞서 갔던 자유주의 사상가였던 그가 “자유보다 용인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용인이 바로 자유의 뿌리이고, 용인이 없으면 자유 자체도 없기 때문이다.
용인은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마음’이다. 용인의 정신이 왜 중요할까? 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와 이 사회, 이 세계에 사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신을 믿지만, 저의 무신론을 용인할 수 있는 아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도 영혼불멸도 믿지 않는 저를 용인할 수 있고, 제가 국내외에서 무신론 사상을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용인할 수 있습니다. (…) 저는 이 세계에서 40여 년 동안 용인과 자유를 누렸습니다.”
후스는 이어서 이 나라와 이 사회, 이 세계가 자신에게 베푼 아량은 아름답고 고마운 것이고, 그래서 자신도 용인하는 태도로써 이 사회가 베푼 아량에 보답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인류가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 왔던 역사가 용인의 정신을 인정받기 위한 역사였고, 그 한 발 한 발이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었다고 역설한다.
후스는 용인의 정신과 함께 분투하는 정신을 강조했다. 불행히도 사회는 다른 사람의 생각도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생각을 짓누르는 경우가 잦다. 이때 필요한 것이 분투하는 정신이다. 세속에 흔들리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가는 정신 말이다.
용인의 정신은 구성원의 개성을 보장해 주고 분투하는 정신은 구성원의 개성을 발휘하게 해 준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정신은 인류가 역사를 관통해 온 정신이기도 하고,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자신을 실현해 가는 정신이기도 하다.
후스가 베이징 대학교 총장이던 시절, 젊은 나이에 베이징 대학교 교수로 발탁되어 후스의 가르침을 받은 지셴린은 훗날 후스에 대해 “후퇴할 수 없는 장기판의 졸처럼 평생 전진하기만 하신 인생의 참 스승”이라고 하면서, 나이 9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스승이 그립다고 말했다.
책 속으로10년 동안 비난을 받았지만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이들을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다. 그들의 비난이 타당하지 않으면 나는 오히려 그들을 걱정했고, 비난이 과해져 그들 자신의 인격을 해치면 나는 더욱 불안했다. (3쪽)
그대가 생명에 어떤 의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의가 달라집니다. 인생의 의의를 찾기 위해 온종일 고뇌하는 것보다는 인생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20쪽)
노력하지 않으면 영감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렵고 어떤 이는 쉽다면, 그동안 얼마나 축적해 놓았는가의 차이입니다. 철학가는 별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인생에서 얻은 의의가 남들보다 조금 많이 쌓여 있을 뿐입니다. (36쪽)
나는 지식을 갖게 된 후로는 줄곧 인생의 행복은 지식의 즐거움, 연구의 즐거움, 진리를 찾는 즐거움, 증거를 찾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욕망과 방법 속에서 인생의 유한함과 지식의 무궁함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인생으로 무궁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59쪽)
읽기 힘든 책일수록 그 책을 읽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자기 노예로 만들어 나의 앞길을 안내하게 해야 합니다. 어려운 책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독서의 즐거움’입니다. (94쪽)
여가 시간에 마작을 하면 노름꾼이 되고, 여가 시간에 사회에 봉사하면 사회의 개혁가가 될 수 있으며, 여가 시간에 역사를 연구하면 역사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가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종종 일생을 결정합니다. (106쪽)
가장 낙담하고 비관적인 때가 바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 때입니다. 세상에 헛된 노력은 하나도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내가 성공하지 않더라도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112쪽)
사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공을 결정할 때는 자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즉, 자기 성격에 가깝고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가? 내 성격과 비교적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39쪽)
개인의 존재가 1천 분의 1밖에 되지 않지만, 그 1천 분의 1이 바로 사회 진화의 원인입니다. 인류의 모든 발명은 개인의 점진적인 개조를 통해 최종적으로 성공한 결과물입니다. 오직 개인만이 사회를 좋게 바꿀 수 있습니다. 사회의 진화는 모두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160쪽)
주의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요?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적을까요? 이 모든 것이 나태함 때문입니다. 나태함의 정의는 ‘어려운 일은 피하고 쉬운 일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연구하는 것은 아주 어렵고, 주의를 목소리 높여 논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187쪽)
용인은 모든 자유의 바탕입니다. 자신과 다른 이를 용인하는 아량이 없다면, 자신과 다른 종교와 신앙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 편협한 태도는 “나의 신념은 결코 틀릴 리 없다”는 심리적 습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용인하는 마음은 가장 얻기 힘든 도량입니다. (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