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일철학'은 제목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며 질문이다. 일에는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선언이고, 지금까지의 철학에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경제학에서는 ‘노동’, 경영학에서는 ‘노무’, 조직론에서는 ‘사무’라는 개념으로 기능주의적 요소로서만 일을 다루었을 뿐, 실존적으로 접근하거나 그 자체를 철학적으로 다룬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철학'은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폭넓게 조망하며, 철학적 원리를 본격적으로 해명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사람과 세상을 잇는 매개 개념으로서 일의 영역을 정의한다. 이는 철학 일반에서 쓰이는, 무가치한 요소들까지 포괄적으로 포함되는 ‘행위(行爲)’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여기서 ‘일’이란 사람과 세상 모두에 유의미한 가치를 창출하는 통로가 될 때에만 성립된다. 개인의 행위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행위가 될 수 있는, 즉 개인의 욕구가 사회적 합리로 결합되고 승화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보편타당한 행위가 ‘일’이며, 궁극적으로 그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아실현’을 하고, ‘사회성’을 획득하며, ‘역사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일다워진다는 것이다.
일철학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관계’다. “‘일’이란 자연이나 사람, 사회 등과의 관계적 행위를 사물화, 물상화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화함으로써 관계를 관계답게 증장(增長)시키는 행위”이며, 그 목적과 지향은 오로지 관계를 관계답게 만드는 것 하나에 있다. 관계가 얼마나 잘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지는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 관계에 기생하며 유지되는 단적인 예가 관료주의에 물든 조직과 개인이다. 이 관계성에 들어 있는 요소들을 잘못 해석하고,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면 모든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관계’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이 책은 동양학의 연기론(緣起論)적 관점을 취한다. ‘내가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 이전에 이미 일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불교의 12연기를 통해 ‘일 아님’과 ‘일다움’을 살펴 나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12연기의 시작인 무명(無明)이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不知)’, ‘앎 자체가 없는 것(無智)’을 뜻하는 무명은 곧 관계에 대한 부주의과 무관심을 의미한다. 이 무명에서부터 애욕과 집착 등이 생겨나며, 이로 인한 관계, 기준, 목적의 상실 등이 일을 일답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일철학은 현상계에 출몰하는 어떤 것이든 고정된 실체인 ‘자성(自性)’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주체, 행위, 대상은 철저하게 ‘공(空)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가설적 실재인 ‘환(幻)’이 겹겹이 쌓이며, 그러한 대표적 현상이 지금 이 사회의 일자리에 대한 환상이라 할 수 있다. 일자리라는 관념 속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나 자신의 욕심이나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판단하고 자기 자신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지 않게 된다. 이에 저자는 정책적인 일자리 창출이나 효율적인 직업적 활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의 본래적 가치의 회복이라고 천명한다.
나아가 저자는 ‘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지금 우리 사회가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는 원인을, “일이 잘못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탁업(濁業)이 난무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사회역사적으로 건강한 일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현대 사회와 개인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실천적 방안을 전격적으로 제시한다.
1부 ‘고(苦) - 세상의 고통’에서는 저성장, 일자리 대란, 신계급사회, 관료의식 등 우리가 당면한 시대적·사회적 현실의 고통을 진단하고, 2부 ‘집(集) - 고통의 뿌리’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 ‘관계의 상실(무명)/기준의 상실(애욕)/목적의 상실(집착)’ 등 개인의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낱낱이 해부한다. 3부 ‘멸(滅) - 일철학 선언’에서는 관계를 관계답게(무잉여 선언), 가치를 가치답게(타당성 선언), 존재를 존재답게(투명성 선언) 복원하자고 선언하고, 4부 ‘도(道) - 시절의 물결’에서는 기존의 ‘직업적 인간’을 넘어서는 ‘일이있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이 미래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등장할 것을 예견하며, 앞으로 지향해야 할 구체적인 대안으로 공공, 품류, 체계화 등을 제시한다.
저자는 기성의 관습적 조직 생리, 직업적 행태에서 벗어나 개인 스스로 사람과 세상과 일을 근본적으로 재사유하고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함을 책 전반에 걸쳐 강조한다. 나아가 사고와 인지 능력을 기반으로 나 자신에서부터 모든 행위를 출발하는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는 저물고, 앞으로 사회· 역사적 건강성을 지닌 ‘일이 있는 인간’의 시대가 다가올 것으로 전망한다. 기능, 스펙, 직무를 중요하게 다루던 과거의 낡은 집단성에 속한 ‘직업적 인간’을 넘어 이전 조직 사회에서는 보지 못했던 성숙된 개별자들, 즉 ‘일이 있는 인간’들이 만들어 갈 새로운 집단성(체계화)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당대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며 그에 맞는 적실한 해법을 내놓는 '일철학'은, 일의 의미와 가치가 나날이 상실돼 가는 이 시대에, 관성적으로 일에 편승한 자신을 스스로 점검하여 존재의 건강성을 회복하도록 이끄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책 속으로
과연 일자리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이것은 말 그대로 일‘자리’일 뿐이지 실제적인 ‘일’과 어떤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주체적 능동성, 적극성, 목적성이 없는 일을 과연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단지 일‘자리’에 사람들을 앉혀 놓는다고 해서 일이 일답게 굴러갈까요? 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책적·인위적으로 급조해서 만들어진 일자리가 개인 차원에서든 사회 차원에서든 얼마나 지속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p.28)
직업은 신체적 점유이지만 일은 정신적 향유입니다. 일을 하는데 늘 불안하고 즐겁지가 않다면 삶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거나 그 일은 내 몸이 잠시 의탁하는 단순 호구지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55)
기능, 스펙, 직무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시대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는 ‘일이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로 꾸려지고 기존의 ‘협력-협동-융합(fusion)’이라는 형식적 관계를 넘어서 ‘근본적 재결합(radical collaboration)’이라는 본질적 관계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p.274)
부지런히 일하는 가운데 멈추어 서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일철학의 최종적인 선언입니다. 이는 우리가 잘 쓰는 말로 한가롭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한가로워야 합니다. 고요하고 한가로운 곳에, 언제나 사람과 세상을 마주하면서, 스스로의 때와 기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일입니다. 이러한 일철학이 살아 있을 때 우리말로 부지런하다고 하고, 이 삼박자가 안 맞으면 분주하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 살펴봅시다. 지금 우리네 삶은 어떠합니까(p.321)